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오늘은 비가 와서 택배가 도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관리실에 정말 아무 것도 안 왔어요?” 되물은 후에야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문 입구 역시 깨끗했다.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 돌리는데, 반쯤 들어 올린 오른팔 사이로 찬 공기가 들어찼다. 옆구리가 공백이다.


그의 집은 혼자서 살기에는 상당히 널찍했다. 커다란 텔레비전과 커다란 사내 녀석이 완전히 누워있어도 모자라지 않는 길이의 소파, 부엌 식탁에 의자는 두 개고 하나 있는 침실은 킹사이즈다. 신발을 벗고 신발장을 열면, 정확하게 오른쪽 절반은 텅 비어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쓰게 웃으며 먼지 냄새 내려앉은 집에 발자욱을 남긴다.


어느 겨울,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두고 떠났다. 그의 이름은 일()자를 써서 하지메. 오이카와 토오루의 반쪽이 아닌 온전한 한쪽이라, 그가 없는 현재 자신은 영이 되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정확히 함께 살던 집의 절반을 갈라서 떠났다. 오이카와는 아직도 그가 왜 떠나야만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내가 싫었던 걸까. 어느 날 말도 없이 모습 감출 정도로. 네가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든 고칠 자신 있었는데.


이후로 사내에게는 매일 우편함과 택배 보관함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라도 그가 제게 무슨 말을 남길까봐. 네가 썼던 물건 다시 가지고 돌아 올까봐. 일분일초 기대를 품었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들숨과 날숨의 박자와 동일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의 파란 칫솔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씻은 후 그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바디워시로 샤워를 했다. 집의 어딘가에서 이와이즈미의 향이 났으나 이와이즈미는 이곳에 없다.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 매번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나 많이 잘못한 거야? 오랜 소꿉친구는 제가 투정부리고 신경질을 내도 앞에서 화를 내고 잔소리를 했지, 결코 이런 식으로 떠난 적은 없다. 꾸준히 옆에 있어주었기에 그는 오이카와 전체의 일이 될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단 말이야.


여전히 택배는 오지 않았다. 우편함을 열면 고지서 한 장 뿐이다. 오이카와는 의미 없는 껍데기만 남은 채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 전 자신을 매정하게 버린 사람을. ()만 남긴 채 떠난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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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니를 뺐다.


 의사는 굳이 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지만 자라는 과정이 고통스러워 빼달라고 우겼다. 마취를 하고 왼쪽 위와 아래를 발치했다. 안쪽에 물고 있는 솜을 뺄 수 없어 말을 꺼내는 것이 힘겨웠다. 자신의 반 투정으로 치과까지 함께 온 아오네가 눈빛으로 괜찮냐 물어도 후타쿠치는 음음, 목울음 이상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반쯤은 다행이었다.


 아직 마취는 풀리지 않았지만 입 안쪽이 허하고 얼얼한 감각은 생생했다. 지금은 이런데 마취가 풀리면 어떻게 될까, 약을 처방받으면서도 어쩐지 두려웠다. 약사는 덩치가 곰만한 사내 둘이 들어와 아무 말도 없이 처방전만 내미는 모양을 두려워했다. 저희 눈치만 힐끔 살피는 것이 느껴졌지만 후타쿠치는 대답을 할 처지가 아니고, 아오네는 원체 말이 없는데다가 애초에 직원의 눈빛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내 둘과 약국 직원 하나, 약사 한 명 총 넷 사이의 어색한 침묵만을 두고 겨우 약을 받아 밖으로 나선다.


 햇빛이 따사로워 치과에서 찜질을 하라며 주었던 얼음팩을 조용히 왼쪽 뺨에 가져다 댄다. 지나치게 차가웠다. 아오네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에 그저 손을 내저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 아오네는 미심쩍은 낯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제 손짓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후타쿠치는 인상을 찡그리고는 손을 뻗어 제 친구의 뺨을 잡아 앞을 보게 했다. 이정도면 알아듣겠지.


 얼음팩을 줄곧 붙이고 있으니 팩이 제 맨살에 달라붙은 듯하여 다시 뗐다. 길거리에서는 어떻게 팩을 붙이고 있어도 전철 안에서까지 가져다 대고 있는 것은 조금 쪽팔렸다. 냉기 남은 뺨을 손바닥으로 슬쩍 가져다대니, 감각 없는 볼이 벌써 퉁퉁 부어올랐다. 혀조차 따끔하게 느껴졌다. 괜히 마음까지 서러워진다. 선배들이 그토록 아프다며 겁을 주더니, 정말 아프잖아. 제대로 된 고통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도 고통스러웠다. 엄살이 심한 편은 아닌데.


 좌석에 앉아, 괜히 부어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가만히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할 때까지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핸드폰이라도 만지겠지만, 그럴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불편하기도 했고. 온 신경이 이미 빠져나간 사랑니에 머무르듯 했다. 의사는 뿌리까지 잘 뽑혔다고 말했는데.


