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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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가 와서 택배가 도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관리실에 정말 아무 것도 안 왔어요?” 되물은 후에야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문 입구 역시 깨끗했다.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 돌리는데, 반쯤 들어 올린 오른팔 사이로 찬 공기가 들어찼다. 옆구리가 공백이다.


그의 집은 혼자서 살기에는 상당히 널찍했다. 커다란 텔레비전과 커다란 사내 녀석이 완전히 누워있어도 모자라지 않는 길이의 소파, 부엌 식탁에 의자는 두 개고 하나 있는 침실은 킹사이즈다. 신발을 벗고 신발장을 열면, 정확하게 오른쪽 절반은 텅 비어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쓰게 웃으며 먼지 냄새 내려앉은 집에 발자욱을 남긴다.


어느 겨울,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두고 떠났다. 그의 이름은 일()자를 써서 하지메. 오이카와 토오루의 반쪽이 아닌 온전한 한쪽이라, 그가 없는 현재 자신은 영이 되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정확히 함께 살던 집의 절반을 갈라서 떠났다. 오이카와는 아직도 그가 왜 떠나야만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내가 싫었던 걸까. 어느 날 말도 없이 모습 감출 정도로. 네가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든 고칠 자신 있었는데.


이후로 사내에게는 매일 우편함과 택배 보관함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라도 그가 제게 무슨 말을 남길까봐. 네가 썼던 물건 다시 가지고 돌아 올까봐. 일분일초 기대를 품었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들숨과 날숨의 박자와 동일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의 파란 칫솔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씻은 후 그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바디워시로 샤워를 했다. 집의 어딘가에서 이와이즈미의 향이 났으나 이와이즈미는 이곳에 없다.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 매번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나 많이 잘못한 거야? 오랜 소꿉친구는 제가 투정부리고 신경질을 내도 앞에서 화를 내고 잔소리를 했지, 결코 이런 식으로 떠난 적은 없다. 꾸준히 옆에 있어주었기에 그는 오이카와 전체의 일이 될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단 말이야.


여전히 택배는 오지 않았다. 우편함을 열면 고지서 한 장 뿐이다. 오이카와는 의미 없는 껍데기만 남은 채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 전 자신을 매정하게 버린 사람을. ()만 남긴 채 떠난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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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하루, 감독 우시지마는 차분하게 학생들의 실력을 지켜보았다. 큼직한 체구에 위명까지 더해져 압박을 느낄 법 한데도, 학생들은 피하기는커녕 새로운 감독에게 달려들었다. 미야비는 이러한 풍경에 팬미팅라는 단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우시지마는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었다. 아이들을 싫어하고 냉정한 인상인 줄로 알았는데. 가끔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그가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했다. 미야비 역시 앞으로의 1년을 기대하며 3학년 첫 부활동을 끝냈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다 떨어졌던 계란을 사고, 할인 중인 품목 몇 개를 사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습관인 인사는 허공만 한 바퀴 머물다 돌아온다. 깜깜한 집 안은 누구도 오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익숙한 일이라, 그녀는 능숙하게 불을 켜고 짐을 놓은 후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밥솥의 뚜껑을 열 때다. 미야비의 예상을 깨고 현관의 문이 덜컹 열렸다.


?”

? 미야비쨩, 언제 온 거야?”


누가 할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떨떠름한 낯으로 제 핏줄을 마중했다.


그러는 토오루야 말로 언제 온 거야?”

아까 저녁에.”


냉장고가 비어있어서 방금 밖에서 사 먹고 왔어. 한 사내가 그리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제 자식 내버려두고 홀로 끼니를 때웠다는 말은 지나치게 매정했으나 고작 저런 사소한 문장으로 서운해지기엔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랜 세월을 보냈다. 애초에 미야비 역시 그가 오늘 집에 도착한 줄도 몰랐으니 셈을 따지면 피장파장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마저 제 몫의 식사를 차렸다.


이제 먹는 거야?”

부활동하고 왔으니까.”

. 벌써 개학할 때가 됐나?”

지난주에 했어.”


미간을 잠깐 찌푸리던 남자는, 이내 경쾌한 어조로 시간 빠르네.” 덧붙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무정은 도처에 있었다. 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일별한 미야비는 덧붙이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몇 분 간 식탁 위 정갈한 찬을 보던 남자가 물었다.


혹시 이와쨩이 다녀갔어?”

, 어제. 주말이라서 아빠가 밥 사줬거든.”

아깝다! 하루만 더 빨리 올 걸. 그럼 오이카와 씨도 이와쨩에게 밥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밥을 얻어먹기 전에 토오루 얼굴에 멍이 들지 않을까.”


너무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여전히 발랄하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말투도 행동도 심지어 얼굴도 30대 중반처럼 보이지 않는다. 잘생긴 얼굴은 본인이 신경 써서 관리하는 탓에 끽해야 20대의 외관이다. 누구도 이 사람이 제 부모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미야비의 가장 가까운 혈연의 이름이다. 정작 미야비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가 아닌 그의 오랜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남자지만,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미야비의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닌 이와이즈미 하지메니까.


오늘도 그렇다. 하나 뿐인 딸의 개학 날짜도 모르고 저녁 9시가 넘어갈 때까지 그녀가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 데도 걱정의 말 한 마디 없다. 직업상 자주 출장을 가는 치이라 일주일 만에 얼굴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야비는 전부 알았다. 그가 자신과 오래 있는 것을 못견뎌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직업을 골랐다는 것을. 어릴 적에는 자주 상처받았고, 아빠의 품에 안겨 울기도 했지만 이제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안다. 전부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하나 뿐인 가족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새학기면 반도 바뀐 거야? 친구는 사귀었어?”

새 친구는 모르겠지만, 같은 부의 친구가 있어서 괜찮아.”

미야비 부활동이, 저번에 들었던 그건가?”

.”


이와이즈미 이모가 만들어준 소고기감자조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엌 전등만 켜둔 탓인지 토오루의 뒤가 어두컴컴하게 보였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짧게 침묵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옅은 쓴웃음이 입술 아래 그림자를 만든다.


미야비쨩도 가만히 보면 되게 배구 좋아한단 말이야.”

누구 닮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게.”


대체 누굴 닮은 걸까. 오이카와가 한숨 쉬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미야비는 의아하여 눈만 한 번 깜박였다. 왜 제 젓가락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 경우에는 젓가락을 든 손이 문제인가. 그녀는 제 말이 토오루의 어딘가를 자극했음을 인정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에도 제대로 잠 못 든 채 술이나 퍼겠지. 미안. 가볍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들던 차였다. 오이카와가 먼저 여상스러운 체 하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조심해. 그래도 남자는 다 늑대들이고, 미야비쨩은 날 닮아 엄청 예쁘니까.”

모욕적이야.”

뭐어?”

토오루보다는 아빠를 닮고 싶었는데.”

아니, 그거 우선 유전적으로 무리잖아.”


그리고 이와쨩은 못생겨서 안 돼. 왜 토오루 주제에 우리 아빠를 욕하는 거야? 미야비쨩 정말 누구 딸이야? 아빠 딸. 그거 내가 아니라 이와쨩 말하는 거지? 너무해!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끝냈다. 미야비는 설거지를 하고, 어쩐 일로 제가 빨래를 하겠다는 토오루에게 기꺼이 제 몫의 빨래더미를 넘겼다. 텔레비전을 켜지 않아 두 사람의 말소리를 제하면 집은 조용했다. 불은 켜져 있지만 빛에 온기는 없다.


침실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때때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답장하며 베란다를 응시했다. 세탁기 옆에서 오이카와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자가 아주 오랜 어느 날을 회상하고 있음을 알았다. 저 하늘 위를 수놓은 별들처럼, 아마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마냥 반짝이고 찬란할 것만 같던 청춘의 어드매를. 자신이 망가뜨린 꿈을.


배구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늘 저런 모습이었다. 배우 마냥 유연하게 움직이던 얼굴 근육도 일시에 방향을 잃곤 했다늘 손끝에 아슬아슬하니 걸리던 날을 그리워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도리 없이 배구와 오이카와 미야비의 태생에서만 솔직했다. 내가 배구를 좋아하는 게 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야비?"


살짝 열린 베란다 문 너머로 오이카와가 말을 건넸다. 담배 냄새가 난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자. 나도 빨래 널 줄 아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오루 기다린 적은 없지만. 정말 매정하네. 갈수록 이와쨩만 닮아가. 유전적으로 무리라며? 나한테 이러는 부분이 말이야. 그건 토오루가 토오루니까 어쩔 수 없잖아. 누구도 진심 없는 우스갯소리로 균열을 덮는다. 오늘 밤,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미야비는 조용히 침실로 들어갔다. 자신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오히려 그를 괴롭게 할 테니까. 내가 그에게서 배구를 빼앗았으니까.


오이카와 미야비(及川 雅).

나는 토오루의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 태어난 사람이다.










1.

2 체육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새학기가 시작된 후 처음 가는 부활동이었다. 그거 알아? 1월에 이노우에 감독님 은퇴하셨잖아. 바로 옆에서 은근히 운을 떼어오는 것에 그랬지, 하고 여상하게 대꾸했다. 저도 그도 모를 리가 없다. 그 탓에 현민대회가 있었던 3월까지는 오로지 고문 선생님과 코치, 그리고 주장 선배의 의논 아래 프로그램을 짜지 않았었나. 전 감독이 지휘하던 당시의 연습 내용을 상당 부분 땄지만 그래도 꽤 어설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새로운 감독님 오신대. 굉장히 유명한가봐. 고문 선생님이 진짜 기뻐하시더라.”


