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오이] 사백엔 신데렐라
* 오이카와TS 주의
“왜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불현듯 카페에서 울리는 잔잔한 발라드가 불협화음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가사가 먼 동화 속의 거짓말마냥 속삭여온다. 오이카와는 들고 있던 잔을 강하게 내려놓았다. 탕, 머그잔과 유리가 맞부딪쳐 소리 난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뭐?”
“이런 곳에서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고 그랬다. 1분이면 다 마실 음료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건 어딜 보나 낭비군.”
“그래서, 지금 오이카와 씨랑 함께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오이카와는 신경질적으로 쏟아냈다. 그녀는 입술을 씹었다. 발간 립스틱이 지워진다. 슬쩍 내린 고개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불편하여 거칠게 한 번 쓸어 넘겼다. 마스카라 바른 속눈썹이 평소와 달리 몹시도 무겁다.
“너와 함께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둘이서 이렇게 보내는 방법이 무의미하다는 의미다.”
우시지마는 그녀가 꽤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쉬이 알아챘다. 싸늘히 가라앉은 낯이며, 꽤 번잡스러운 손짓이 그녀의 기분을 증명해주었다. 여타 여자아이와는 달리 화려하다거나 매끄럽기는커녕 단조롭다 못해 곳곳 테이프와 반창고를 바른 가느다란 손으로 냅킨의 끝을 매만진다. 오늘이 저희 첫데이트인 것은 알고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겨우 열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럼 우시와카쨩이 생각하는 ‘의미 있는 행동’은 뭔데?
“차라리 이번에 센다이 체육관에서 열리는 남자부 파이널 3라도 참관하러 간다던가, 혹은 배구 교실에라도 가서 연습을 하는 쪽이 낫지 않나.”
덤덤한 투로 답하며 그는 테이블 아래를 흘깃 바라보았다. 시야에 닿는 것은 마치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마냥 하얀 색의 구두. 뾰족한 굽은 다리를 훨씬 길어보이게 만들어주었지만, 애석하게도 우시지마는 그 늘씬한 선이 자아내는 미를 깨닫지 못했다.
“어차피 그 구두로는 딱히 연습도 못하겠지만.”
하여 감흥 없이 읊조렸다. 오이카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악쥐었다. 애꿎은 냅킨이 그녀의 악력에 짜부라 든다. 그녀는 제 내부의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아하.”
오이카와는 입가에 가볍게 비웃음을 걸쳤다. 삐뚜름하게 입매를 올리며 빈정거린다.
“대회를 구경 가고 싶었는데 오이카와 씨 때문에 못 가게 되어서 싫은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라…”
“아니면, 배구를 빼면 오이카와 씨에게서 볼일은 없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제 말마저 자르고 쏘아내는 말에 우시지마는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허. 그 꼴이 어처구니없어 오이카와는 또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한숨 쉬고 열 받아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저가 감히 그런 행동을 하는가? 연인, 아니, 솔직히 지금 심정 같아선 그렇게 칭하기조차 싫지만, 어쨌든, 여자친구와 보내는 처음 보내는 단 둘만의 시간에조차 배구라? 이건 둘 모두 배구부 주장이기 전에, 그리고 배구를 삶처럼 여기기 이전에 오이카와 제 자존심을 건드는 행위였다.
내가 바보였지. 저딴 녀석의 고백에 넘어간 내가, 내심 마음이 있었던 내가 바보였지!
“됐어. 그럼 그쪽은 그렇게나 좋아하는 배구 하러 가세요. 오이카와 씬 집에 갈 테니까.”
그녀는 잠깐 제 커피를 뿌려버릴까, 하다가 커피 값조차 아깝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굽이 삐끗거린다. 휘청거리며 두 눈 크게 뜨는 얼굴을 본 우시지마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오이카와를 붙잡았다.
“이것 봐라. 그러게 왜 구두 같은 걸 신어선….”
“닥쳐. 네 도움 없어도 넘어질 리 없었거든?”
오이카와는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의자 위에 올려둔 자그마한 클러치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것처럼 강하게 때렸다. 본디 오이카와 토오루가 미야기현 최고의 세터라는 이름과 동시에 남자 선수 못잖은 강력한 스파이크 서브로 유명한 만큼 우시지마 역시 진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면 죽여 버릴 거야.”
오이카와는 으름장을 늘어놓고는 서둘러 카페를 벗어났다. 굽이 몇 번이고 흔들리는데도 도리어 꿋꿋이 허리를 폈다. 짜증나. 더운 숨이 잇새로 몇 번이고 빠져나왔다. 이미 입술은 색을 잃었다. 정말 짜증나. 오이카와는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서러움과 답답함과 분노가 마구잡이로 뒤엉켜 눈가가 홧홧했다. 목이 간지럽다. 짜증나. 우시와카 녀석, 진짜 열 받아. 치맛자락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자식, 죽는 게 무서워서 정말 따라오지도 않아?
내가 좋다며. 남자가 한 번은 붙잡아야지, 이게 뭐야. 나 혼자 무슨 꼴이야. 그녀는 홧김에 신고 있던 구두마저 벗어던졌다. 흰 구두가 이리저리 굴러가 어느 담 아래에서 멈춘다. 새로 산 구두였다. 분을 못 이겨 눈물이 흘러내렸다. 화장했는데, 라는 생각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알 게 뭐야. 데이트도 쫑났는데. 오이카와는 얇은 살색 스타킹 한 장 덧씌운 발바닥으로 아스팔트를 걸었다. 얼굴을 가르는 물줄기 때문에 뺨이 간지러워 손등으로 마구 부빈다. 새언니에게 부탁해 기껏 바른 분이 눌리고 지워진다.