 역이 멈추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까만 가쿠란을 입은 학생무리였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하필 오늘같은 날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선한 인상의 남자까지 발현한 후타쿠치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필사적으로 제 얼굴 가리고 부푼 볼까지 숨긴다. 오초. 전철 문이 닫히고, 까만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자신의 반대쪽 좌석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다리와 운동화가 보였다. “저기 다테공 아냐?” “! 가서 말 걸어볼까?” “뭐라고?” “물론 다음 번에도 쳐부숴주겠다고!” “그건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시비를 거는 거지. 유우,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유난히 짧은 다리가 시선 끝에서 달랑달랑 거린다. 평소라면 빈정거릴 법도 한데, 말을 할 수가 없어 후타쿠치는 차라리 시간이 지나기를 기원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강렬한 시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소리는 없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이제는 저 다리 짧은 소년을 말린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소년이 자신에게 말을 걸 이유도 없다.


 후타쿠치는 침묵했다. 벌써 마취가 풀리는지 입 안 어딘가가 아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해서야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다. 왼쪽 뺨을 붙잡은 채. 아팠다. 몹시도, 누군가 제 입 안을 주먹으로 내리꽂듯 했다. 몸 전체를 손으로 쥐어 잡고 흔들 듯 했다. 사랑니가 나기 시작할 적보다 더 아팠다. 그는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얼음팩을 뺨에 붙였다. 그새 약간 녹아 축축하다.


 함께 내린 아오네가 다시 저를 응시했다. 입을 열지 않아도 의미는 안다. 후타쿠치는 아까 전 그랬듯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마. 아오네는 이번만은 제 의미를 알아듣고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후타쿠치는 나란히 걷는다.


 그러나 전부 거짓말이다. 빠져나간 자리가 고통스러웠다.

 




 

 내가 이런 놈을 좋아할 리가 없다. 쿠니미는 열여섯 번째 되새긴다. 딱 제 나이 숫자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선, 고시키 츠토무라는 마찬가지로 열여섯 먹은 사내아이는 딱 제 나이 횟수만큼 나잇값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아키라! 빨리 와서 이거 써보라니까?”

 “내가 이름 부르지 말랬지.”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만 부르지 말랬잖아. 지금은 우리 둘 뿐이라고.”


 공부는 쥐뿔도 못하고 배구 특기생으로 시라토리자와에 입학한 주제에 왜 그럭저럭 머리가 돌아가는 거지? 그는 도저히 제 연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정말 인정하기 힘들지만 진실은 진실이다. 쿠니미 아키라와 고시키 츠토무는 사귀고 있다. 세상에, 쿠니미는 머릿속으로 한 문장을 정리하다가 저 스스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역시. 이것 봐, 예쁘다.”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 실례라고 말했잖아.”


 예쁘고 귀여워. 예쁘다고 하지 말라니까. 내가 이런 애랑 사귀고 있다니. 그는 한탄했다. 제게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띠를 씌어주고 해맑게 웃는 꼴이 정말로 유치하고 어울려주기 힘들다. 쿠니미는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띠를 벗으려 했지만, 고시키가 완강하게 붙잡아 실패하고 말았다. 쿠니미는 표정만으로 그를 향해 무언의 불만을 표출했다. 고시키가 웃는다.


 “잘 어울리니까 그냥 하고 있어.”


 이윽고는 저 역시 강아지 귀가 달린 머리띠를 고르고는 값을 치러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건 싫은데. 제 낯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시키가 쿠니미의 손목을 잡아끌며 또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미안. 나무늘보 머리띠는 없어서.”


 진지하게 놀이공원에 데이트하러 와서 싸우자는 걸까?


 정말이지, 이벤트에 본인 포함 동반 1인 무료입장권을 얻게 되었다고 제게 넌지시 말했을 때 열 번 거절했어야 했다. 멀고 귀찮고 시간이 안 난다며 아홉 번을 거절했는데, 차마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더는 외면하지 못한 게 탈이다. 놀이공원에 못 간지 6년이 넘었다던가, 사귀는 사람과 놀이공원 데이트를 가는 게 꿈이었다던가 하는 말들도 딱히 감흥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여기선 손을 잡고 다녀도 남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말 때문이었나? 그 말에도 그냥 콧방귀만 뀌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자이로드롭을 타러 가자며, 고시키가 꺄악,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저를 이끌었다. 평소에는 손끝만 잠깐 스쳐도 쑥스러워 하면서 지금은 놈이 제 손목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은 알까. 쿠니미는 물끄러미 온기가 마주한 곳을 응시했다. 스파이커인 만큼 손이 큰 것은 납득하지만, 제 손목을 완전히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이상했다. 간지럽지는 않지만 말랑말랑한 느낌. 여전히 적응되지 않은 감각에 인상을 찡그렸으나, 일단은 순순히 고시키를 따라갔다. 천천히 가. 그래도 발은 맞춰줄 생각이 없어 한 마디 뱉는다.


