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후로 보답을 하겠다는 남자의 막무가내에 따라 사보는 오색 빛무리에 끼어들었다. 본인은 보답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사내는 저 좋을 대로 돌아다니기 바쁜 것 같았다. 지나가다가도 음식만 보면 달려가서 입 안에 한가득 쑤셔 넣기 일쑤였다. 아, 이 녀석이겠구나. 아까 제가 지나갈 적에 벌써 재료가 동이 났다던 닭꼬치집의 범인이 누군지 절로 짐작 가능할 정도였다.
“어이, 이거 맛있어.”
남자가 해수고기 다섯 개를 내밀었다. 그래도 열 개 주문해서 하나만 나눠주지는 않네. 사보는 그 부분을 높이 평가하며 한꺼번에 세 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역시 먹는 양으로는 지지 않았다. 덕분에 전투적으로 배를 채운 두 사람이 여유를 가진 것은 마지막 후식으로 산 파일애플 꼬치를 하나씩 손에 쥘 즈음이었다.
“으아, 잘 먹었다!”
“그러게. 덕분에 포식했어.”
사실 종반부에 이르러서는 에이스가 돈이 없어 사보가 대신 냈지만, 둘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볼록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주근깨 사내가 파인애플을 한 입 먹는다.
“이런 마을 축제는 처음인데, 꽤 괜찮네. 분위기도 신기하고.”
“아아. 나쁘진 않아.”
사보가 동의했다. 시야 너머에서는 아이들이 종이 뜰채로 금붕어를 잡고 있었고, 바로 옆에서는 몇 사내 녀석들이 사격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체격에 맞지 않게 귀여운 분홍색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있던 남자 한 명이 에이스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선자앙! 이것 보슈!”
“푸하하하, 뭐야. 톰! 갑자기 웬 토끼냐!”
내가 딴 거유! 앞으로 얜 나랑 잘 테니까, 건들지 마쇼!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했다. 사보는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트리는 사내를 웃는 낯으로 응시했다. 역시 해적인 듯하다. 그것도 선장. 아까 전 당했던 놈이 현상금 사냥꾼이었겠군.
“선장도 한 번 해 보는 게 어때? 이거 의외로 재미있다고. 잘 넘어가지도 않고.”
“그래봤자 먹지도 못하잖아.”
“아, 이 놈의 선장은 뭐든 음식으로 치환 못해서 탈이야.”
동료들과 함께 있던 스페이드 선원 한 명이 다가왔다. 해적단의 간부기도 한 듀스였다. 그는 낄낄 웃으며 간이 사격장 쪽을 턱짓했다. 저거, 백발백중하면 가장 큰 인형도 주지만, 대신에 웨스트블루 산 술 한 통과도 교환 가능하다더라고. 아까 전에 우리 저격수는 다섯 통이나 들고 갔어. 지금쯤이면 갑판에서 다 같이 술판 벌이고 있을 걸?
술판이라는 단어가 에이스의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그럼 저기서 다섯 통 더 들고 가면 내가 영웅이 되는 건가? 아서라, 총도 제대로 못 쏘면서. 시끄러워, 두고 보라고. 남자는 제 동료들 사이를 비집고 사격판을 향해 척척 다가갔다. 사보는 그의 뒷모습 멀뚱하게 보다가 따랐다.
“아저씨! 나 한 판 할래!”
“오오!”
함성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러웠다. 경계 없이 마냥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조금은 낯설다. 그는 웃는 낯으로 한쪽에 몸을 피해준 간이상점의 주인장 곁에 몸을 약간 기대고 섰다. 한 가운데에 선 사내는 상체를 굽히고 신중한 낯으로 총을 겨눈 채였다. 꽤 어설픈 포즈다. 사보는 속으로 단정했다. 저 자는 사격에 있어서는 초심자다.
“으악!”
보라. 첫 발이 훌륭하게 빗나갔지 않은가. 탕, 하는 커다란 소리와 반동에 깜짝 놀라는 청년을 보여 모든 구경꾼들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공교롭게도 그 웃음이 그를 자극했다. 분한 얼굴로 다시 총을 잡는다. 사보는 남자가 쏜 총이 전부 과녁을 빗나가는 모양을 지켜보며 힐끗 주인장을 곁눈질한다. 제 손님들이 해적임을 아는 데에도, 돈이 되기 때문인지 해적들이 선한 인상이기 때문인지 경계 없이 웃고 있다.
“이렇게 성대하게 축제를 열고, 인형까지도 저렇게 가져다놓는 걸 보면 이 섬에는 상선이 자주 다니나 봐?”
“응? 아아, 그렇지.”
갑작스런 질문에도 주인은 선선히 대답했다. 에잇, 한 판 더! 저 앞에서 남자의 외침이 우렁차다.
“축제가 아닐 때에도 그러는 걸 보면, 혹 섬에 특별히 유명한 음식이라도 있는 거야?”
