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 하고 문소리가 울렸다. 가방에 든 짐이 무섭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틸 바로 맞은편 소파가 위치한 자리가 비었다. 이와이즈미는 혹시라도 늘 앉던 자리가 빼앗길까봐 서둘러 그곳에 제 짐부터 내려두었다. 노트북을 꺼내두고 콘센트를 미리 연결해 두는 둥 과제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야 그는 제 지갑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 입구는 몇 명의 여학생들이 알바생을 가리며 잔뜩 둘러싸고 있었다. 한참을 걸려 무슨 시럽이니 초콜릿 휘핑이니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잔득 추가한 후에야 그녀들을 물러났다. 으아, 자리 빼앗겼어.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빈 자리였는데! 제 등 뒤로 울상 짓는 목소리에 내심 뿌듯해졌다.
“안녕하세요, 스타벅스 입니…, 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스몰. 얼음 많이 넣어서.”
“이와쨩, 스몰이 아니라 톨사이즈. 나 말고 다른 파트너가 들으면 숏사이즈인 줄 알잖아.”
“알게 뭐냐.”
퉁명스러운 말에 계산대에 서 있던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스타벅스는 다른 카페랑 단어가 다르니까. 여기가 이상한 거지. 진짜 이와쨩 바보같아. 명랑한 웃음이 터졌다. 까만 셔츠에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맨 오이카와는 기기를 몇 번 누르더니 여상히 손님 대하는 말투로 말했다.
“소비세 포함 360엔입니다~”
동전이 짤랑거렸다. 네, 360엔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제 손 위로 떨어지는 숫자에 오이카와가 또 한 번 웃음을 남발했다. 그런데 이와쨩, 요즘 여기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냐?
“요새 과제 시즌이라서 그래.”
“원래 카페에서 과제하는 타입은 아니잖아.”
“아, 시끄러워. 네 놈이 얼마나 일 잘 하는지 감시하려고 와주는 거니까.”
오이카와 씨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한 대 맞고 닥칠래, 그냥 닥칠래. 한 번 으름장을 놓은 뒤에야 오이카와는 쫑알거리던 입을 닫았다.
“기다리고 있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만들어줄게.”
“너 커피 만들 순 있냐?”
그냥 얼굴 담당 아니었어? 오이카와는 잔뜩 억울한 낯으로 외쳤다. 이제까지 이와쨩이 마셨던 것들 죄다 오이카와 씨가 만들어준 거거든! 그리고는 제 옆에 있던 스타벅스 앞치마를 맨 다른 한 명에게 잠깐 양해를 구한 뒤 뒤쪽의 커피 머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어깨만 으쓱이곤 주문을 받는 곳에서 기다렸다. 아직까지 저희들 음료를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들이 저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 사람, 오이카와 씨랑 친한가봐. 오이카와 씨가 직접 음료도 만들어주고, 부럽다.
아니, 도대체 이놈은 돈 벌러 와서 여자가 꼬시고 있는 건가. 가게에 들릴 적마다 한 번씩은 꼭 듣는 소리에 두통이 도졌다. 이와이즈미는 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자 아이들의 무슨 프라푸치노니 뭐니 하는 음료보다 제 음료가 먼저 나왔다. 작은 사이즈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꽤 커다란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가 나왔다. 진실로 한 사발 같았다.
“땡큐.”
“오이카와 씨 보지 말고 정말 과제해야해?”
“쓸데없이 네놈 얼굴 볼 일이 뭐가 있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와이즈미는 빨대와 냅킨 몇 장을 뽑은 후 제 자리로 돌아갔다. 확실히 푹신한 벽 측에 앉으니 편했다. 몇 여자 동기들이 안쪽 자리를 선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컵을 내려두고 무료 와이파이에 연결하자, 인터넷으로 접속한 라인에 알람이 징징 울렸다. 조별과제를 위해 만든 단체방의 것이었다. 그는 창을 켜 잠깐 사이 쌓인 내용을 정독하고 제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는 개인 과제를 하던 창을 킨다.
시간이 노도였다. 기실 오이카와를 감시할 틈도 없었다. 한참을 집중하다가, 이따금 한숨을 돌리려 할 때면 커피를 마시는 대신 고개를 똑바로 올렸다. 그럴 때면 항상 오이카와가 보였다. 조금 떨어진 틸에 서있던가, 음료를 만드는 뒷모습을 잠깐 응시하다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감시라기보단 감상에 가까운 행위였다. 얼음이 자꾸 녹아 양은 도리어 많아졌고 커피는 한 없이 밍밍해져만 갔다.