 “나 드라마에 이런 거 나올 때 마다 꼭 타보고 싶었어!”

 “드라마도 봐?

 “가끔 엄마가 틀어놓은 거 봤지! 나도 남자주인공처럼 낙하할 때 아키라 사랑해!’ 외칠까?”

 “정말 싫다.”


 진심으로 질색하는 말투에 고시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들뜸에 무작정 앞서나가던 직전과 달리 지금은 걸음이 나란하다. 쿠니미는 힐끔 제 옆을 곁눈질한다. 저와 한 쌍의 동물 머리띠를 쓴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고시키가 있다. 정말이지, 애도 아니고. 일단은 제가 한 말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녀 주기는 하지만.


 “너 진짜 귀찮아.”

 “? 나 선배들에게 그런 말 많이 들었어.”


 도대체 얜 선배들에게 무슨 취급을 당하고 사는 거지. 줄곧 뚱해 있던 낯이 꿈틀거린다. 평소라면 저 말에도 상처라며 투덜거릴 텐데도 오늘은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가 보다. 고시키는 별 말 없이 웃으며 이쪽이야.” 아까 전 제일 먼저 탔던 후룸라이드를 지나 왼쪽으로 꺾는다.


 “하지만 아키라는 그런 귀찮음도 감수하고 나랑 사귀는 거잖아. 그만큼 내가 좋은 거지?”

 “…….”


 쿠니미는 순간 말을 잃고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시선이 마주치면 반짝거리는 눈이 어긋남 없이 직선이다. 그런 점도 좋아해. 상대는 제게 거한 폭탄을 던져놓고서도 뭐가 신나는지 키득거리며 웃는다. 저 근거 없는 자신감에 먹칠을 해주어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날이 더운 것 같은 착각까지 인다. 고시키 주제에. 보란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푸하하. 찔리지? 내가 제대로 맞췄지?

 “입 다물고 걷기나 해,”


 그리고 웃음소리에 날카롭게 일갈하다가, ‘.’ 그는 문득 떠올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자식, ‘감수하다라는 단어는 어떻게 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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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물을 받기 위해 덜덜거리는 컨테이너 벨트 위를 빤히 바라본다. 타인의 것들이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눈앞에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그곳에서 유일한 제 것을 찾기 위해 시각을 곤두세웠다. 24인치 남색의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의 캐리어. 색이 흔한 편이라 제 것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손잡이 부분에 언젠가 누군가 보내준, 다소 튀는 색의 천을 달았다. 몇 여행객들이 제 물건을 찾아 떠난다. 오이카와는 오 분 가량 후에야 저 멀리 컨테이너 밸트의 시작점에서부터 손잡이에 묶인 민트색 끄트머리를 볼 수 있었다. 가방의 형태 역시 눈에 익다. 틀림없이 제 것일 것이다. 코앞까지 밀려든 후에야 오이카와는 가방을 챙겼다.


 비시즌에 잠깐 휴식이라도 취할 요량으로 돌아온 일본이라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혹시라도 제 얼굴을 알아보면 어쩌나, 싶어 괜히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하고 입국장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눈에 띄여 구단 계약 해지니 혹은 뭐니 이상한 루머라도 떠도는 건 질색이었다. 공항 안에서 만날 사람도 없으니 선글라스 쯤이야 상관 없을 테다. 가족들에겐 제가 온다고 말은 했지만 미야기에 있어 예까지 오지는 못한다. 소식을 전하면서 부모님은 ‘집에 와서 보자’라고 말을 하기도 했고. 말고 유일하게 소식을 알려줄만한 이와이즈미는, 글쎄. 지금 일본으로 간다는 제 말에 라인으로 받은 마지막 답장을 상기한다. 어쩌라고. …. 음, 역시 오지 않겠지. 게다가 지금 시간이면 한참 일하고 있을 것이다.


 게이트를 입구서부터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렸다. 예상대로 게이트를 넘어선 순간 다소 서늘하고 텅 빈 안쪽과는 달리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다. 구분을 위해 끈으로 친 경계선 바로 너머에서는 전부 타국에서 돌아오는, 혹은 타국으로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온 인파였다. 저마다 사람들의 이름이 큼직하게 쓰인 플랜카드를 하나씩 들고 흔든다. 나카무라 상! 같이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일행을 발견한 한 여자가 급하게 캐리어를 끌고 달려간다. 가족인가 보다.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계속 걸었다.


 캐리어 바퀴가 매끄럽게 바닥과 마찰한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있느라 좀이 쑤셨다. 내내 잠을 자도 도리어 피곤만 쌓이는 듯하다. 괜히 손을 들어 올려 어깨를 주물 거렸다. 일단 기차를 타야하니까….


 어?