“특산품은 없지만, 경로상 꾸준히 이 섬 해역을 지나야하는 상선이 있거든. 잘못해서 배 하나가 침몰하면 큰 피해를 입게 되니까, 상사(商社)의 사람들이 꾸준히 이 섬에 들려 제를 지내지. 그들도 해신을 믿거든. 덕분에 상선이 자주 드나드는 거야. 가끔 물자도 지원해주고. 우리에게는 고마운 일이지.”
“헤에, 그렇구나.”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조하던 사보가 입매를 빙그레 올렸다. 이거로군.
“혹시 상사의 이름이 뭔지 알아?”
“모를 수가 없지! ‘심층해류’ 우미트가 운영하는 곳인걸.”
“아, 땡큐.”
해운왕인가. 그는 겉으로는 반듯한 해운업을 하지만 뒤쪽으로는 불법적인 물건들을 옮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름대로 어둠의 세계의 제왕 축에 끼는 사람이니까. 우미트가 이곳에서 경로를 세탁하나 보군. 이걸로 대부분의 퍼즐은 맞춰졌다. 사보는 손가락을 끝을 두드렸다. 코알라와 핵에게 연락할 일만 남았군.
“으아! 한 판 더다!”
“푸하하. 선장, 안된다니까? 포기하자! 주먹이면 또 몰라!”
“게다가 지금 내는 돈들도 전부 내 돈이라고!”
이번이 마지막이야!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단 한 발도 맞추지 못한 사내는 급기야 씩씩거리며 제 셔츠를 벗어젖혔다. 잘 짜인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오오! 같은 선원들의 장난스러운 함성 소리가 윙윙 울려 퍼진다. 시선의 끝에는 장난기 모조리 버린 채 심호흡하며 총구 겨누는, 제 또래의 남자가 있다.
문신이 있었네. 사보는 단정한 글자의 나열을 읽어 내렸다. ASCE. 아스세? 아니, S 위에는 엑스 표지가 드려져 있는데. 잘못 쓴 건가? 하지만 문신을 잘못 새겼다면 그냥 지우면 되잖은가. 굳이 위에 엑스 자를 덧그릴 필요 없을 텐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문신은 도안을 몇 번이고 확인한 이후에 새기므로 부러 저리했을 확률이 크다. 무슨 거창한 의미라도 있는 걸까. 세간에 떠도는 모양을 뒤적이지만 어떤 약자나 상징도 저것과 같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악! 아슬아슬했는데!”
탕. 소리가 울렸으나 이번에도 썩 좋은 결과는 낳지 못했다. 총을 놓고 양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는 행동에 팔방에서 와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사보도 짧게 어깨를 들썩였다. 해적이라기보다 승부욕 넘치는 소년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가 이제껏 만난 해적 중 첫손에 꼽힐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남자는 남은 3번의 기회를 신중하게 소진했다. 두 번은 빗나갔으나, 그의 노력이 빛을 냈는지 운이 좋았는지 마지막은 다행스럽게도 인형 하나를 맞추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으니 전자로 인식해도 될 것 같다. 사내는 신사 모자를 쓴 파란 곰 인형이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우왁!” 소리를 지르며 제 동료를 얼싸안았다.
“선장! 최고에요! 우와!”
“크하하하, 곰 인형을 누구 코에 가져다 붙이려고 그래요?”
“내버려 둬! 선장도 밤에 끌어안고 같이 자려나 보지!”
“아, 선장. 그건 못 먹는 거요!”
우습게도 마지막으로 외친, 톰이라는 해적의 말에 들뜬 낯으로 주인에게서 인형을 받아들던 에이스의 표정이 곧장 굳었다. 그의 눈이 어색하게 주인에게로 향했다.
“아. 이건 술로 못 바꾸는 거야?”
“못 바꾸네.”
주인장이 씩 웃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조그마한 술 한 병은? 안 되네. 그럼 혹시 고기라도, 무리야. 재차 이어지는 확답에 인형을 든 남자의 어깨가 시무룩하니 내려앉는다. 제 선장이 우울해지는 게 어찌나 즐거운지, 주위의 선원들은 낄낄 웃음 터트리기 바쁘다. 그러게 누가 해본 적도 없는 사격에 도전하랬수? 위대한 항로-비록 낙원이라 해도-을 누비는 해적단 치고는 상당히 내부에 위계질서가 느슨한 편인 듯 보였다. 사보는 여전히 조금 떨어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낄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고, 저 역시 곧 일을 하러 가봐야 했으니까. 물끄러미 관조하던 시선이 돌연 낯선 것과 맞부딪친다. 눈이 둥글게 뜨인다.
“아, 잘됐네! 어이! 이거 가져, 선물이야!”
“나보고 지금 이런 인형을 가지라고?”
“뭐 어때. 들었겠지만, 이래봬도 내가 무려 해적단의 선장이거든? 그런데 이런 귀여운 인형 같은 걸 선실에 두고 다니면 선장으로서의 위엄이 서겠냐고. 먹을 것도 아니고, 뭐. 네가 가져.”