토라가 씩 웃으며 말했다. 코우센의 배구부의 주전 선수인 그는 감독의 부재에 가장 크게 실감하고 있는 이 중 하나였다. 코치님이 애쓴 보람이 있나봐. 감독님의 은퇴가 확정될 무렵부터 자신이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배구부 감독을 수소문하고 다녔던 나가마츠 코치를 떠올렸다.


그럼 올해에도 전국 우승을 목표로 삼아야 겠네.”

당연하지! 이번에는 이타치야마도 꺾어버릴 테니까!”


조금 들떴. 지난 번 인터미들에서 중등배구 유구한 강자인 이타치야마에게 패배해 2회전에서 떨어진 것은 시합에 나가지 않는 저에게도 상당히 아쉬웠던 일이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부실동으로 향하는 토라와 갈라지고, 먼저 체육관에 들어섰다. 한 달 만에 신는 배구화다. 삐걱이는 코트의 마찰음이 반갑다. 오이카와 선배! 고작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라도 반가운지, 코트를 정비하고 있던 사내 녀석들이 우루루 몰려온다. 저는 마냥 익숙하지만 남이 본다면 돈이라도 뜯어내려 하는 줄 알 것이다.


방학 잘 보냈어?”

그냥 그랬지.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신입 부원들이랑 인사 정도만 하고 빨리 끝날 것 같은데.”


그럼 드링크는 생략할까? 스코어보드는? 으음. 스코어보드는 부탁할게. 연습게임이라도 할 셈인가보다. 오이카와는 지나친 환대를 흘리듯 받으며 서둘러 체육관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코어보드와 함께 개인적으로 일일이 득점을 기입해두는 공책을 함께 꺼내 체육관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못 보던 얼굴도 더러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어수룩한 행동, 혹은 긴장으로 빳빳한 몸이 누가 봐도 신입생인 것이 티가 났다. 나도 작년에는 저랬을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훑곤 의자도 꺼내둔다. 곧 고문 선생님과 코치가 올 것이다. 시계를 한 번 보고 체육관 정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때마침 토라가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대박 소식!”


일동 시선이 그에게 몰린다. 이제 자신이 누군가의 선배가 된다는 자각은 있는 걸까? 한숨이 푹 나온다. 옷 갈아입으러 간다더니 왜 저렇게 달려오는 거야. , 라고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언젠가 핀치에 몰려 의기소침해진 팀의 사기를 끌어올릴 적의 그 성량으로 토라가 쩌렁쩌렁 외쳤다.


이번에 새로 온다는 우리 감독, 우시와카야!”


그대로 입술이 짜부라든다. 눈이 홉 뜨였다. 설마 그 우시와카요? 거짓말! 진짜야! 내가 직접 뒷모습 봤다니까! 고작 뒷모습이잖아! 순식간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정식 입부하게 된 신입생들을 놀릴 생각에 묵직한 척 하고 있던 3학년들은 물론이고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신입생들 가릴 것 없이 흥분과 불신으로 말문을 텄다.


우시와카라는 이름의 파급력이 그러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불과 대학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된 배구 선수. 대학을 졸업하고선 파르마에 입단하여 이탈리아에서 귀화를 권유할 정도로 활약한 그는 일본 배구계에서는 역대 최고의 윙스파이커라 한다면 단연 한 손 안에 드는 우수한 선수였다. 얼마 전에 선수 은퇴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다른 구단의 감독도 아니고 고작 미야기 소재의 중학교 감독이라니. 대체 뭐가 부족해서? 센다이가 그의 고향이라고 하니, 본가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던 걸까? 그 전에 나가마츠 코치님은 도대체 무슨 인맥을 동원했기에 그 우시와카를 감독으로 데려온 걸까. 어쩐지 얼떨떨했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설렘 탓이겠지.


왜 그렇게 떨떠름한 반응이야, 미야비. 너 우시와카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그랬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아했다. 어릴 적에. 그런데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 괴상하리만치 그 남자를 싫어했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친한 이는 왜 저가 아니라 그런 놈을 응원하냐며 서운한 기색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우시지마 선수의, 다른 코트의 선수들을 죄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이 놀랍고도 좋다고 말했을 때에는 그마저 잠시간 얼굴을 굳혔더란다. 그 때의 침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모든 유기된 것들이 숨을 죽이고 서리를 맞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 분위기가 두렵기보다 서러웠다. 그래서 팬을 자청하기를 포기했다. 소학교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받아보는 배구 잡지에는 그의 소식이 꼭 한 면쯤 실려 있어 오이카와 미야비는 어쩔 수 없이 우시지마의 근황을 전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그 기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유년의 동경심은 멀리 떠나지 않아, 내심 그가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이 제 일인 양 뿌듯하기도 했다. 작년 갑작스레 선수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을 땐 적잖이 충격도 받았다. 일주일 내내 시무룩하여 토라가 먹고 기운 내라며 하이라이스를 사주었던 기억이 있다. 이를 생각하면 저는 감추고만 있을 뿐, 여전히 우시지마 선수의 팬인 것 같다.


마침 체육관 입구에서부터 인영이 셋 보인다. 체육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죄 그로 쏠렸다. 부담스러우리만치 반짝이는 눈들은 배구를 하는 중학생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동경이다. 한명은 틀림없이 고문인 이케다 선생님, 다른 한명은 나가마츠 코치, 가운데 있는 한명은 유난히 몸집이 다부지고 크다.


.”


누군가가 얼빠진 감탄을 냈다. 진짜로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코치의 인맥에 감탄을 보내야 할 때였다. 코우센에 오길 잘했어. 신입생들의 중얼거림에 재학생 역시 공감했다. 시라토리자와 출신의 우시자마가 코우센에 감독으로 부임하는 날이 오다니.


현대에야 일본 배구가 더 이상 흔히 말하는 몰빵 배구에서 장점을 찾지 못하고 콤비네이션 중심의 배구 혹은 스피드 배구 물결을 따라감에 따라 학생 배구에서도 그러한 스타일의 팀이 늘어가고 있었고, 미야기 현 소재의 대다수의 배구부는 학생 배구에서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스피드 배구의 장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몰빵 배구를 하는 팀과의 시합에서 더 강점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었고, 한 때 미야기 현의 왕자王者는 꾸준히 몰빵 배구를 하는 시라토리자와 학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우시지마가 에이스로 있었던 시라토리자와 고등부와 당시 미야기 현에서 가장 먼저 스피드 배구를 도입했던, 우시지마와 마찬가지로 미야기의 자랑이자 일본이 낳은 천재 세터라고 불리는 국대 카게야마 토비오가 소속되어 있던 카라스노 고교와의 시합 이후 미야기 현의 많은 학교들이 대 시라토리자와를 목적으로 스피드 배구 팀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결과 미야비가 15살인 현재 시라토리자와 고교는 상당히 약체화되었다.


그러니 시라토리자와의 과거의 영광이며 원맨팀의 주축, 최고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시라토리자와 중등부가 아닌 스피드 배구를 하고 있는 코센에 온다는 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 그로선 단순히 현재 미야기 현 중학 배구 2대 강호라고 불리는 팀을 선택했을 지도 모르지만.


크흠.”


기대 한껏 모은 등장에 배구부 아이들이 자연스레 고문과 코치의 앞에 옹기종기 몰려들었다. 당장 신입생들의 소개보다 더 설렌 등장이다. 미야비 역시 3학년 매니저라는 권력을 발휘해 누구보다 선두에 섰다. 이케다 선생님은 저가 더 뿌듯한 낯으로 우시지마를 소개했다.


오늘부터 우리 배구부에 감독으로 부임하게 될 우시지마 와카토시 감독님이시다. 이상하게 부르지 말고 감독님이라고 불러.”

, 감독님!”


주장인 유라도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는데, 넉살 좋은 토라는 제일 먼저 감격하여 외쳤다. , 너 바로 일 분 전에 우시와카라고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잖아. 3학년 동료들이 찬 눈으로 흘겨도 그는 꿋꿋하게 마저 외쳤다.


신다 토라가! 3학년 리베로 입니다!”

우시지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시지마는 그의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허억, 감독님이 대답해주셨어! 당연하지, 감독님도 사람인데. 가벼운 핀잔에도 토라는 감격의 홍수에 빠져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야비는 그는 가벼이 무시하기로 했다. 작년부터 히마의 스파이크를 받아내는 것도 버거운데, 우시와카의 스파이크는 얼마나 대단할까? 라며 눈을 빛내던 녀석이었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놀랍게도 우시지마 역시 가볍게 그를 무시하고 인사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잘 부탁한다.”

!”


코치는 주장과 부주장을 가리켜 먼저 감독님께 소개했다. 주전 선수들은 일반 부원들과 똑같이 찬밥신세였다. 아마도 감독의 부임 첫날부터 자칫 선수들이 차별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어 그는 배구부의 유일한 여성인 미야비 역시 지목했다.


, 이쪽은 우리 부 매니저에요. 선배.”


엇비슷한 색의 눈이 마주쳤다. 제 가족 때문에 눈치만 빨라진 그녀는 남자가 얼핏 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시합 때에도 생각했지만 되게 읽기 힘든 얼굴이네. 미야비는 생각을 내색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3학년의 오이카와 미야비라고 합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제 남자는 누가 봐도 놀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왼손을 내밀었고, 미야비 역시 자연스레 왼손을 내밀어 손을 맞잡았다. 토오루보다 크고 단단한 손이다. 수천수만 번을 바로 이 왼손으로 스파이크를 내려쳤겠지. 손바닥 안 갈라진 세월의 계곡이 느껴진다. 어쩐지 알 수 없는 기분에 가슴 언저리가 술렁인. 미야비는 이 기분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그래, 오이카와.”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내뱉는 말이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

 

 




* 2017년 발행했던 회지 <Aparecium>의 외전입니다. 본문의 스포일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https://tnadlwkarlek.postype.com/post/1430461)




이와이즈미는 손에 쥐고 있던 예언자 일보를 꽉 쥐었다. 무너진 마법부 로비의 사진이 아주 쉽게 우그러진다. 사진 속에는 너덜한 상태의 해리 포터를 비롯해 뒤로는 덤블도어를 비롯한 불사조 기사단원들, 어린 학생들 몇이 모여 있었다. 남자는 어린 학생들의 정체는 알지 못해도 불사조 기사단원들은 모두 알았다. 사실 중심에 선 해리 포터와도 연이 있다. 꽤 친한, 그리고 제가 누명을 벗겨준 이후 더욱 친해진 후배 녀석인 시리우스 블랙이 소중한 대자랍시고 몇 번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사진의 주인공인 살아남은 자해리 포터도 아니었으며, 위대한 대마법사 알버스 덤블도어도 아니었다. 그는 뒤에 선 몇 명의 오러들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저 너머를 응시하고 있고, 이 몹시 잘생긴 사내가 응시하는 사진 옆에는 기사의 헤드라인이 굵고 반짝반짝하게 빛난다.