 순간 걷다 말고 흠칫 한다. 제 뒤를 따르던 사람이 급하게 방향을 틀어 오이카와의 옆으로 먼저 지나간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비쳤다. 뭐야. 몇 시에 도착하는 지도 알려준 적 없는데. 오이카와의 얼굴이 본능적으로 환하게 폈다. 캐리어의 바뀌 끄는 소리가 더 요란해지기 시작한다.


 “이와쨩!”


 커다란 외침에 줄곧 저를 바라보던 얼굴이 덤덤하게 말한다. 어, 왔냐. 라고. 아마 저가 게이트를 나설 적부터 보고 있었나 보다. 왜 연락을 안했어? 말하려다가 아직 제 핸드폰 유심이 이탈리아의 것임을 상기하곤 납득했다. 와이파이도 연결하지 않았으니 닿지 않았겠지. 입가에 절로 꽃이 돋았다. 근 일 년 만에 보는 얼굴이다. 흔한 플랜카드나 핸드폰 전광판 하나 들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마저 그다워서 반가웠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덥썩 껴안았다.


 “아, 징그럽게 안 떨어지냐.”

 “어떻게 왔어?”

 “뭘 어떻게 와. 온다며.”


 마중 나오라고 징징거린 주제에. 아니, 하지만 나 도착하는 시간도 알려준 적 없는걸. 이와이즈미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오이카와가 비행기에서 탄다며 징징거렸던 당시의 시간을 계산해 검색하면 그가 어느 항공사를 이용했는지, 몇 시에 몇 번 게이트로 나올 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시끄럽고, 짐은. 이게 다냐?”

 “응.”


 오이카와는 빙긋 웃으며 캐리어를 흔들었다. 그런데 이와쨩, 회사는 어쨌어? 오늘 출근 아니야? 하루 정도야 뭐. 와, 오이카와 씨 마중 나와 주려고 하루 뺀 거야? 출근 갈 걸 그랬다. 오이카와는 그리 말하곤 멋대로 걸음을 옮겨버리는 이와이즈미를 급히 뒤따랐다. 마중 나와 놓고선 먼저 가는 게 어디 있어! 알 게 뭐야. 마중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던가. 아니, 이건 마중이 아니지! 종알거리는 입이 분주하다. 이와이즈미는 코웃음 치곤 오이카와의 캐리어를 빼앗아 들었다. 


 "시끄럽고 이리 내."

 "엑. 이와쨩 들어주는 거야?"

 "비행기 타느라 피곤할 거 아냐."

 "이래뵈도 오이카와 씨 선수거든? 그것도 한참 물오른 선수거든?"

 "싫으면 네가 들던가."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금세 몸을 물리는 꼴이 우스웠다. 이와이즈미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웃기네. 알았으니까 그 선글라스나 벗어라. 자기가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아. 아, 오이카와는 그제야 머쓱하게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가운데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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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번 도시는 붕괴했다. 팔방에서 영혼이 절규한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던 어제보다는 적은 수였지만, 그래도 이 참사는 여전히 비극이었고 희생은 생명이었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또 한 번 자괴가 몰아쳤다. 죽음과 죽음과 죽음. 누군가를 얻고 다른 누군가를 대신하여 잃는다는 것. 그곳에 빛은 없다.


 “제발, 상쾌군. 아니, 스가.”


 남자가 울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저 잘난 맛에 살던 치가 무너지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한 번으로 족했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 네 부탁을 들어준 적 있었어. 당시를 복기한다. 2번대 대장 오이카와 토오루는 항상 하나 앞에서만 무너지곤 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아오바죠사이의 부대장. 그리고,


 ‘제발 부탁해. 이와쨩을 살려줘. 너는 가능하잖아.’


 스가와라 코우시의 시계는 타인이 지닌 것과 다소 다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시침을 왼쪽으로 열두 번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비록 한 번 능력을 사용하면, 하루 동안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긴 했지만 세간에서는 그 ‘한 번’을 기적이라 칭했다. 남자는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살았고, 감당하지 못했던 현실을 대신 품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호레이쇼의 희망으로 존재했다. 잘못했다간 악용되거나 본인의 신위가 위협당할 수 있었기에 호레이쇼에서도 각 번대 대장, 부대장급의 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발 살려줘. 아무래도 좋으니까, 내 능력이나 직위 따윈 상관없어. 제발 하지메만 살려줘.”


 남자는 오열했다. 2번대를 상징하는 어린 새싹의 빛이 핏물에 젖었다. 일본이 가진 두 개의 자랑 중 하나. 최강의 방어력을 가진, 그러나 활용력으로 인해 살상력마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호레이쇼 2번대 대장. 잘난 얼굴로 미디어의 노출이 가장 잦으며 연예인 못잖은 인기를 구사하는 환사, 오이카와 토오루.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명예도 힘도 걸레짝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 아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겠지만, 스가와라는 오래 전부터 알았다.