에이스가 씩 웃으며 저를 향해 곰 인형을 냉큼 던졌다. 둥글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자, 사보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다. 그는 떨떠름한 낯으로 인형을 둘러보았다. 혁명군 참모총장이 가지고 있기에도 지나치게 귀여운 물건인데. 더군다나 저건 어딜 보아도 귀찮아서 제게 떠넘기는 모양새다. 거절을 말하기 위해 고개를 올리려는 찰나,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사보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오늘 즐거웠어! 고기도 맛있었고! 난 이만 이 녀석들이랑 돌아가 볼게. 같이 가서 술 마시자고 성화네.”
“나 같은 사내놈이 가지기에도 인형이 지나치게 귀엽단 생각은 안 드나보지?”
“뭐 어때. 똑같이 귀엽잖아. 나 인형 따는 거 구경한 값이라고 쳐.”
솔직히 지금 내가 저런 걸 가지고 있는 것도 우습고 말이야. 분명 나중에 만나면 욕할걸. 손을 흔든 사내가 금세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멀리 나아진다. 사보는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한 번 인형을 보았다. 단순히 인형이 파랗다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이 봉제 곰은 까만색 실크 해트를 쓰고 있는 것도 모자라 겉에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잠깐만, 저는 분명 유카타를 입고 있었는데. 혹시 이미 제 정체를 알고 있었나? 분명 늘 입던 복장이 곰 인형이 입은 것과 비슷했다. 이름조차 한 번도 부르지 않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선장, 곰 인형을 줬던 놈은 누구요? 처음 보는데.”
“응? 나도 이름 모르는데.”
“예에?”
“선장은 이름도 모르는 사내자식에게 인형을 준답니까? 뭐, 고백이라도 했수?”
“저녁에 같이 다녔거든. 어쩌다 보니…. 뭐, 하지만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네.”
멀리서 어슴푸레한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잔뜩 패기까지 곤두세우던 사보의 기세가 금세 사그라진다. 그냥 제게 주었나 보다. 깜짝 놀랐네. 이미 받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사보는 수긍하고는 해적이 걸었던 방향과 정반대편으로 걸어간다. 코알라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함이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가던 차에 안쪽에 넣어둔 애기전보벌레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보는 곰인형을 제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 “나야.” 수화기를 얼굴에 붙였다.
“사보, 큰일이네. 꽤 성가신 인물이 섬에 상륙한 것 같은데. 일이 잘못하면 수틀릴지도 모르겠어.”
핵이었다.
“성가신 인물? 해군 대장이라도 왔대?”
“거기까지는 아니지만….”
“그럼 사황?”
“그건 아니고….”
“아니면 상관없잖아.”
“윽, 말 좀 듣게! 불주먹 에이스를 모르나? 샤봉디까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현상금 2억을 넘기는 해적이라네.”
“불주먹 에이스?”
불빛 드문 골목의 한 가운데에서 사보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깐 앞뒤로 고개를 돌려 인적이 느껴지는지 확인했다. 인기척은 없다. 그래. 수화기 너머로 핵이 고개를 주억이는 듯 했다. 그러나 사보의 대답은 냉담했다.
“그게 누군데?”
“뭐? 사보, 정녕 스페이드 해적단을 모르는가? 최근 바다에서 대형 루키라고 명성이 자자하다고. 혁명군 내부에서도 몇 번 이름이 올랐던 걸로 알건만.”
“그런 거 몰라.”
“부디 관심 없는 이야기는 금세 잊어버리는 버릇 좀 고침이 어떤가?”
“어쨌든 이 섬에 해적들도 현상금 사냥꾼도 상당한 건 사실인 것 같아. 나도 해적들을 만났거든. 그리고 좋은 사실도 알아냈어. 아마도 우미트가 여기서 한 번 경로 세탁을 거치는 것 같아.”
“오, 우미트가 말인가?”
“방법도 대충 짐작이 가. 그렇다면 따로 무기들을 숨길 은신처는 없을 거야. 코알라 쪽으로 합류해. 나도 그쪽으로 갈게.”
“하지만 사보, 여기서 수상한,”
뚝. 혁명군 참모총장이 전보벌레를 끊었다. 그리고 핵에게 말했던 대로 코알라가 있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뭐, 핵이야 불주먹이니 스페이드니 하는 해적을 거론했으나 큰 상관은 없을 테다. 코알라나 핵이 겨우 신생 해적단에게 당할 정도로 못 미덥지는 않으니까. 그냥 스친다면 좋고, 만약 그들이 우미트와 연관되어 있다면 쳐부수면 그만이다. 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걸음 옮기는 사보의 왼쪽으로 아릿하게 아쉬움이 스치운다.
불주먹이니 뭐니 하는 이름은 관심 없지만, 제게 인형을 쥐어준 녀석의 이름은 알아둬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이유 없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