어둠의 마왕이 돌아왔다.’


단언컨대 이와이즈미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가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는 지나치지 않은가. 기사에서 덤블도어의 말에 의하면 어둠의 마왕, 볼드모트는 이미 작년에 돌아왔다고 한다. 호그와트에서 트리위저드의 마지막 시합이 열렸던 밤, 해리 포터의 피를 발판 삼아 눈을 떴더라고. . 그제야 저는 오래 전 왼쪽 팔목에 새겼던 문신이 되살아난 이유를 깨달았다. 돌아왔다. 한 때 자신이 피상적으로 주인을 모신 자가, 오이카와의 어둠이 돌아왔다. 과거의 악몽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만은 지키겠노라는 신념을 이행한 증거가.


그래서 모두가 제게 사실을 숨겨온 것이었다.


알버스 덤블도어는 문신이 되돌아왔다며 불길해하는 제게 볼드모트는 몰락했되 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고 설명해주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설명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노인은 무시해도 좋다고 했다. 아즈카반에서 벨라스릭스 따위를 비롯해 어둠의 마왕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들이 탈출했던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그들이 문신을 되살려 어둠의 마왕을 부활시키려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게 죄다 거짓이었다니. 짓이겨진 신문을 바닥에 던지며 이와이즈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는 덤블도어를 잘 알았다. 만일 그 노인네라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자가 돌아온다는 걸 알자마자 제게 이번에는 불사조 기사단으로 정당하게 협력해달라고 요청해야 정상이었다. 그는 선이면서도 교활하기 짝이 없어서,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죄다 사용하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사실을 숨겼다는 건 한 가지 이유 밖에 없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바라지 않았다.


물론 그를 이해할 수는 있다. 행여 소중한 사람을 또 잃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어떻게 지켜낸 영원의 반쪽인가. 우리는 서로가 모여야만 비로소 일이 될 수 있었다. 오래 전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명목 아래 이루어졌던 싸움은 지나치게 고통스러웠던 과정이었던 터라 두 번은 겪기 싫었을 터다. 배신당했다는 생각은 한 번으로 족하다. 내가 너를 죽이겠다는 증오도 한 번으로 족하다. 희생이라는 자기만족을 위한 미덕도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 죄다 한 번으로 족했다. 오이카와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정작 누구에게도 지킴 받지 않고 뛰어드는 것 역시 한 번으로 족했다.


구겨진 신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당장 몸을 일으켜 지팡이를 쥐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망토를 둘렀다. 남자는 늘 무언가를 결심한 직후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오직 하나만을 떠올리며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오이카와가 있을 곳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마법부가 반파되었고 적의 귀환이 공언되었다면 오러이자 불사조 기사단인 자가 있을 곳은 하나뿐이다. 이와이즈미가 선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는 눈을 단초 깜박인다.


오이카와!”


순식간에 그는 그리몰드 광장 12번지에 도착했다. 언제 와도 음침하기 짝이 없는 집구석이다. 언젠가 후배 녀석을 만나기 위해 두어 번 방문한 경험은 있지만, 정작 집주인인 그가 이 집을 끔찍하게 여겨 대부분의 만남은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블랙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외친 소리에 식당에서 울리던 자잘한 말소리가 뚝 끊긴다. 저쪽이군.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인다.


이와쨩? 잠깐, 이와쨩이 어떻게.”


회의를 하고 있었는지, 식당 안에는 낯익은 면면이 가득하다. 호그와트에 있어야 하는 몇 인물들은 없지만, 이와이즈미가 기억하는 불사조 기사단 단원들은 전부 있었다. 집주인인 시리우스 블랙도, 기사단을 이끄는 덤블도어도 있고, 역시 오이카와 토오루도 있다.


늦었네, 하지메 선배.”


머리에 붕대를 둘둘 둘러맨 시리우스 블랙이 씩 웃었다. 마법부에서의 전투에서 상당히 다친 모양이었다. .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오이카와를 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지 상처나 붕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핏기 가셔 창백한 낯이다. 제가 저지른 잘못은 아는 건지, 시선 역시 저를 피하고 있다. 쉬이 상황을 이해한 덤블도어가 대신 웃었다.


예언자 일보를 보았구나.”

. 불사조 기사단원들이랑 자주 교류를 했던 것 치고는 유감스럽게도 소식이 늦었네요.”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말투가 토오루를 닮아가는구나, 하지메. 그러나 경험 많은 노인은 능숙하게 이와이즈미의 빈정거림을 넘겼다.


그래, 마침 잘 되었군. 이참에 하지메, 자네도 함께 일을 돕지 않겠나?”

교수님!”


외침은 식당 쪽에서 터졌다. 오이카와였다. 이와이즈미는 거리낌 없이 인상을 구겼다.


졸업한지 곧 스무 해가 다 되어가는 데도 날 그리 불러주다니, 영광이구나.”

저와 약속했잖아요, 덤블도어.”

하지만 하지메도 알게 되었잖니.”

이와쨩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에 매서운 공방이 오갔다. 다른 자들은 날카로운 공방에 말 붙이지 못하고 상황을 관조할 따름이었다. 아니, 오이카와를 비롯해 이와이즈미와도 친분이 깊은 일부 사람들은 도리어 흥미로운 기색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


이와이즈미는 홀로 팔짱을 끼고 오이카와를 향해 턱짓했다. 기실 연인이나 소꿉친구를 부르는 태도라기에는 상당히 불량스러웠다. 오이카와는 그 짧은 단어에 침묵 마법에 걸린 마냥 입을 꾹 다물었다.


누가 보면 내가 볼드모트에게 돌아간다는 줄 알겠다?”


. 순간 짧은 신음이 어딘가에서 샜다. 식당 밖에서 난 소리였다. 이 저택에 있던 어린 녀석들이 몰래 훔쳐듣고 있기라도 한가보다. 범인을 짐작하는지, 몰리 위즐리가 화가 난 기색으로 식당 밖을 나가기에 이와이즈미는 신경을 끄고 덧붙였다.


뭐가 무서운지는 대충 알겠어.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무서워하는데?”


자신의 배신은 명백하다. 이미 십년 전 제 행위는 덤블도어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고 오랜 시간 뒤 의심을 푼 불사조 기사단들은 저더러 희대의 로맨티스트라 비웃곤 했다. , 몰락했던 데스이터들은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더 이상 서로에게 지팡이를 겨누게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 자명하다.


내가 죽을까봐 무섭다면 너도 나서면 안됐었지. 내가 공주님이냐? 성 안에서 얌전히 지켜지고 있게?”


이와쨩 얼굴이 어딜 봐서 공주야? 제 본심은 이미 질문을 하고 있는 당사자가 훤히 꿰뚫고 있고, 반박할 말은 없어 오이카와는 애꿎은 말만 잡고 늘어졌다. . 리무스 루핀과 시리우스 블랙이 짧게 웃었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소년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네가 허튼 짓 할까봐 그렇잖아.

내가 뭘.”

이와쨩은 항상 자기보다 날 더 우선순위로 두는 겁쟁이니까.”

하아? 누가 할 말인데.”

하지만 이와쨩은 정말 쓸모없는 곳에서 그리핀도르 같은걸.”


오이카와 씨는 그런 기사도 정신, 전혀 바라지 않아. 뻔뻔하게 말하던 목소리가 칭얼거림처럼 변해간다.


솔직히 너 또 그럴 거잖아.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이와쨩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선택할 거잖아.”

…….”

물론 나도 이와쨩이 가장 소중하고, 이와쨩을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는 날 포기하면서까지 너를 홀로 두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넌 아니잖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제 목을 조르는 듯했다. 진실이었다. 그야, 네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으니까. 맹목적으로 바란 건 줄곧 오이카와의 행복이고 그의 삶이었지 제가 아니었다.


하지메. 나는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싸우는 거야.”


나 역시 무엇보다 너를 사랑하는데, 자신의 사랑은 오이카와와는 전혀 달랐다. 혀 위로 모래가 까끌거리듯 하다. 물기 없이 버석 말라버린 사막이다. 덤블도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나와 같다면. 그러니까, 위험에 처했을 때 기꺼이 나만 지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럼 좋아. 께 싸우자.”

…….”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뜨거운 데에도 이와이즈미는 전혀 대답할 수 없었다. 빛 담아 눈부신 시선을 보며 그를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거짓니까. 인정한다. 오이카와를 되찾고, 오랜 시간 평화롭게 있었지만 이와이즈미의 사랑은 여전히 비겁했다. 세상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피어나도 그는 언제든지 오이카와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었고, 기꺼이 그럴 것이었다. 너는 많이 실망하겠지. 어쩌면 그리핀도르 답지 않다고 질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팔짱을 풀고 어깨에 힘을 늘어뜨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내 말문을 열었.


덤블도어.”