 “오이카와 씨가 무릎 꿇고 빌게. 부탁이야.”


 더 이상 이와쨩의 흔적이 없어…. 그의 부대장,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이번 레어티스와의 전투로 인해 사망했다. 자신의 대장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대장이 아닌 자신의 계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 자체를 위해서. 아마 스가와라는 짐작할 수 없는 위대한 감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본디 계약상태의 환수와 환사는 자기들만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어, 타인은 그들이 상호에게 가진 감정의 형태를 감히 단정하질 못했다. 지금 당장 오이카와 토오루가 제게 이와이즈미의 삶을 바라는 이유가, 곧 상실할 직위나 잃어버린 힘도 아닌 그저 끊어진 이와이즈미와의 유대 때문인 것처럼.


 ‘스가와라, 네가 내 유일한 희망이다. 부탁이야. 능력을 사용해줘. 어떻게든 오이카와를 살리고 싶다.’


 혹은 눈앞의 인간이 지금 제게 하는 구걸을 정확히 8시간 전에 이와이즈미가 똑같이 반복했던 것처럼.


 스가와라는 쓰게 웃었다. 이와이즈미도 저렇게 무릎을 꿇었다. 자신과 자신의 환수에게. 오이카와가 제가 원하는 것을 지키고 남자의 소중한 사람들이 그에게서 보호당하는 동안 자신은 누구도 지켜주지 않을 오이카와를 지키기로 했다고. 그런데 오이카와도, 오이카와의 소중한 것들도 전부 지키지 못했다고. 다시 한 번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애써 덤덤함을 가장하는 목소리 바닥에서 시뻘건 용암이 끓었다. 저 역시 친분있는 동료의 생명은 소중했고,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와이즈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번으로 겪는 현재에서 이와이즈미는 제게 부탁을 했다는 기억조차 잊은 주제에 오이카와를 지키고 소멸했다. 그랬다. 뼈도 가죽도 남기지 않고 쇳덩이로 만든 오래된 방패처럼 굳어졌다가 부서지고 그 잔해마저 어디론가 흩날려 떠났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죽음은 오직 환수만이 가진 특성이었다. 그리하여 이와이즈미의 죽음과 동시에 오이카와의 강력한 방어 능력은 무용이 되었더란다.


 “…미안, 오이카와.”


 스가와라는 불과 한나절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오이카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네 부탁, 들어주지 못할 것 같아. 떨어지지 않는 입은 억지로 벌려 말한다. 모든 환사가 그러했든 자신의 능력에도 제한이 있었다. 예컨대 오이카와가 바라는 일이 그랬다. 정말 미안. 한 번 더 속삭인다. 차마 이와이즈미가 너의 삶을 바랐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고드름처럼 떨어졌다. 뾰족하게 땅 위에 박히고 부서진다 바삭바삭.


 "왜 안 되는데. 내가 더 많이 살리기 위해 애쓸게. 전부, 이와쨩도,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살리겠다는데, 왜……."


 엉망으로 쏟아지는 원망을 전부 담았다.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오이카와가 시선을 마주쳤다. 짓무른 눈가를 보며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고요했으나 단호했다. 오이카와는 또다시 오열했다. 이 흐느낌마저 이와이즈미는 만족하며 기적이라고 칭하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희망과 절망은 비례한다. 그 스가와라 코우시는 호레이쇼의 모든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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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즈메 켄마는 판자촌의 입구에서 어른 걸음으로 오십칠걸음 안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자그마한 한 칸짜리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부모는 없다. 기억에도 없는 오래 전 쓰나미로 사망했다. 그의 가족이라곤 옆집에 살고 있는 소꿉친구, 쿠로오 테츠로와 가족 잃은 자신을 거두어 준 외할머니뿐이었다.


 “켄마.”


 어둑시니 드리워진 침상에서 쇳소리가 흘렀다. 켄마는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구석에 쭈그려 앉아 눈만 데굴 굴렀다. 창백한 낯과 자글하게 주름진 손이 참으로 가난하다. 힘이 없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어째서 당신은 줄곧 나를 향해 웃고 있는가. 아이는 그것이 서러웠다.


 “이리오련.”


 코끝이 찡해졌다. 차마 제대로 벌리지 못하고, 고작 오센치 허공에 뜬 팔이 비좁다. 그 안으로 파고들기에는 버거워요. 켄마는 일곱 살인걸요.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냉방조차 없는 바닥에 낀 투명한 서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죽음의 전조였다.


 판자촌 조금 벗어난 곳에 사는 늙은 의사가 말했다. 어쩔 수 없단다, 얘야. 네 할머니는 너무 오래 살았어. 이제 편히 쉴 준비를 할 뿐이란다. 가운 자락을 붙잡고 빌었다. 그래도, 그래도 방법이 없나요? 곁에 있던 쿠로오는 조용히 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켄마, 의사 선생님을 돌려보내자.