겨우 두 시간 걸쳐 개인 과제 하나를 끝내니 이번에는 제 메일함에 메일이 두어 개 쌓였다. PPT를 맡아버린 터라 자료 수집을 끝낸 조원들이 제 파트를 보낸 것이다. 교양 교수가 전부 짠 조원 명단에는 신입생들도 몇 섞여 있던 터라 그는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자료를 점검했다.
“허.”
아니나 다를까, 출처 표시도 없고 대충 웹사이트에서 검색해 긁어온 것이 분명한 자료만 가득하다. 장장 10페이지가 넘어가는 자료는 저가 생각하기엔 뿌듯할지 몰라도 저걸 죄 정리해야 할 입장이 되는 이와이즈미로선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망했네. 그는 작게 읊조리며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다시 한 번 이제는 보리차가 되어버린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고개를 올리니 어김없이 오이카와가 보였다.
직선상에 보이는 낯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커플로 보이는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모습이 꽤 피곤해보였다. 하긴, 4시간이 넘게 서서 저러고 있으니 지칠 만도 하겠지. 아무리 운동하는 사람이라 쳐도 체력과 사람을 대함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별개의 것이므로.
이와이즈미는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간 정도만 더 지나면 퇴근일 것이다. 저도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자료를 솎아내고, PPT 순서를 정리하고 시안을 잡으면 그 즈음 될 것이다.
홀로 할 일을 정리하고 고개를 주억이자 손님이 음료를 픽업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가 반달처럼 휘었다. 좋아하기는. 이와이즈미는 과장스럽게 코웃음 치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시선을 내렸다. 시야로 다시 신입생이 보내준 10pt짜리 빽빽한 자료들이 들어왔지만 아직까지도 저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자판 위에 올려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딸랑거리는 유리문 앞 종소리에 따가운 화살이 빗겨간다. 그제야 노트북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와쨩. 많이 기다렸어?”
가까스로 받은 자료를 정리하고 PPT 초안을 잡아두자, 맞은편에서 기척이 들렸다. 탁자를 빼는 소리와 더불어 제 테이블 위로 무언가 탁, 하고 내려두는 소리. 이와이즈미는 눈만 데굴 굴렸다. 제가 주문한 것 보다 조금 더 작은 컵에 담긴 음료가 보였다. 맞은편에는 앞치마도, 녹색 모자도 검정색 셔츠도 전부 벗은 오이카와가 있다.
“자, 이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주는 서비스.”
“뭐냐.”
“녹차크림 프라푸치노. 이와쨩은 커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항상 아메리카노만 주문하잖아.”
“그런 건 이름도 길고 복잡하잖아.”
뭣보다 비싸. 이와이즈미가 그리 말하며 제가 한 파일을 저장한 후 탁 소리 나게 노트북을 닫았다. 오이카와는 짐을 꾸리는 그를 지켜보며 남긴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으, 맛 없어.
“그렇다고 커피를 다 먹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그란테 사이즈로 줬다니까. 심지어 눈앞에 있는 치는 저가 남몰래 사이즈를 올려준 것도 모르는 눈치건만. 속으로 꿍얼거리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제가 만든 음료를 쥐어주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들였다. 딸랑, 시원한 에어컨 바람 가득했던 실내를 나서자 뜨거운 뙤약볕이 내렸다.
“그런데 이와쨩, 오이카와 씨 감시하러 왔다면서 왜 감시는 안 해?”
“뭐?”
“진짜 계속, 계에속 노트북만 하던데. 중간에 눈 한 번 마주칠 때 말고는 한 번도 안 보고. 야동이라도 본 거야?”
무슨 헛소리야? 이와이즈미는 퉁명스레 답했다. 오이카와를 본 적 없다는 말과 끝에 이어진 농담 양측 모두에 대한 질문이었다. 저가 몰래 훔쳐본 얼굴만 몇 갠데.
“오이카와 씨, 은근히 실망했어. 여자 애들이 말 걸어주면 이와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려주기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이야.”
“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계속 노닥거렸냐?”
“당연히 그건 아니지!”
이미 저를 계속 지켜봤다는 것부터 틀려먹은 것 같은데.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말하지 않았다. 남말 할 터지도 아니었거니와, 나쁜 기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아까 전 눈이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했을 뿐. 그는 대답 대신 오이카와가 만들어준 음료를 빨아들였다. 이를 딱딱 부딪칠 적마다 잘게 간 얼음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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