나지막이 부르는 이름은 제 연인이 아닌 다른 자의 것이다. “그래.” 현명한 마법사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음에도 동요 없이 대답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내리깔았다.


위대하다는 건 저 녀석을 보고 말하는 겁니다.”


나는 그렇지 못해요.


썩 쓸쓸한 음색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 식당을 빠져나갔다. 결국 그는 세상 모든 대의(大義) 중 오이카와만을 위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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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후로 보답을 하겠다는 남자의 막무가내에 따라 사보는 오색 빛무리에 끼어들었다. 본인은 보답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사내는 저 좋을 대로 돌아다니기 바쁜 것 같았다. 지나가다가도 음식만 보면 달려가서 입 안에 한가득 쑤셔 넣기 일쑤였다. , 이 녀석이겠구나. 아까 제가 지나갈 적에 벌써 재료가 동이 났다던 닭꼬치집의 범인이 누군지 절로 짐작 가능할 정도였다.


어이, 이거 맛있어.”


남자가 해수고기 다섯 개를 내밀었다. 그래도 열 개 주문해서 하나만 나눠주지는 않네. 사보는 그 부분을 높이 평가하며 한꺼번에 세 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역시 먹는 양으로는 지지 않았다. 덕분에 전투적으로 배를 채운 두 사람이 여유를 가진 것은 마지막 후식으로 산 파일애플 꼬치를 하나씩 손에 쥘 즈음이었다.


으아, 잘 먹었다!”

그러게. 덕분에 포식했어.”


사실 종반부에 이르러서는 에이스가 돈이 없어 사보가 대신 냈지만, 둘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볼록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주근깨 사내가 파인애플을 한 입 먹는다.


이런 마을 축제는 처음인데, 꽤 괜찮네. 분위기도 신기하고.”

아아. 나쁘진 않아.”


사보가 동의했다. 시야 너머에서는 아이들이 종이 뜰채로 금붕어를 잡고 있었고, 바로 옆에서는 몇 사내 녀석들이 사격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체격에 맞지 않게 귀여운 분홍색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있던 남자 한 명이 에이스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선자앙! 이것 보슈!”

푸하하하, 뭐야. ! 갑자기 웬 토끼냐!”


내가 딴 거유! 앞으로 얜 나랑 잘 테니까, 건들지 마쇼!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했다. 사보는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트리는 사내를 웃는 낯으로 응시했다. 역시 해적인 듯하다. 그것도 선장. 아까 전 당했던 놈이 현상금 사냥꾼이었겠군.


선장도 한 번 해 보는 게 어때? 이거 의외로 재미있다고. 잘 넘어가지도 않고.”

그래봤자 먹지도 못하잖아.”

, 이 놈의 선장은 뭐든 음식으로 치환 못해서 탈이야.”


동료들과 함께 있던 스페이드 선원 한 명이 다가왔다. 해적단의 간부기도 한 듀스였다. 그는 낄낄 웃으며 간이 사격장 쪽을 턱짓했다. 저거, 백발백중하면 가장 큰 인형도 주지만, 대신에 웨스트블루 산 술 한 통과도 교환 가능하다더라고. 아까 전에 우리 저격수는 다섯 통이나 들고 갔. 지금쯤이면 갑판에서 다 같이 술판 벌이고 있을 걸?


술판이라는 단어가 에이스의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그럼 저기서 다섯 통 더 들고 가면 내가 영웅이 되는 건가? 아서라, 총도 제대로 못 쏘면서. 시끄러워, 두고 보라고. 남자는 제 동료들 사이를 비집고 사격판을 향해 척척 다가갔다. 사보는 그의 뒷모습 멀뚱하게 보다가 따랐다.


아저씨! 나 한 판 할래!”

오오!”


함성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러웠다. 경계 없이 마냥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조금은 낯설다. 그는 웃는 낯으로 한쪽에 몸을 피해준 간이상점의 주인장 곁에 몸을 약간 기대고 섰다. 한 가운데에 선 사내는 상체를 굽히고 신중한 낯으로 총을 겨눈 채였다. 꽤 어설픈 포즈다. 사보는 속으로 단정했다. 저 자는 사격에 있어서는 초심자다.


으악!”


보라. 첫 발이 훌륭하게 빗나갔지 않은가. , 하는 커다란 소리와 반동에 깜짝 놀라는 청년을 보여 모든 구경꾼들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공교롭게도 그 웃음이 그를 자극했다. 분한 얼굴로 다시 총을 잡는다. 사보는 남자가 쏜 총이 전부 과녁을 빗나가는 모양을 지켜보며 힐끗 주인장을 곁눈질한다. 제 손님들이 해적임을 아는 데에도, 돈이 되기 때문인지 해적들이 선한 인상이기 때문인지 경계 없이 웃고 있다.


이렇게 성대하게 축제를 열고, 인형까지도 저렇게 가져다놓는 걸 보면 이 섬에는 상선이 자주 다니나 봐?”

? 아아, 그렇지.”


갑작스런 질문에도 주인은 선선히 대답했다. 에잇, 한 판 더! 저 앞에서 남자의 외침이 우렁차다.


축제가 아닐 때에도 그러는 걸 보면, 혹 섬에 특별히 유명한 음식이라도 있는 거야?”

특산품은 없지만, 경로상 꾸준히 이 섬 해역을 지나야하는 상선이 있거든. 잘못해서 배 하나가 침몰하면 큰 피해를 입게 되니까, 상사(商社)의 사람들이 꾸준히 이 섬에 들려 제를 지내지. 그들도 해신을 믿거든. 덕분에 상선이 자주 드나드는 거야. 가끔 물자도 지원해주고. 우리에게는 고마운 일이지.”

헤에, 그렇구나.”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조하던 사보가 입매를 빙그레 올렸다. 이거로군.


혹시 상사의 이름이 뭔지 알아?”

모를 수가 없지! ‘심층해류우미트가 운영하는 곳인걸.”

, 땡큐.”


해운왕인가. 그는 겉으로는 반듯한 해운업을 하지만 뒤쪽으로는 불법적인 물건들을 옮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름대로 어둠의 세계의 제왕 축에 끼는 사람이니까. 우미트가 이곳에서 경로를 세탁하나 보군. 이걸로 대부분의 퍼즐은 맞춰졌다. 사보는 손가락을 끝을 두드렸다. 코알라와 핵에게 연락할 일만 남았군.


으아! 한 판 더다!”

푸하하. 선장, 안된다니까? 포기하자! 주먹이면 또 몰라!”

게다가 지금 내는 돈들도 전부 내 돈이라고!”


이번이 마지막이야!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단 한 발도 맞추지 못한 사내는 급기야 씩씩거리며 제 셔츠를 벗어젖혔다. 잘 짜인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오오! 같은 선원들의 장난스러운 함성 소리가 윙윙 울려 퍼진다. 시선의 끝에는 장난기 모조리 버린 채 심호흡하며 총구 겨누는, 제 또래의 남자가 있다.


문신이 있었네. 사보는 단정한 글자의 나열을 읽어 내렸다. ASCE. 아스세? 아니, S 위에는 엑스 표지가 드려져 있는데. 잘못 쓴 건가? 하지만 문신을 잘못 새겼다면 그냥 지우면 되잖은가. 굳이 위에 엑스 자를 덧그릴 필요 없을 텐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문신은 도안을 몇 번이고 확인한 이후에 새기므로 부러 저리했을 확률이 크다. 무슨 거창한 의미라도 있는 걸까. 세간에 떠도는 모양을 뒤적이지만 어떤 약자나 상징도 저것과 같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악! 아슬아슬했는데!”


. 소리가 울렸으나 이번에도 썩 좋은 결과는 낳지 못했다. 총을 놓고 양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는 행동에 팔방에서 와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사보도 짧게 어깨를 들썩였다. 해적이라기보다 승부욕 넘치는 소년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가 이제껏 만난 해적 중 첫손에 꼽힐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남자는 남은 3번의 기회를 신중하게 소진했다. 두 번은 빗나갔으나, 그의 노력이 빛을 냈는지 운이 좋았는지 마지막은 다행스럽게도 인형 하나를 맞추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으니 전자로 인식해도 될 것 같다. 사내는 신사 모자를 쓴 파란 곰 인형이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우왁!” 소리를 지르며 제 동료를 얼싸안았다.


선장! 최고에요! 우와!”

크하하하, 곰 인형을 누구 코에 가져다 붙이려고 그래요?”

내버려 둬! 선장도 밤에 끌어안고 같이 자려나 보지!”

, 선장. 그건 못 먹는 거요!”


우습게도 마지막으로 외친, 톰이라는 해적의 말에 들뜬 낯으로 주인에게서 인형을 받아들던 에이스의 표정이 곧장 굳었다. 그의 눈이 어색하게 주인에게로 향했다.


. 이건 술로 못 바꾸는 거야?”

못 바꾸네.”


주인장이 씩 웃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조그마한 술 한 병은? 안 되네. 그럼 혹시 고기라도, 무리야. 재차 이어지는 확답에 인형을 든 남자의 어깨가 시무룩하니 내려앉는다. 제 선장이 우울해지는 게 어찌나 즐거운지, 주위의 선원들은 낄낄 웃음 터트리기 바쁘다. 그러게 누가 해본 적도 없는 사격에 도전하랬수? 위대한 항로-비록 낙원이라 해도-을 누비는 해적단 치고는 상당히 내부에 위계질서가 느슨한 편인 듯 보였다. 사보는 여전히 조금 떨어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낄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고, 저 역시 곧 일을 하러 가봐야 했으니까. 물끄러미 관조하던 시선이 돌연 낯선 것과 맞부딪친다. 눈이 둥글게 뜨인다.


, 잘됐네! 어이! 이거 가져, 선물이야!”

나보고 지금 이런 인형을 가지라고?”

