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그런 문장이 있다.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을 예상하게 되는 언어. 실제로 들은 적은 몇 번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 전부터 제 곁에 도사리고 있던 것 같은 말. 앞뒤를 논하기 전에 발작적으로 거절하게 되는 그런 것.
“시라토리자와로 와라.”
“싫은데?”
이를 테면 지금 우시지마가 지껄이는 말이 그랬다. 오이카와는 사실 그의 가늘게 찢어진 입술 사이로 옅은 바람을 내보낼 적부터 제게 무슨 말을 할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껏 5번은 들었나? 우시지마의 얼굴을 볼 적마다 자연스레 저 제의가 연상되리만큼 질린 문장임에도 막상 헤아려보면 그 수가 생각보다 적다. 얼마나 제게 충격적이었으면 습관으로 받을까. 그는 척수반사로 말을 뱉었다. 우시지마는 마땅한 수순으로 미간을 좁힌다. 그러나 그 간극이 손톱만도 못했다.
“네 실력은 썩히기에 아깝다. 분명 그곳에서는 평생 전국에 가지도 못할 터인데.”
“시끄러워. 이번 봄고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거든? 너도 시라토리자와도 쳐부수고 보란 듯이 도쿄에 가줄 테니까.”
“재미있는 농담이군.”
아악! 오이카와는 제 선전포고가 단숨에 농담으로 치부 당하자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떻게든 얼굴을 구겨도 제 안에서 불나는 것을 고스란히 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지만! 않았다면! 좋을 텐데! 아니, 사실은 평생 만나지 않는다면! 오이카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덩달아 포장된 서포터 비닐이 엉망으로 구겨진다.
물론 센다이는 미야기 현에서 가장 대표되는 도시였고, 그만큼 스포츠샵도 다양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리 센다이 일지라도 ‘가장 유명한 스포츠용품점’은 하나라는 것이다. 아, 여기서 여름 세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어제 연습 때 쓰던 서포터 한 짝이 너무 닳아 흘러내리지만 않았더라면 오늘 이곳에 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오이카와는 반쯤 짜증스레 외쳤다.
“왜 너는 그렇게나 날 못 들여서 안달인데?!”
“? 그야 당연히 네가 올려줬던 토스가 가장 훌륭했기 때문이다.”
우시지마는 담담하게 찬사했다. 와중에도 제 질문이 이상하다는 양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모습이 짜증났다. 이미 그 되도 않은 찬사에 감사하기엔 오이카와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시라토리자와도, 국가대표도 어지간히 세터 가뭄인가 봐? 오이카와 씨의 토스가 가장 훌륭했다는 것을 보면. 빈정거리려는 찰나,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입이 움직이려는 것에 아랑곳 않고 먼저 물었다.
“그러는 넌 왜 나를 거절하지 못해 안달인가?”
“…….”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답 않았다. 처음 듣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사내의 성정을 생각하면 저가 먼저 비슷한 질문을 던졌기에 그 역시 깊이 마음 두지 않고 되물은 것이 분명했다. 당연하게 그의 의도를 추측하다가, 이번에는 어째서 자신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 한탄했다. 그는 한숨처럼, 그러나 그마저 끊을 듯 단호하게 말했다.
“패배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네 방식이 끔찍해.”
“패배에 가치가 없는 건 당연하지 않나?”
“단순히 이득을 논하는 게 아니라 너는 그것에 아무런 의미도 붙이지 않잖아.”
목소리가 다소 서늘했다. 멀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다. 코트 위로 번쩍이는 수 개의 조명들이 눈부셨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던 땀 혹은 눈물. 우시지마가 선 자리만이 깨끗했더란다.
우시지마는 또 한 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한 말이군. 나도 지면 슬퍼하고, 분해한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닌가?”
“아니, 넌 안 그랬어.”
단언하고선 뒤돌아섰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던 탓이다. 애초에 이런 것 외에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고. 오이카와는 계산대에 서서 다시 우시지마가 있던 방향을 보았다. 그는 멀뚱히 눈을 깜박이다가, 담백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제 확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실망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퐁퐁 샘솟는다. 기억도 못하면서 내가 올려준 토스가 훌륭했다니 뭐니 지껄인 거야? 제 안의 무언가가 와삭하고 부서졌다. 자존심은 아닌, 오히려 유대에 가까운 어떤 것. 오이카와는 보란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서포터와 더불어 새로 산 리스트밴드가 든 봉투를 흔들며 가게를 빠져나간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같은 코트에 선 적이 있었다. 중학교 3년 적의 일이다. 제 인생 중에선 가장 소중했던 대회 중 하나라 필연적으로 가슴에 담을 밖에 없다. 그는 햇살 내린 자리만을 골라 디디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딱 지금과 반대되는 계절이었다.