 소중한 우리 아가, 할머니는 켄마가 말도 제대로 않던 어린 시절에 선 것 마냥 다정하니 어루어 만졌다. 뺨을 쓰다듬는 손바닥에서는 고목 냄새가 났다. 아가는 어른스러우니까,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켄마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다. 아이에게 죽음이란 지나치게 먼 것이었다. 위로의 말도, 사과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늘 사랑한단다. 손이 추락했다. 그는 꼼짝 없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잠든 것 마냥 평안히 감은 눈, 희미하게 웃던 입매가 서서히 사그라든다. 저가 잠이 든 것 같았다. 켄마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할,”


 할머니. 말을 꺼내야 하는데, 말을 꺼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대낮임에도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작은 한 칸에서 버려진 소년은 입술만 벌벌 떨었다. 그녀의 얼굴과 그 영원할 고요를 응시한다. 가족의 얼굴이 희미한 빛에 따라 오색처럼 물들었다가 검어지길 반복했다.


 코즈메 켄마는, 한참이 지난 즈음에야 이상을 깨달았다. 빛이었다. 그녀의 흰 머리카락 안쪽에서부터 깜빡깜빡 점멸하길 반복하는 어떤 것. 금방이라도 꺼질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빛.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그 안락한 눈부심에 제 까만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금색으로 물들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윽고 베개 밑이 부스럭거리더니, 빛이 제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어린 제 손가락 하나 크기는 될까 말까한 크기의, 작은 무언가였다. 켄마는 눈만 깜박였다. 빛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곤 형체의 끄트머리에서 팔랑거리는 어떤 날개뿐이었다. 그는 반쯤 정신으로 제 가족을 데리러 온 천사인가, 생각했다. 그것이 입을 열었다.


 ‘아가.’


 제 할머니나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녀가 조금 더 건강할 적에나 부를 법한, 가쁜 숨 없이 올바른 다정으로. 켄마는 읽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진 무한한 사랑을. 방금 전 세상을 뜬 누군가를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켄마.”


 코즈메 켄마. 그래서 그는 헐덕이며 말했다. 어째서 무심코 내뱉은 이름이 할머니를 부르는 말이 아닌 제 이름이었는지. 어릴 적부터 똑똑하던 소년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인간도 짐승도 식물도 아닌 또 다른 신비로운 존재에 대하여.


 빛은 웃었다. 그 모습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때의 켄마는 그것이 웃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카리(明かり)야.’


 그녀가 말했다. 제 할머니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녀가 가지 않길 바란 제 기원(冀願)으로부터 탄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린 소년은 몹시 안심이 되었다. 결국 코즈메는 울음을 터트렸다.


 상실이 두려워 제대로 멍청하게 앉아 있던 자신을 가엾게 여겨 사랑하게 된 환수의 감정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눈물은 흐르지 않고 꿈처럼 뚝뚝 떨어지기만 했다. 할머니. 어린 소년은 이미 떠난 자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켄마는 자신의 능력을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은 아닐, 부드러운 고목줄기로부터 제가 사랑한 이의 기억이 단편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주마등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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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달 부스러진 조각들이 두 사람의 사이로 쏟아졌다. 미리 펼쳐놓은 신문지 위로 가라앉는다.


 “이와쨩, 정말 잘 해야 해? 오이카와 씨, 세이죠의 정세터라고.”

 “시끄러워.”


 이와이즈미는 짧게 말했다. 일부러 잔뜩 부담을 주려는 듯 늘어놓는 말에도 굴하고 않고 손톱줄을 만진다. 분명 큼직하고 단단한 남자의 손인데 내미는 자세만큼은 네일샵에 온 계집애 같다. 가지런히 보인 손등으로 잔상처가 드문드문 보인다. 오이카와의 오른손 중지에 삐죽 튀어나온 흰 부분이 그의 손길에 따라 짧아지기 시작한다. 한 팀을 책임지는 손이다. 오이카와는 왼 손으로 제 턱을 괴곤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으아, 역시 불안한데 말이지. 치이에게 맡길 걸 그랬나.”

 “나한테 해달라고 하루 종일 쫓아다니던 놈이 누군데 그래.”


 이와이즈미가 살풋 인상을 썼다. 오이카와의 말이 불만스러워서가 아니라 단순히 제 행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자장가처럼 슥슥 톱질 엇비슷한 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하지만 치이라면 매니큐어라도 바를 태세였는걸…. 오늘 치이쨩 손톱 봤어? 예뻤지.”

 “너 말고 누가 남의 여자친구 손톱 같은 데까지 보겠냐.”

 “하긴, 그도 그런가.”


 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오이카와는 대신 발끝을 까딱였다. 이와이즈미는 이제 오이카와의 약지를 다듬고 있었다. 이미 지나온 손가락을 바라보니 모양이 썩 괜찮아. 심각하게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딱 제가 늘 다듬어왔던 모양대로다. 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제 치이가 가져다 준 주먹밥 맛있었지?”