뭐 어때. 들었겠지만, 이래봬도 내가 무려 해적단의 선장이거든? 그런데 이런 귀여운 인형 같은 걸 선실에 두고 다니면 선장으로서의 위엄이 서겠냐고. 먹을 것도 아니고, . 네가 가져.”


에이스가 씩 웃으며 저를 향해 곰 인형을 냉큼 던졌다. 둥글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자, 사보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다. 그는 떨떠름한 낯으로 인형을 둘러보았다. 혁명군 참모총장이 가지고 있기에도 지나치게 귀여운 물건인데. 더군다나 저건 어딜 보아도 귀찮아서 제게 떠넘기는 모양새다. 거절을 말하기 위해 고개를 올리려는 찰나,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사보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오늘 즐거웠어! 고기도 맛있었고! 난 이만 이 녀석들이랑 돌아가 볼게. 같이 가서 술 마시자고 성화네.”

나 같은 사내놈이 가지기에도 인형이 지나치게 귀엽단 생각은 안 드나보지?”

뭐 어때. 똑같이 귀엽잖아. 나 인형 따는 거 구경한 값이라고 쳐.”


솔직히 지금 내가 저런 걸 가지고 있는 것도 우습고 말이야. 분명 나중에 만나면 욕할걸. 손을 흔든 사내가 금세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멀리 나아진다. 사보는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한 번 인형을 보았다. 단순히 인형이 파랗다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이 봉제 곰은 까만색 실크 해트를 쓰고 있는 것도 모자라 겉에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잠깐만, 저는 분명 유카타를 입고 있었는데. 혹시 이미 제 정체를 알고 있었나? 분명 늘 입던 복장이 곰 인형이 입은 것과 비슷했다. 이름조차 한 번도 부르지 않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선장, 곰 인형을 줬던 놈은 누구요? 처음 보는데.”

? 나도 이름 모르는데.”

예에?”

선장은 이름도 모르는 사내자식에게 인형을 준답니까? , 고백이라도 했수?”

저녁에 같이 다녔거든. 어쩌다 보니. , 하지만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네.”


멀리서 어슴푸레한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잔뜩 패기까지 곤두세우던 사보의 기세가 금세 사그라진다. 그냥 제게 주었나 보다. 깜짝 놀랐네. 이미 받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사보는 수긍하고는 해적이 걸었던 방향과 정반대편으로 걸어간다. 코알라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함이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가던 차에 안쪽에 넣어둔 애기전보벌레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보는 곰인형을 제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 “나야.” 수화기를 얼굴에 붙였다.


사보, 큰일이네. 꽤 성가신 인물이 섬에 상륙한 것 같은데. 일이 잘못하면 수틀릴지도 모르겠어.”


핵이었다.


성가신 인물? 해군 대장이라도 왔대?”

거기까지는 아니지만.”

그럼 사황?”

그건 아니고.”

아니면 상관없잖아.

, 말 좀 듣게! 불주먹 에이스를 모르나? 샤봉디까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현상금 2억을 넘기는 해적이라네.”

불주먹 에이스?”


불빛 드문 골목의 한 가운데에서 사보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깐 앞뒤로 고개를 돌려 인적이 느껴지는지 확인했다. 인기척은 없다. 그래. 수화기 너머로 핵이 고개를 주억이는 듯 했다. 그러나 사보의 대답은 냉담했다.


그게 누군데?”

? 사보, 정녕 스페이드 해적단을 모르는가? 최근 바다에서 대형 루키라고 명성이 자자하다고. 혁명군 내부에서도 몇 번 이름이 올랐던 걸로 알건만.”

그런 거 몰라.”

부디 관심 없는 이야기는 금세 잊어버리는 버릇 좀 고침이 어떤가?”

어쨌든 이 섬에 해적들도 현상금 사냥꾼도 상당한 건 사실인 것 같아. 나도 해적들을 만났거든. 그리고 좋은 사실도 알아냈어. 아마도 우미트가 여기서 한 번 경로 세탁을 거치는 것 같아.”

, 우미트가 말인가?”

방법도 대충 짐작이 가. 그렇다면 따로 무기들을 숨길 은신처는 없을 거야. 코알라 쪽으로 합류해. 나도 그쪽으로 갈게.”

하지만 사보, 여기서 수상한,”


. 혁명군 참모총장이 전보벌레를 끊었다. 그리고 핵에게 말했던 대로 코알라가 있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핵이야 불주먹이니 스페이드니 하는 해적을 거론했으나 큰 상관은 없을 테다. 코알라나 핵이 겨우 신생 해적단에게 당할 정도로 못 미덥지는 않으니까. 그냥 스친다면 좋고, 만약 그들이 우미트와 연관되어 있다면 쳐부수면 그만이다. 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걸음 옮기는 사보의 왼쪽으로 아릿하게 아쉬움이 스치운다.


불주먹이니 뭐니 하는 이름은 관심 없지, 제게 인형을 쥐어준 녀석의 이름은 알아둬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이유 없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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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잠시만. 우리 저거 하나만 먹고 가자!”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겠지.”

어쨌든!”


고소한 냄새가 풀풀 풍겨 나왔. 사보는 헛웃음 치면서도 무작정 제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사내의 뒤를 따랐다. 매콤한 양념이 벤 해수고기의 냄새는 그로서도 꽤 입맛이 당겼기 때문이다. 노점상 앞에 도착하자마자 얼결에 동반하게 된 남자가 이거 열 개만 줘!’를 외쳤다.


주황색의 독특한 모자 아래 뺨 점점이 박힌 주근깨가 썩 매력적인 사내였다. 사보는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특이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외는 데에도,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에도 썩 좋은 실력이 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대부분의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가 해적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불과 반 시진 전으로 시계바늘을 역행시킨다.


사보가 이 섬을 방문하게 된 것은 전쟁 중인 나라에서 자금과 무기가 들어오는 경로를 조사하던 중, 이 섬을 마지막으로 끊겼기 때문이다. 아마 이곳에서 누군가가 돈과 무기를 세탁하리라. 짐작하고 코알라, 핵과 함께 이 섬에 당도한 차였다. 섬에는 특이한 점이 없었다. 무기의 제조공장도, 해군이나 해적의 보호 아래 있지도 않았다. 다만 매해, 섬의 해역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는 것을 해신(海神)이 분노하였다고 생각하며 제를 올린다고 했다. 상자 안에 돈을 넣어 해신에게 바친다나, 뭐라나. 축제를 위해 해군 해적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자주 이 섬을 방문한다고.


아무리 뒤져도 찝찝한 부분이 그 부분 밖에 없어 코알라는 섬의 축제진행위원회 측에 숨어들기로 했다. 핵은 만일을 대비해 마을 근처의 동굴이나 은밀한 장소를 찾으러 떠났고. 사보는 전반적인 축제의 동태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과정에서 사보는 코알라에게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 하필이면 과일사탕 두 개를 사들고 가던 중이었다. 다급히 불빛 화사한 대로에서부터 벗어나, 사탕 두 개를 한꺼번에 쥐고 전보벌레의 수화기를 잡아 어깨에 올렸다. 입 안에 씹고 있던 계란 센베를 급하게 꿀꺽, 삼키니 코알라과 같은 이목구비의 전보벌레가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사보 군, 설마 조사는 안하고 실컷 놀고 있던 것 아니지?”

, 아니야!”


맹세코 아니었다. 조사도 약간은 하고 있었다. 일부러 의심받지 않기 위해 축제를 즐기는 꼴을 보인답시고 유카타까지 입지 않았던가! 그냥 도중에 배가 고팠을 뿐이다. 헌데 제 표정은 뻔뻔하지 못했는지, 전보벌레가 잔뜩 험악한 표정으로 사, , ? 제 이름 한 자 뚝뚝 힘주어 부른다. 저 반응이면 이미 들킨 것과 다름없다.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갑자기 전화는 왜 한 거야?”

, 그래.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어. 이 섬 말이야,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열리지만 제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게 아니래.”

그래?”


. 다만 일 년에 한 번 축제가 열리는 지금이 가장 유명하고 성대할 뿐이라 하더라고. 제는 매 달마다 해신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섬 끝에서 열린다는 거야. 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수익의 일부와 음식을 담은 보물상자들을 작은 배에 실어서 떠나보낸대. 소용돌이가 자주 친다는 그 해역으로 말이야. 사보는 사과사탕과 딸기사탕이 찐득하게 붙으려는 모양을 발견했다. 싱거운 이야기였다. 그는 충분히 전말을 추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바친답시고 모아놓은 보물 상자가 한 두 상자 더 늘어있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확률이 커.”

혹은 중간에 바꿔치기 했을 확률도 있지.”

그렇다면 범인은 축제 위원회보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일거야.”


이 바다에 신 같은 건 없어. 이 섬 사람들이 데비 존스를 신으로 모시지 않는 한 말이야. 무심하게 중얼거리면, 건너편에서는 긍정의 화답이다. 원래 신이라 믿는 것들도 전부 인간일 뿐이잖아. 레드라인 위 성지에 거주하는 누군가를 겨냥한 말이었다. 사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럼 넌 축제위원회 말고 제사장 쪽을 염탐해줘.”

알았어. . 그리,”


. 제 할 말 마친 사보는 전보벌레를 끊어버렸다. 애기전보벌레가 동그랗게 뜬 눈을 다시 감는다. 그는 벌레를 제 주머니에 넣은 후 다시 사탕을 각각 한 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 사이 사탕들이 붙어 떼어내는 데에 힘이 짧게 든다.


약간의 진척도 있겠다, 걸음 옮기는 소리가 다소 가볍다. 이제 무기가 이쪽으로 들어오는 경로를 찾으면 될 텐데. 핵이 제조 공장을 찾지 못한다면 분명 어디선가 들여오는 것일 터다. 해적을 포함한 관광객이 많이 드나드는 편이니 밀수입 자체도 쉬운 편일 테고.