“도도부현 대항 중학교 배구대회(都道府県対抗中学バレーボール大会)?”
“응.”
이와이즈미의 되물음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배구를 하는 중3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었다. 매년 겨울, 지역별로 재능이 있는 중학교 3학년들을 대상으로 지역팀을 꾸려 참가하는 대회였다. 모든 도도부현이 한 개의 팀을 꾸리고, 개최지의 경우에는 개최지 특전으로 한 개의 팀을 더 꾸려 총 48개의 팀이 출전한다.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중학생만을 선발해 시합시키는 이 대회는 장래의 국가대표들을 미리 눈도장 찍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잘 됐네.”
그리고 리베로와 후보까지 도합 12명의 엔트리 중, 오이카와에게 그 영광의 한 자리가 돌아간 것이다. 더군다나 설명에 따르면 미야기 현 측에서는 오이카와를 정세터로 고려중이라고 했다. 얼마 전 미야기현 체육대회에서 베스트 세터 상을 탄 것이 호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출전 제의를 받은 당사자는 생각보다 떨떠름한 기색이라,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모으며 제 소꿉친구를 보았다.
“근데 왜 그런 표정이야?”
“어?”
“설마 너, 출전 안 하겠다고 말한 건 아니지?”
“아니, 그건 아닌데….”
“확답 안한 거냐?”
윽. 오이카와가 장난스럽게 한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와이즈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곡을 찔렀다는 의미였다. 그가 확답 하지 않는 이유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더 찔렀다.
“우시와카 때문이냐?”
“…이와쨩, 배려 없어.”
“네놈에게 베풀어 줄 배려 따윈 없어.”
매정한 말에 과장스럽게 눈 끝자락을 축 늘어뜨렸다. 그도 그럴게 이번 대항전, 우시와카도 나갈 것이 틀림없잖아. 오이카와가 삐죽하니 토로했다. 도도부현 중학전에서는 원칙적으로 180cm 이상의 선수는 무조건 3명 이상 엔트리에 포함시켜야만 했다. 오이카와의 키는 아직 180cm이 못 미치지만, 우시지마는 넘었다. 지난 대회에서 만났을 적의 눈높이로 어림짐작해보면 분명했다. 더군다나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이미 작년에 본 대회에 미야기 팀의 선수로 선발된 전적이 있던 것이다. 대체로 참가하는 것은 3학년 선수뿐이지만, 재능이 뛰어난 1, 2학년이라면 충분히 선수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이름을 올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회 규칙상 엔트리에 등록된 선수는 필수적으로 전일본 중학교 강화 합숙에 참가하고, 시합에서 최소 1회 이상 출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 번 참가했으니 당연히 두 번도 참가할 것이다. 미야기 현 배구 협회가 그에게 제의를 하지 않을 리 없다.
“참가해라.”
이와이즈미는 퉁명스레 내뱉었다. 명령조에 가까운 투. 겨우 그런 놈 때문에 전국의 내노라하는 놈들과 겨룰 기회를 놓칠 거냐? 그럼 넌 정말로 멍청이가 되는 거다, 이 멍청아.
“이미 멍청이라고 부르잖아!”
“지금도 멍청한 생각이나 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만약 나가게 되면 우시와카 따위랑 같이 합숙하고, 연습하고, 심지어 같은 코트에 서서 토스를 올려줘야 할 텐데?”
더군다나 현재 미야기의 모든 중학교 3학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우시지마다. 그가 이번에 새로 꾸릴 팀의 에이스가 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오이카와는 영락없이 그를 제 에이스 삼아야 했다.
“그래도 해.”
“이와쨩은, 오이카와 씨의 에이스 자리를 빼앗겨도 좋은 거예요?”
“그딴 거 줘도 안 가지거든?”
“너무한다!”
빽 외치면서도 오이카와는 처음보다 조금 안색이 풀렸다. 어느 정도 결심이 선 모양이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에 안도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누가 멋대로 빼앗긴대?”
“어?”
“‘오이카와의 에이스’라는 자리, 빼앗기는 게 아니라 잠깐 빌려주는 것뿐이니까.”
넌 걱정 말고 전국을 부수고 와.
“…….”
오이카와는 저보다 뻔뻔한 옆모습을 응시했다. 마음이 놓였다. 우시와카와 있을 마찰이라던가, 대회 기간 즈음 맞을 학기말 시험 같은 건 제 앞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년은 빙긋 웃었다.
“응. 그럼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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