“나쁜, 나쁜 새끼.”
흐어엉. 저절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서러웠다. 우시지마와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밤에는 설레서 잠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이와이즈미에게 라인을 보내며 이 옷이 낫냐, 이 원피스가 낫냐, 잔뜩 괴롭혀댔을 정도로. 이와이즈미는 네게 이런 원피스도 있었냐? 라는 대답만 보낼 뿐이었다.
“좋아하긴, 흑, 개뿔. 넘어져서, 흐엉, 코나 깨져라….”
우시지마 때문에 오이카와는 간만에 잘 하지 않는 화장을 해봤다. 평소에는 신경 써저 치장해봤자 틴트와 화이트닝 효과가 있는 선크림이 전부였는데, 오늘은 새언니의 화장품을 빌려 파운데이션부터 쉐딩이며 블러셔까지 죄 칠했다. 아이라인도 그리고 마스카라도 발랐다. 전부 배구 선수에게는 어차피 땀을 흘리면 지워질 것들이라 축제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하지 않던 것이었다. 피부가 갑갑하고 화장을 제대로 얼굴을 만질 수 없는 것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래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진짜, 죽어버려, 나쁜 놈. 히끅, 인터하이에서, 이와쨩에게, 히끅, 잔뜩 깨져버려라.”
걸음걸음이 맨살로 딛는 듯 했다. 마냥 하얬던 구두와는 달리 발바닥이 새까맣게 물든다. 처음으로 산 구두였는데. 배구 선수에게 발목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서 한번도 신은 적 없던 걸 너 때문에 처음으로 신어 봤는데. 좁고, 갑갑하고, 걷기 불편하던 걸 겨우 참아가면서 보폭 넓은 네 걸음에 맞췄는데.
전부 엉망이었다. 겨우 이딴 놈 때문에 이렇게까지 신경 썼던 저만 바보가 된 셈이다. 왜 먼 옛날 저를 좋아한다는 말에 수줍게 얼굴을 붉혔던가. 오이카와는 그게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괴물처럼 번지고 흘러내린 검은 눈물을 다시 한 번 닦아내고, 그래도 남아있는 쪽은 있는지 제 꼴이 민망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흐끅. 울음 사이로 딸꾹질이 새어나온다.
이와쨩에게 갈 거야. 가서 이 개자식 좀 패달라고 해야지. 그 죽고 못 사는 배구로 한 번 당해보라 그래. 생각하며 흐느꼈다. 데이트였는데. 개자식.
“오이카와.”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으면 아직까지도 그 놈의 목소리가 환청마냥 들린다. 오이카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어 소리를 털어냈다. 눈가를 닦아내자 손에 거뭇한 흑연 같은 자국이 묻어나온다. 그냥 서둘러 집에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발을 놀렸다.
“오이카와.”
또 한 번 같은 목소리가 제 어깨를 붙잡는다. 오이카와는 멈칫했다. 환청이 아니었나? 하지만 우시와카 따위가 날 따라올 리 없잖아. 아까 뒤를 보았을 땐 없었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이용해 저를 돌려세운다.
오이카와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손에 죽고 싶어서 따라 온 거야?”
우시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몸을 굽혀 그녀의 발아래에 무언가를 놓아둘 따름이었다.
“발 다친다.”
단 한 마디. 다시 쏘아붙이려던 모난 말들은 손을 조금 내리자 곧장 드러나는 무언가에 쑥 들어간다. 오이카와는 잠깐 말을 잃었다.
“…히끅.”
그러다가 딸꾹질 소리가 또 한 번. 침묵을 깨는 소리가 민망하여 그녀는 입을 앙물었다.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속눈썹 끝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 하나가 뚝하고 떨어진다. 길가의 문구점에서 파는, 흰 줄 두 개 그인 싸구려 슬리퍼 위로 물방울이 고였다. 심지어 사이즈조차 제 발에 맞지 않게 약 두 치수는 더 크다.
헌데 이상하게도 화를 내야 마땅할 슬리퍼에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너, 우시와카, 너 진짜….”
“하이힐은 발목을 접질리기 쉽다. 운동을 하는 발이니 조금 더 소중히 여기도록.”
“너, 진짜 싫어….”
“그래.”
우시지마는 그리 말하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잠깐 바닥에 내려두었다. 아까 전 제가 버렸던 구두였다. 어떻게 찾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뒤늦게야 아까 전 저를 돌려세우던 우시지마가 손이 아닌 팔을 썼다는 것을 자각했다. 양손에 각각 구두와 슬리퍼를 들고 있어 손을 쓸 수 없던 것이었다.
그는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까만 슬리퍼를 손수 신겨주었다. 사랑하는 신데렐라를 찾기 위해 재투성이의 발에 손수 구두를 신겨주던 왕자님처럼. 커다란 슬리퍼가 질질 끌렸다. 꽃무늬 원피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잇새로 흐느낌을 내보냈다. 남자가 말했다.
“이것도 잘 어울린다. 예뻐.”
개소리임이 틀림없다. 언젠가 숙모가 선물해준 3만엔짜리 원피스와 400엔은 겨우 할까 싶은 싸구려 슬리퍼 따위가 어울릴까보냐. 하지만 오이카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화장 죄 지워진 얼굴을 보이기 싫어 우시지마의 단단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