그 때였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 다시 축제가 성행하는 장소로 향하는 사보에게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뭐지? 혹시 제 이야기를 들었나?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금방 해치울 수 있게끔 다리에 무장색을 살짝 실어 들어 올리려는 찰나.


화건.”


멀리서 난데없이 불덩어리가 쏘아져 나와 낯선 사내의 등에 직격한다. . 그는 나지막이 감탄하며 코앞에서 남자가 대자로 엎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범인이라 추정되는 사내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한 번 돌더니 멋들어지게 남자의 등을 밟고 땅 위에 착지한다. 점 만점에 . 양 손을 쓸 수 없어 박수를 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둘 중 누구도 바닥에 깔려 신음을 뱉는 패배자에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사보는 모자를 고쳐 쓰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때마침 축제의 등불이 자신의 뒤로 펼쳐져 있어, 그의 이목구비를 관찰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남자였다. 해군은 아닌 것 같고, 현상금 사냥꾼이나 해적 쯤 되겠지. 제 얼굴 알아보면 곤란한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고를 친 터라, 혁명군의 어린 수뇌부라며 알아보는 이가 소수 있었다. 그는 남자의 시선을 가만히 맞부딪쳤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주근깨 사내가 보는 방향이 미묘하게 제 얼굴과 다소 빗겨간 듯하다.


제 손에 들고 있던 딸기사탕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나서야 사보는 이 낯선 사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하.


먹을래?”

역시! 너 좋은 녀석이었구나!”


그냥 사탕이 먹고 싶은 거였군. 그는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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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사보 전력 120분 : AU


 

엎어져 잠든 사내의 위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이, 에이스! 당장 준비 안하냐!”


외침에도 꿈쩍 않던 사내는 기어코 노인이 그의 등을 힘껏 밟은 후에야 으악!” 비명 질렀다. 노인의 힘이 어지간한지, 에이스는 좀체 일어나지 못하며 갑판 위에서 끙끙거렸다. 갑판 위를 오가던 선원들은 결국. 한탄하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오직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던 한 해군만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에이스의 어깨에 코트를 둘러주었다. 백색의 바탕 위로 정의(正義) 두 글자가 도드라진다.


, 땡큐.”


제 부관에게 눈짓한 에이스는 잔뜩 울상 진 얼굴로 제 노인을 바라보았다. , 할부지!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때려요! 말로 해도 안 일어났잖아, 네 녀석!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정해 보이는 그는 해군 영웅이자 에이스의 양조부인 몽키 D. 가프 중장이다. 센고쿠 원수를 제하면 아무리 대장이라 한들 쉬이 대할 수 없는 인물이건만, 에이스는 무어라 당당한지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러고도 할부지가 해군 영웅이에요?! 누가 보면 아주 모거니아인 줄로만 알겠네! 뭐라고?! 네 녀석 지금 나를 해적 취급하는 거냐!


두 장교의 다툼은 익숙하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다. 해군 본부에서, 그리고 이 함선을 타고 이스트 블루로 건너오는 내도록 겪은 일이라 쾅, 갑판 부서지는 소리가 울리고 열기가 자신들의 팔뚝을 간지럽혀도 해병들은 무시하고 저희 알아서 하선 준비를 했다. 어떻게든 싸움을 말리려 드는 에이스의 부관, 글러브와 달리 가프의 부관인 보가드는 익숙하게 두 상사를 대신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갑판의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으로도 모자라 온 나무 바닥이 그을리고 난간은 녹아 흐물흐물해질 무렵에야 보가드가 말리려다 멀찍이 떨어져 소리만 지르는 글러브를 대신해 두 사람에게 알렸다.


하선 준비가 끝났습니다. 내려가시지요.”

오오, 그래!”


한 마디에 싸움이 종결 났다. 에이스의 멱살을 잡고 막 주먹을 휘두르려던 가프가 그대로 얼굴을 돌린 채 씨익 웃었다. 에이스는 그 틈에 냉큼 잡힌 손에서 벗어나 반쯤 흘러내린 코트를 다시 여민다.


잠 다 깨버렸네.”


쩍하니 입을 벌려 하품하는 에이스의 뒤를 글러브가 한숨을 쉬며 달라붙었다. 이쯤 되면 깨는 게 정상입니다, 준장님. 물론 에이스는 듣는 척도 않았다. 이렬로 길을 만든 해병들을 가로질러 타박타박 걸음을 옮긴다. 경례를 표한 해군들을 전부 지나면 이후부터는 사열한 왕국의 병사들이 보인다. 에이스는 역시 다소 익숙한 병사들을 지났다. 뒤통수에서 수군거림이 들린다.


저 뒤에 있는 젊은 해군이 바로 골 D. 에이스라고?”

그래, 무려 해적왕의 아들이라잖아.”

게다가 자연계 능력자라며?”

얼마나 능력이 좋으면 저 나이에 벌써 준장이 되었겠어?”


에이스는 그들이 어떤 말을 지껄이던 간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쩌억, 한 번 더 입 가릴 생각도 없이 하품을 했다. 5년 전 입대한 이후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전부 사실이니까.


D. 에이스는 바로 바다를 재패한 해적왕, D. 로저의 친아들이며 해군이다. 제 아비가 지금도 당장 신세계에서 신신장구하며 제 멋대로 바다를 휘젓는 범죄자라는 점이 그렇게 원망스럽지는 않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아버지인데. 물론 일 년에 얼굴 한 번 볼까말까 하지만 말이다.


먼 옛날을 거슬러간다.


남자에게 자식이 생기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다. 바다를 재패한 해적왕에게도 그랬다. 다만 선상은 결코 갓난아이를 기르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해군의 함선이라도 그럴진대 해적선은 오죽할까. 로저는 제 영역의 섬에 아내와 아이를 숨겼다. 그러나 2년이 못되어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 감히 해적왕의 영역을 넘봤던 간 큰 해적단의 짓이었다. 물론 그들은 로저가 애지중지하는 두 보물이 그곳에 있다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로저 해적단에게도 건방진 해적단에게도 비극이었다. 그 해적단은 전멸하고 해적왕은 간신히 제 아들만을 구할 수 있었다.


로저는 불안에 제 아이를 오로 잭슨 호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는 지나치게 어렸다. 더군다나 이 투박한 뱃사람들은 전투하는 법은 알아도 아이를 어루는 법은 몰랐다. 결국 그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제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맡기기로 했다.


그는 해군 영웅이자 영원한 자신의 적 몽키 D. 가프를 선택했다.


가프는 어처구니없었으나 결국에는 받아들였다. 마침 제 손주 녀석도 생겼을 무렵이었다. 그는 두 아이를 이스트 블루의 후샤 마을에 두 아이를 맡겼다.


에이스는 그곳에서 자랐다. 루피와 함께 다정한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다 보면, 일이 년에 한 번씩 아비가 거대한 배에 선물을 한가득 싣고 마을을 찾아왔다. 그는 세계를 떠돌며 자식이 생각날 때마다 산-그리고 때때로 강탈한 물건들을 내놓았다. 오로 잭슨 호가 정착할 때면 늘 마을은 활기로 넘쳤다. 마을 사람들은 해적들을 싫어했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던 탓이다. 함께 자란 의동생, 루피는 로저 해적단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모험 이야기가 어찌나 즐거웠는지 해적이 되겠다며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로저의 앞에서 당신의 뒤를 이어 해적왕이 되겠다며 선전포고하기도 했다. 되새겨보면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사랑을 받으며 제멋대로 자란 소년은 어느 날 해병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비를 나름대로 좋아했지만 단 한 번도 골 D. 로저가 해적왕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제 아비는 세상에서 혁명군 수장과 나란히 놓일 정도로 최흉의 범죄자다. D. 에이스라는 정체성 뒤에는 늘 해적왕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자신이 해적왕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내가 그를 체포할 수밖에 없다. 고 에이스는 깨달았다.


의형제인 루피가 기어코 로저의 뒤를 이어 해적왕이 되겠다며 항해를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상당히 우습다. 해군 영웅의 손자는 해적왕을 동경하고 해적왕의 아들은 해군 영웅을 따라 입대하다니. 실제, 가프의 아래에서 훈련한 에이스가 처음으로 해군 대 해적으로써 아비와 마주쳤을 때 로저는 길길이 날뛰었다. 제 아들 곱게 키워달라고 기껏 부탁했더니 자기편으로 완전히 꾀어버렸다면서. (물론 가프는 네 놈이 우리 손주에게 이상한 물을 들였다며 날뛰었다.) 그러나 동시에 에이스를 보고 경쾌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래, 아들아. 네가 나를 잡아넣겠다고? 그게 네 꿈이라면 어디 한 번 도전해 봐라!


…….”


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회상도 맺는다. 에이스는 눈앞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젊은 부부의 뒤로 몇 명의 신하가 서 있다. 가프와 에이스가 가볍게 목례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리조아까지 귀빈들을 호위할 골 D. 에이스입니다.”

몽키 D. 가프요.”


가장 앞에 선 이가 짐짓 턱을 치켜든 채 뻐겼다. 짐은 이 고아 왕국의 국왕 스태리라고 하오. 그 자세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이스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첫만남부터 당장 문제를 일으켜선 곤란하기에 애써 참았다. 5년 동안의 해군 생활은 그에게 상당한 인내심을 키워주었다.


해군 본부의 장교인 두 사람이 이스트 블루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올해 열리는 세계회의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아 왕국의 왕족들을 마리조아까지 무사히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고아 왕국에서 자랐다던 에이스가 고아 왕국의 왕족들을, 가프가 이스트 블루의 다른 가맹국의 왕족을 맡았지만 말이다.


