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마을에 있던 묘지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해에 걸쳐 묘지 내에 자리를 차지한 대다수의 묘비들이 친인적의 품에 안겨 자리를 떴다.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한 비는 관할 공무원과 신문의 도움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도 돌 몇 개가 남는다. 내일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들은 모두 무연고 묘지로 옮긴다 하더라. 나는 사막 같은 터에서 서너 개의 비석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꽃 한 송이 없다. 나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얼굴이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센다이가 낳은 최고의 배구선수였다. 그는 종종 이 묘지에 찾아왔다. 처음에는 가족묘라도 찾아왔나 했지만, 이곳에 우시지마의 이름으로 된 묘비는 없다. 묘비가 옮겨지기 시작한 후에도 우시지마는 이곳을 찾았다. 어떨 때에는 하루걸러, 또 어떤 날에는 계절 몇 개나 지난 후에야 왔지만 이곳을 잊지는 않았다. 그의 손은 늘 비었고 몇 시간동안 자리를 데우다 떴다. 비석의 수가 사라져도 그의 방문은 여전했지만 정작 그가 묘비를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찾아온 돌덩이 앞에 섰다. 폐허. 관리하지 않아 비석 주위로 풀이 무성하다. 사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주인이 한때 굉장히 사랑한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으나 우시지마는 눈물 한 번 흘린 적이 없었다. 묘석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보고는 수긍했다. 오이카와 토오루(及川徹). 지하에 갇힌 것은 같은 성별의 뼈였다.


 이곳에 찾아오면서도 관리 한 번 하지 않으니 비석의 꼴이 저 멀리 떨어진 150년 된 기와와 다른바 없다. 우시지마는 절을 올리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마른 냄새가 났다. 나는 비질을 하는 척 그를 훔쳐보았다. 지난 번 화면 너머로 언뜻 본 시합에서도 표정 변화가 없더니, 똑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움직이지도 않고 저렇게 서 있는 것도 힘들 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묘지가 남은 것도 내일까지인 것을 버뜩 깨닫는다. 혹시 저 우시지마도 알고 있을까.


 묘지를 한 바퀴 돌았다. 낙엽을 구석으로 모은다. 필요 없는 행위지만 어차피 제게는 단순한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다. 건장한 배구선수는 아직까지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자리 주인 연고자 되시오?”


 이미 지난 몇 개의 단서로 추측했으면서도 물어본다. 그러자 고개만 살짝 돌려 저를 내려다본다. 아닙니다. 그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예상대로였다.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에 쯧 하고 혀를 찼다.


 “예전부터 종종 보여서 말해주는데, 혹시라도 연고자를 안다면 내일까지 동사무소에 연락하라 전해주는 게 좋을 거요. 이 묘지, 모레면 철거하거든.”


 우시지마는 그 사실을 몰랐음이 틀림없다. 나는 남자가 인상을 설핏 찡그리는 모양을 처음 보았다. 굴곡진 눈썹이 몹시 깊었기에 화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번듯하게 조각난 회벽을 곁눈질하더니, 입술을 뗀다.


 “그러면 이 묘비는 어떻게 됩니까?”

 “무연고 묘지로 옮겨지지.”


 무연고 묘지? 생소한 단어인 듯 혀로 히라가나를 굴려본다. 죽음에서도 머리 뉘일 곳 없는 자들의 말로. 진정 무덤의 무덤이로다.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또 한참 후에 되묻는다.


 “정확하게 언제 옮겨지는지 아십니까?”

 “이틀 후 아침 일찍이 되지 않을까 싶네.”


 시선이 또다시 이름 새겨진 돌로 향한다. 오이카와 토오루. 우시지마는 그 선연한 스물두 획을 오랫동안 담았다. 같은 수의 선분이 그 반절의 가을동안 계속 제 어딘가가 난도질당한 모양으로 남아있었더란다.


 “혹시 연고자가 아니더라도,”


 묘를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남자는 여전히 회색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나는 더욱 알 수가 없어졌다. 연고자도 아니고, 연인이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려 드는지. 친구라 하기에는 여태까지 묘석 앞에서 보인 남자의 행동이 지나치게 건조했다. 향 한 번 피워주지 않았으면서.


 “만약 자네가 법정대리인으로 등록되어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헌데, 자리 주인과는 무슨 사이오?”


 제 질문에 우시지마는 또 침묵했다. 오이카와와 우시지마의 사이는 엄밀히 정의내릴 수 없었다. 백 번 생각해도 가깝다 말하기에 모자랐고 단순한 지인이라기에는 감정이 남달랐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평생 묘지기가 될 수는 없을 터였다. 너는 내 모든 것을 거절할 것임으로. 결국 우리는.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 멈칫거리고, 다시 한 번.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썩 덤덤한 척 새김질한다. 남자는 나를 스쳐지나간다. 잘못된 어딘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저 이는 내 실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을 짐작한다. 나는 우시지마가 만들어놓은 흙먼지 쓰인 발자국을 비질로 없앴다. 그는 이 가난한 뼈와 아무 사이도 아닐 테지만 내일 또 이곳에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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