 “네 어머님이 가져다주신 거 아니었냐? 맛이 딱 그랬는데.”

 “아니야. 그런데 치이가 만들어주고 싶다기에 오이카와 씨가 엄마에게 부탁해서 레시피를 가져다주긴 했어.”


 아, 어쩐지 맛이 비슷하더라. 이와이즈미가 납득했다. 맛있었지? 오이카와는 발작적으로 한 번 더 캐물었다. 그래. 실제로 그는 지난 날 멸치볶음 들어간 주먹밥을 세 개나 해치웠다. 오이카와 씨도 치이라면 오래 사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이와이즈미는 한탄처럼 뱉었다.


 “엑. 이와쨩, 어째 날 불신한다?”

 “네 놈이 갈아치운 여자가 얼만데. 당연하지.”

 “이번에는 진짜야!”


 오이카와가 빽 외쳤다. 이와이즈미는 코웃음만 쳤다. 얼씨구, 네가 잘도. 와중에도 시소처럼 기울어지는 손톱줄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진짜라니까? 이번에는 천년만년 행복할 거거든.”

 “잘됐네.”

 “아오, 진짜.”


 이와쨩이 내가 얼마나 치이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래. 이틀 전에는 우리 키스도 했거든? 놀이터에서 말이야…. 시끄러워, 집중 안 돼. 이와이즈미는 손톱줄로 오이카와의 손등을 가볍게 때렸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른 오이카와는 울상을 지으며 그를 흘겼다. 지금 이와쨩, 세터의 손을 때린 거야? 어?


 “시끄럽고 빨리 왼손 내놔.”

 “벌써 다 했어?”

 “애초에 수시로 다듬는 손 굳이 더 손 댈 것도 없잖아.”


 빨리 하고 치워버리겠다는 의사가 만연하다.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면서도 제 오른손을 꼼꼼히 훑었다. 흠 잡을 곳이 없나, 했더니 과연 없다. 분명 이와쨩이라면 남의 손톱 다듬어 줄 일이 없을 리가 당연한데도. 어쩔 수 없이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고개를 내려 그의 엄지부터 다듬어갔다. 오이카와는 엄지를 굽혀 두 번째 손가락부터 시작되는 제 손톱 끝들을 한 번씩 매만져보았다. 부스러기 남은 손톱은 매끈했다.


 “이와쨩.”

 “그래.”

 “내일 치이가 연습 끝나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래.”

 “나 치이랑 같이 하교한다?”


 그러던가. 이와이즈미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오이카와가 아무리 그의 표정을 살펴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도 더 이상 말하기를 거부하고 그가 제 손톱 다듬는 모양만 빤히 응시했다.


 시옷으로 시작하는 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에 맴돈다. 오이카와의 손 아래 감추어진 열 개의 하얀 초승달은 이와이즈미에 의해 천천히 마모되고 있다. 그러나 흰 달은 아무리 갉아 먹혀도 결코 사라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감정이었으니까.


 손톱의 잔해들이 먼지처럼 오이카와의 거짓말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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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으로 가득한 도서관에서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밭게 울렸다. 이따금 숨소리, 혹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 혹시 모를 말소리는 서로 의식하며 최대한 죽인다. 중간고사 기간을 삼일 앞둔 대학의 중앙도서관은 낮부터 사람이 가득하다.


 오이카와 역시 그곳에 속한 일인이었다. 과가 사체과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이론 과목도 있기 마련이다. 교양 역시 마찬가지고. 대학에 들어온 후 첫 시험기간, 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충분한 의욕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는 호기롭게 중간고사보다 내일 있을 발표가 더 중요하다는 이와이즈미를 억지로 끌고 도서관 한 쪽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수업에 집중할 때나, 고등학교 시절 시험기간에나 쓰고 다닌 안경도 간만에 다시 꺼냈다. 하지만 그런 포부가 무색하게 지금 오이카와가 쥐고 있는 서머리는 이십 분 즈음 전부터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와쨩.”

 “시끄러워.”


 아무 말도 안했는데! 네 놈이 할 말이라곤 뻔하잖아.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 잔뜩 낮춘 목소리는 휘파람보다 나직하다. 오이카와는 어이없음에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냉큼 고개를 내렸다.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라는 이름의 사뭇 흥미로워 보이던 교양은 사실 무자비한 언론정보과의 교수가 지배하는 폭정의 과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선배들이 ‘이해’라는 단어가 붙는 모든 교양은 신청하는 게 아니랬지. 매체가 시사하는 바에 대해 두어 줄 읽던 그는 다시 힐끔 제 맞은편을 곁눈질한다.