뭐어, 문제없이 호위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가는 길에 시바르 왕국의 왕족들과 동행할 예정이니 그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물론 배를 다를 테니 걱정 말고요.”


간단한 설명을 마치자 왕족들이 먼저 왕국의 기가 새겨진 배에 오른다. 이미 물자는 전부 실어두었다고 했다. 준비가 빨라서 좋군. 이대로라면 바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함선으로 돌아간 가프와 달리 고아 왕국 담당인 에이스는 만약을 대비해 왕족과 함께 동행 하는 모든 선원들을 살펴보았다. 시종들과 요리사, 일부 사병들. ?


저 놈은 누구십니까?”


명단을 점검하던 중 에이스가 한 사내를 향해 턱짓했다. ? 명단을 건네준 기사가 눈을 꿈벅이며 해군 준장이 가리킨 방향을 찾았다. 탐탁찮은 기색을 한껏 흩뿌리고 있는 금발의 사내가 보였다. 상당히 화려한 정장 차림에 등 뒤에 맨 쇠파이프가 썩 이질적이다. 아아. 사보님 말씀이시군요. 사내가 고개를 주억인다. 사보? 그 이름은 명단에 없는데? 에이스가 명단을 뒤적였다. 역시 사보라는 이름은 보이질 않는다.


“이런, 죄송합니다. 사보님의 출발은 어제 급하게 출발이 정해져서 미처 정정하지 못했습니다. 스태리 국왕님의 형제 분 되시니 신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아.”


에이스는 수긍했다. 왕의 형제라는데 별 다를 일이 있겠는가, 싶었던 탓이다. 최종적으로 사보라는 이름의 남자까지 탑선하고 계단을 올리자 에이스의 함선도 출발을 곧장 준비했다.


바닷바람에 코트가 펄럭인다.


에이스는 제 몸뚱이를 덮고 있던 코트가 날아가자 슬쩍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갑판에 설치된 선베드에서(그가 갑판 바닥에 너무 드러누우면 옷이 더러워지거니와 왕족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글러브가 설치해주었다.) 낮에 깜박 잠든다는 것이, 그만 새벽까지 잤나 보다. 아마도 제 부관이 깨우려다 포기하고 코트만 덮어주었겠지. 충분히 짐작한다. 그는 으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화의 바다 혹은 최약체의 바다라는 명성의 이스트 블루답게 가는 길은 몹시도 순조로웠다. 시바르 왕족들을 태워 캄벨트로 향하는 과정은 기실 에이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순조롭다 못해 지루할 지경이었다. 해왕류나 해적선의 등장을 기대할 정도로. 덕분에 에이스는 낮잠만 늘어난 상태였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코트는 금방이라도 너머로 날아갈 것 같았다. 잃어버리면 글러브에게 분명 한 소리 들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장교 코트를 날아가게 내버려 두면,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줍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고. 에이스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다섯, . 이대로 손을 뻗으면.


으악.”


그 때였다. 공교롭게도 새벽바람이 강타했다. 에이스의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코트가 휘날리며 날아간다. , 진짜……. 어느새 고아왕국의 배 위를 뒹구는 백색 코트를 보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럴 땐 루피의 고무고무 열매가 부럽다니까. 제발 중간에서 멈추길 빌며 에이스는 고아왕국의 배로 뛰어 넘어갈 준비를 했다. 난간에 막 발을 올리는데,


어이쿠.”


휘말리던 코트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 에이스는 한 발만 여전히 간단에 올린 채 멈칫했다. 한 인영이 있었다. 그림자가 자신의 코트를 쥐고 다가온다. 새벽 탓에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아 에이스는 작은 불덩이를 허공에 만들어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흘러내리는 금발이었다. 이어서 크고 동그란 눈이, 다음으로 왼쪽 눈가의 화상이 보인다. , 그러니까 누구더라.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미간을 좁히는 에이스의 위로 어느새 난간까지 다가온 사내가 코트를 흔들어보였다.


이거 네 거지?”

어어.”


, 그래. 왕의 가족이랬지. 고아 왕국의 귀족이라던. 에이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남자가 백색 코트를 아무렇게나 뭉쳐서 휙 던진다. 에이스는 쉽게 받아냈다.


고마워.”

뭘 이정도로.”


시옷으로 시작했… 아.


사보.”


구겨진 코트를 아무렇게나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눈을 두어 끔뻑거리던 사보는 이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

그래,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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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카와 씨 팬 분들께서 간식 보내주셨습니다! 먹으면서 잠시 쉬다가 다시 촬영 시작할게요!”


 소식을 전해온 매니저의 말을 들은 감독이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와아! 찰나에 온 스텝들이 함성을 지르고 몸을 긴장시키던 배우들이 몸을 늘어뜨렸다. 오이카와는 웃는 낯으로 제 이름으로 온 간식 상자를 하나하나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건강음료와 더불어 싱싱한 과일과 마카롱, 쿠키와 우유빵 따위가 포장된 아기자기한 상자가 모두에게 하나씩 배분됐다. 그에게서 상자와 음료를 전달받던 여배우가 웃으며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와 계속 촬영하다간 살만 찔 것 같아요.”


 그의 팬들이 워낙 자주 음식 조공을 보내줘 덩달아 이번 촬영기간 동안 스텝과 배우들만 호사를 누리고 있다. 물론 타 배우 분들도 종종 밥차와 간식들을 보내주지만, 대개 드라마 전체 촬영기간 동안 한두 번이 전부였다. 한데 촬영이 막바지에 달하는 현재, 오이카와 측은 밥차를 제하고 간식만 벌써 다섯 번째다. 근래 그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과연 최근에는 일본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대세라더니.”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간식을 받았던 조명 감독 한 분이 지나가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덕분에 이번 촬영 내내 잘 얻어먹는다, . 아니에요. 맛있게 드세요. 지나가는 스텝들 모두가 한 마디씩 감사인사 하는 것을 받으며 오이카와는 생글생글 웃었다. 팬들이 신경써주는 마음도 좋았지만 늘 빠지지 않고 우유빵을 함께 넣어주는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기꺼웠다.


 더군다나 금일 낮은 협찬을 받은 브랜드의 카페 내부를 통째로 빌려 촬영 중이라 앉을 곳이 많았다. 다른 스텝들과 마찬가지로 오이카와도 동료 몇과 볕이 잘 드는, 통유리로 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옆에는 매니저가, 맞은편에는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남자배우와 함께 합을 맞추는 주연 여배우가 함께다.


 “너네 팬클럽 애들은 어느 팬페이지든 꼭 우유빵은 함께 보내주더라.”

 “하하.”

 “이러다간 나까지 우유빵에 중독되게 생겼네.”


 맛있지 않아요? 그래도 유명한 베이커리에서만 골라서 보내주던데. 그건 그래. 게다가 매번 넣어줘도 결국 텀 자체가 지나치게 짧지 않으니까 좋던데요. 오이카와는 간간히 제스쳐를 취하며 음료를 빨아마셨다. “오이카와 씨는 그럼 우유빵을 얼마나 자주 먹어요?” 이따금 질문이 넘어올 때면 입에 있던 것을 꿀꺽 삼킨 후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정말 끌리는 날에는 하루에 세 개 씩도 해치워요.”


 와아. 정말 좋아하는구나. 맞아. 그래서 오이카와 씨, 모 유명 프렌차이즈 베이커리랑 계약도 했었잖아요. 거기 매출도 크게 뛰었다면서요? 아아, 나도 광고 계약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것 봐. 나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랑 되게 잘 어울리지 않아? 부드러운 남자 느낌 들지 않아? 푸합. 빵이나 먹어요.


 자잘한 대화도 잠시, 음식이 하나 둘 입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잠깐 대화가 멎는다. 오이카와는 짧게 어깨를 으쓱인다. 아닌 척 해도 뿌듯한 것은 사실이다. 간식들을 날라줄 때마다 자주 얼굴을 보던 팬들과는 오늘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망하지만 팬클럽의 간부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아이들이라 얕게나마 친분이 있다 해도 무방했다. 지난번에는 가지 못해 미안하다느니, 이 가게에서 우유빵을 주문했으니 혹시 맛이 괜찮다면 가보라느니 하는 소소한 대화였다. 친절한 오이카와 씨는 가끔 팬들의 직장상사 욕을 들어주며 상담을 해주기도 하는 터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런 이야기도 들었지. 그는 짧게 상기한다.


 ‘, 맞아. 그리고 오빠! 우리 팬클럽에 새로운 간부님 들어왔어요! 오빠 진짜 완전 대박 헐 짱팬이래요!’

 ‘헤에, 그래?’

 ‘그런데 더 대박은 뭔 줄 알아요? 새로운 간부님이 오빠 남팬이라는 사실!’


 직장인이라서 오늘은 같이 못 왔지만, 지인짜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오빠랑 취향도 잘 맞아요! 짱이죠? 오빠 완전 마성의 남자에요! 남자도 다 꼬셔버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양손으로 엄지를 추켜세우던 한 어린 팬을 떠올리자, 기어코 오이카와는 푸스스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자그마한 소리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즐거운 생각이라도 해요? 간식 먹는 게 그렇게 좋아요?”

 “, 아녜요. 아까 전에 잠깐 팬들이랑 이야기 나눈 게 떠올라서.”

 “오이카와 씨 지금 자기 팬 많다고 자랑하는 거죠?”


 어휴, 얄미워. 에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장난스러운 말에도 과장스럽게 눈을 뜨며 고개를 휘젓는다. 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촬영하겠나. 일부러 저를 놀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지인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아예 도시락을 들고 다른 테이블로 옮기려는 모양에는 얼른 손으로 그를 붙잡으며 장단을 맞추던 오이카와는 별 생각 없이 창문을 힐끗 일별했다.


 “.”


 이윽고 세상이 멈추었다.


 찰나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게서 배제되었다, 시야에 들어온 한 남자만을 제외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검은 머리칼의 남자였다. 넥타이는 청색 바탕에 은실의 가느다란 스트라이프가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낯선 얼굴인데도 순식간에 꿰어진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박이지 못했다. 단초에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숨도 쉬지 못했다. 날숨 한 번에 날아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작금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와이즈미 하지메와의 과거와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남긴 말과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막연한 버팀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오이카와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 , .”


 촬영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무수한 인파 사이에서, 사내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이름을 모르는 몇 명이다. 아마도 회사 동료지 않을까? 정장 차림과 목에 걸린 비슷한 모양의 사원증으로 어림짐작한다. 그들은 카메라로 북적이는 곳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 사내 홀로 또렷하게 외면한다. 이윽고 다른 방향으로 발길 돌린다.


 아, 안되는데.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무작정 일어섰다. 일어나는 와중 허벅지와 테이블이 부딪쳐 덜컥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 씨?!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당황하여 제 이름을 불렀지만 미처 그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완전한 타인이다. 늘 그에게 최우선은 배구와 이와이즈미 하지메였고, 배구가 없는 현재 최우선은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매니저가 앉아있던 자리를 헤치고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있을 방향을 어림짐작하여 전진한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의아한 듯, 혹은 반가운 듯 제 이름을 불렀지만 기다리는 목소리가 아닌 터라 대답하지 못한다. 오이카와는 아까 전 카페에서 저가 바라보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단발의 여자아이가 핸드폰을 들고 꺄악,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와쨩은?


 아무리 고개를 둘러봐도 삐죽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밝은 대낮에도 플래시가 코앞에서 팡팡 터졌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이, 눈살 한 번 찡그리지 못하고 그는 망연하게 자리에 섰다.


 비로소 숨을 내쉰다. 현실로 돌아온다. 눈을 깜박인다.

 새삼스럽게도, 이와이즈미가 없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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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이사보 전력 120분 참가글. 주제 : "우리 언제 만났었나?"




있잖아, 에이스. 바람결 사이로 나직한 물음이 터졌다. 에이스는 여전히 제 손을 열심히 움직여 수전으로 상대의 긴 머리를 털어주면서 고개만 힐끔 위로 들었다. 방 한 켠에 놓인 거대한 거울 너머로 상대와 눈이 마주친다.


우리, 역시 어디서 만나지 않았었나?”


그의 눈동자는 까만색이었다, 의동생과 똑같은. 물음에는 에이스조차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자 이리저리 나부끼던 남자의 젖은 머리카락도 내려앉는다. 머리카락은 금빛이다. 에이스와도, 루피와도 닮지 않은 색이다.


짧은 침묵이었다. 거리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두 사람의 뿌리까지 파고들었고 벽면의 커다란 창문 너머에서 내려온 햇살이 길게 에이스의 등까지 뻗어 아버지 같은 선장의 문신을 반짝거리게끔 만들었다. 제 등에 닿은 온기를 자각하는 수 초 동안 에이스의 머릿속으로 온갖 종류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그치곤 꽤 답지 않은 고민거리였으나, 결국 남자가 선택한 답은 아래다.


뜬금없이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저가 침대 아래 바닥에, 에이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터라 그를 보기 위에서는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아무리 제 시력 좋다 해도 거울 너머로 보이는 낯은 상당히 작았다. 하며 그는 차라리 고개를 위로 꺾기로 했다. 길쭉하게 늘어난 목울대 위로 목젖이 도드라지고 물기 뚝뚝 떨어지는 곱슬머리는 본래 길이를 넘어 등까지 닿는다. 완전히 고개를 꺾으면 어제 종일 보았어도 지루하지 않는 얼굴이다. 눈동자 색을 제하면 하나도 저와 비슷하지 않았다. 아니, 머리길이도 얼추 비슷한가? . 하지만 머리 길이는 자라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거니까. 데구르르 굴러가는 동공은 과거를 상기한다. 멀지 않다.


임무를 마치고 혁명군 본부인 바르티고로 귀환하던 중, 불가피하게 식재료가 떨어져 도중 보이는 섬에 잠깐 정착했다. 흰수염 해적단의 기가 커다랗게 펄럭거리는 곳이었다. 위대한 항로는 물론이고 신세계에 넘어가면 사황의 보호를 받는 섬은 흔했다. 흰수염의 본선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어차피 저가 소란을 피울 것도 아니고. 사보는 가까이에 배를 대 물자를 보충했지만, 떠나기 전 곧 경계 해역에 커다란 태풍이 불 테니 잠잠해진 후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주민의 충고를 얻었다. 예상대로 공기가 심상치 않아, 그는 흔쾌히 수긍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마침 해역을 지나던 흰수염의 본선 역시 태풍을 피하기 위해 이 섬에 잠깐 정착했다.


이미 대단하신 몇 분들은 혁명군 참모총장의 이름을 알고 있을 즈음이었다. 얼굴 팔렸다간 큰일이 날 게 뻔해 그는 급히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늘 먹던 대로 식사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운이 나쁘게도 저가 있던 식당에 흰수염의 대장나리들이 몇 명 들어와 있었다. 그곳에서 이 남자를 보았다.


머리에 얹은 주황색 모자와 등에는 흰수염. 팔뚝에는 자신의 이름인 듯 보이지만 이름이라기에 뭔가 이상한 문신. 동료에게 건네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기이하게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희한한 사내였다. 주근깨 콕콕 박힌 얼굴 한 번도 본적이 없었는데 낯설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언젠가 현상수배지로 보았던가? 그 때문인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눈이 따라갔다. 어느 샌가 저는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이름도 알고 있었다. 포트거스 D. 에이스. 언제부터 알고 있던 이름인지는 모른다. 칠무해 제안을 걷어찬 대단한 루키라고 동료들이 떠들던 무렵이겠지. 간 큰 신인은 처음이라고 꽤 자주 소식을 지껄였으니 알게 모르게 뇌리에 박혔을지도. 어떻게든 적절한 개연성을 찾아내려는 이성과 별개로 몸이 움직였다. 겁 없게도 그는 흰수염의 섬, 모비딕 본선이 연안이 닻을 내리고 있으며 흰수염의 대장이 4명이나 있는 그 공간에서 무작정 그리운 냄새 풍기는 사내의 팔을 잡았다. 뭐야? 날 선 시선 몇 쌍이 동시에 제게 내리꽂혔더란다. 그러나 사보는 아랑곳 않고 물었다.


저기,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었나?


그 때 에이스의 표정이 지금과 같았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릴 적 머리를 크게 다친 이후로 기억력이 나날이 나빠져만 가는 듯하다. 지금처럼 울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건 왜?”


현실로 돌아온다. 사보는 눈을 두 번 깜박인다. 앗차, 생각에 빠져있느라 대답을 안 해줬었구. 하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말이지.


그냥 느낌이.”

느낌이?”

옛날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옛날 어디?”

그건 나도 모르지.”


사보를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알고 있으면 물어 볼 필요도 없었겠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낯선 것에서부터 그리운 냄새를 맡을 때가. 길 잃은 적도 없는데 제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전투 연습 중 돌연 잡게 된 쇠파이프가 그랬고, 식량 없이 바다에 조난당했을 때 해왕류를 잡으며 연명했던 언젠가가 그랬다. 에이스를 만난 순간도 그랬다. 이제껏 해가 서쪽에서 기상해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어서, 비로소 올바른 방향으로 햇살 맞은 순간 , 사실은 그랬지.’ 깨달았다. 정체 모를 안도가 페부를 가득 수놓았다.


사실은 우리가 형제였을 수도 있잖아.”

하아? 내가 어릴 적 기억이 없다는 핑계로 말도 안 되는 거짓말 늘어놓는 거 아냐?”


에이스는 어설프게 웃었다. 입매가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가 어정쩡하게 멎는다. 사보는 인상을 찡그리며 에이스의 낯짝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백 번 다시 봐도 눈동자 색을 제하면 하나도 닮지 않았다. 형제라니. 헛소리도 가지가지다. 내가 그런 농담에 속을 것 같아?


무엇보다 가족이면 연애는 못하잖아?”

, 그렇지.”


결국 거짓말이 맞다는 거네! 에이스가 들고 있던 수건을 냉큼 빼앗아 후려친다. 그러나 진심 반 섞은 보람도 없이 자연계 능력자답게 불꽃이 물리적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하하. 그가 짧게 웃음을 터트린다. 뭐 이런 장난 가지고, 하하. . 팔랑이는 수건 사이로 잔웃음소리가 섞인다. . 결국 에이스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보의 허리를 잡아 저가 몸 뉘인 침대 옆으로 슬쩍 던졌다. ! 갑작스런 반격에 그가 탄성을 뱉었다. 에이스는 능숙하게 몸을 굴려 사내의 양 팔을 붙잡고 위에 자리 잡는다.


그치? 보통 형제는 이런 짓은 안하잖아.”

무슨 소리야. 형제도 아니라며?”


아래 깔린 사내가 고개를 슬 기울인다. 그보다 무장색 쓰기 전에 얼른 비키지? 무겁다? 껄렁껄렁하니 이어지는 말은 과연 혁명군 2인자답게 협박조다. 하하. 에이스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며 사내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작위적이었다.


그렇지. 아니지.”


읊조리는 목소리는 쓸쓸했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래? 사보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사내의 등 위에 손바닥을 얹는다. 그는 자신과 만날 때면 종종 급작스레 기분이 전환되는 경향이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닿아, 그는 제대로 덩치만 큰 어린애를 위로해 줄 수 있었다.


하긴, 이런 놈을 제가 잊었을 리 없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남자의 존재는 상당히 강렬했다. 감정도. 에이스 정도라면 옛날 어디선가 만났더라도 보는 순간 기억했겠지. 사보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매듭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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