 당연하게도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발표 대본을 외는지, 혹은 중간고사 공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인상을 쓰며 버럭 외쳤던 것이 무색하게 열렬하게 종이만 응시한다. 나보다 까만 필기로 가득한 종이가 더 좋은 거냐고, 질투어린 말조차 내뱉질 못한다. 이와이즈미의 콧등에 얹힌 안경이 오이카와의 오리 주둥이를 쑥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오이카와가 안경을 쓴 이와이즈미의 모습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가 안경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설마 경영학과라서 상경계열 티라도 내보려고 그러는 걸까? 라기에 정작 이와이즈미의 패션센스는 여전히 상경대생이라기 보다 공대생이라는 단어에 어울려서 대학데뷔냐는 시시한 놀림조차 꺼내지 못했다. 차라리 어울리지도 않는다면 멋대로 벗겨버리는 둥 장난이나 칠 텐데….


 오이카와의 뜨거운 시선을 감지한 이와이즈미가 눈을 힐끔 올렸다. 히익. 오이카와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뒤로 뺀다. 이와이즈미의 입이 무심하게 뻐끔거린다. 왜. 간단한 말이라 이해하기 용이했다. 아, 아니 그게. 오이카와는 무어라 말 하려다 이곳이 도서관임을 상기한다. 어쩔 수 없이 빈 공책을 꺼내 한 켠에 급하게 글씨를 써내려간다. 앞으로 내민다.


 ‘이와쨩, 그 안경 언제 산 거야???’


 그 문장을 눈으로 훑어 내린 이와이즈미가 허? 한숨을 내쉬었다. 저가 도서관에 멋대로 사람을 끌고 와선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있기에 뭔가 했더니, 고작 이런 거 때문이었나. 이와이즈미는 샤프 끄트머리로 공책을 툭툭 건들이다가 써내렸다.


 ‘개강하고 얼마 안 지나서. 강의실이 커서 그런지 중간에만 앉아도 글씨가 잘 안보이기에 그냥 하나 장만했다. 됐냐? 이제 공부해.’

 ‘왜 오이카와 씨에겐 말 안 해줬어? 너무해!(*´Д`*)’


 시끄러워. 이와이즈미는 여기까지 적어내리다 말고 순간 왜 제가 일분일초가 중요한 시간에 오이카와 녀석과 어울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여 종이를 제 소꿉친구에게 건네는 대신 그냥 제 가방 안에 둥글게 구겨서 쑤셔 박았다. 바로 눈앞에 있던 이가 그 광경을 목도하곤 입을 쩍 벌린다.


 오이카와는 급하게 종이를 찢어 글씨를 썼다. 쪽지처럼 예쁘게 접어 이와이즈미가 들고 있던 필기를 가리게끔 던진다. 세터답게 토스는 훌륭했다.


 ‘이와쨩, 내 마음을 그렇게 구기면 어떡해!’


 무언가 싶어 바라보던 이와이즈미가 그 문장에 재차 단호하게 쪽지를 밀어낸다. 오이카와가 새 종이를 보낸다. 무시하지 마! 당연히 무시한다. 버리지 말라니까? 라고 말하기에 버렸다. 이와쨔아앙. 이와이즈미는 기어코 쪽지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여태까지 받은 모든 종이들을 한데 구겨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스파이크를 날렸다.


 “악!”


 단발의 비명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 오이카와에게로 향한다. 잔뜩 울상을 지은 채 항변하려다 학생들의 눈총에 꼬리를 말고 몸을 늘어뜨린다. 진짜 너무해. 입을 삐죽거리며 이와이즈미를 노려봐도 그는 묵묵부답으로 대본을 훑는다. 사랑이 식었어. 오이카와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제 필기를 바라보았다. 내가 필요한 건 매체를 통한 다중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사람과 사람간의, 아니 이와쨩과의 커뮤니케이션인데. 괜히 그 페이지를 다 읽은 척 다른 장으로 종이를 넘기고, 습관으로 이와이즈미를 힐끔 쳐다본다. 렌즈 너머로 비치는 얼굴 윤곽이 반쯤 어그러진다. 진짜.


 체육만 잘할 것 같은 못생긴 얼굴로 안경이라니, 정말 반칙이잖아. 오이카와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하염없이 그 얼굴을 응시했다. 외우기가 힘든지 드러난 미간에 주름이 진다. 무감한 눈동자가 제가 아닌 다른 곳을 투사한다. 이와이즈미가 좀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거슬려 다시 눈을 치켜들 기색이면, 그는 황급히 안경을 벗어 가방을 뒤적거렸다. 제 셔츠의 무늬가 보일 만큼 고개를 푹 숙이고, 이미 반질거리는 렌즈임에도 불구하고 광이 날 만큼 안경닦이로 반 무테안경을 문지른다.


 말도 안 돼.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나에게 안경 패티쉬가 있었던가? 아닌데. 그럼 분명 내 안경이 잘못되었겠지. 끊임없이 합리화한다. 그도 그럴게,


 이와쨩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다니, 이건 정말로 정신 나간 생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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