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오이카와 씨 팬 분들께서 간식 보내주셨습니다! 먹으면서 잠시 쉬다가 다시 촬영 시작할게요!”


 소식을 전해온 매니저의 말을 들은 감독이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와아! 찰나에 온 스텝들이 함성을 지르고 몸을 긴장시키던 배우들이 몸을 늘어뜨렸다. 오이카와는 웃는 낯으로 제 이름으로 온 간식 상자를 하나하나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건강음료와 더불어 싱싱한 과일과 마카롱, 쿠키와 우유빵 따위가 포장된 아기자기한 상자가 모두에게 하나씩 배분됐다. 그에게서 상자와 음료를 전달받던 여배우가 웃으며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와 계속 촬영하다간 살만 찔 것 같아요.”


 그의 팬들이 워낙 자주 음식 조공을 보내줘 덩달아 이번 촬영기간 동안 스텝과 배우들만 호사를 누리고 있다. 물론 타 배우 분들도 종종 밥차와 간식들을 보내주지만, 대개 드라마 전체 촬영기간 동안 한두 번이 전부였다. 한데 촬영이 막바지에 달하는 현재, 오이카와 측은 밥차를 제하고 간식만 벌써 다섯 번째다. 근래 그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과연 최근에는 일본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대세라더니.”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간식을 받았던 조명 감독 한 분이 지나가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덕분에 이번 촬영 내내 잘 얻어먹는다, . 아니에요. 맛있게 드세요. 지나가는 스텝들 모두가 한 마디씩 감사인사 하는 것을 받으며 오이카와는 생글생글 웃었다. 팬들이 신경써주는 마음도 좋았지만 늘 빠지지 않고 우유빵을 함께 넣어주는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기꺼웠다.


 더군다나 금일 낮은 협찬을 받은 브랜드의 카페 내부를 통째로 빌려 촬영 중이라 앉을 곳이 많았다. 다른 스텝들과 마찬가지로 오이카와도 동료 몇과 볕이 잘 드는, 통유리로 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옆에는 매니저가, 맞은편에는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남자배우와 함께 합을 맞추는 주연 여배우가 함께다.


 “너네 팬클럽 애들은 어느 팬페이지든 꼭 우유빵은 함께 보내주더라.”

 “하하.”

 “이러다간 나까지 우유빵에 중독되게 생겼네.”


 맛있지 않아요? 그래도 유명한 베이커리에서만 골라서 보내주던데. 그건 그래. 게다가 매번 넣어줘도 결국 텀 자체가 지나치게 짧지 않으니까 좋던데요. 오이카와는 간간히 제스쳐를 취하며 음료를 빨아마셨다. “오이카와 씨는 그럼 우유빵을 얼마나 자주 먹어요?” 이따금 질문이 넘어올 때면 입에 있던 것을 꿀꺽 삼킨 후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정말 끌리는 날에는 하루에 세 개 씩도 해치워요.”


 와아. 정말 좋아하는구나. 맞아. 그래서 오이카와 씨, 모 유명 프렌차이즈 베이커리랑 계약도 했었잖아요. 거기 매출도 크게 뛰었다면서요? 아아, 나도 광고 계약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것 봐. 나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랑 되게 잘 어울리지 않아? 부드러운 남자 느낌 들지 않아? 푸합. 빵이나 먹어요.


 자잘한 대화도 잠시, 음식이 하나 둘 입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잠깐 대화가 멎는다. 오이카와는 짧게 어깨를 으쓱인다. 아닌 척 해도 뿌듯한 것은 사실이다. 간식들을 날라줄 때마다 자주 얼굴을 보던 팬들과는 오늘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망하지만 팬클럽의 간부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아이들이라 얕게나마 친분이 있다 해도 무방했다. 지난번에는 가지 못해 미안하다느니, 이 가게에서 우유빵을 주문했으니 혹시 맛이 괜찮다면 가보라느니 하는 소소한 대화였다. 친절한 오이카와 씨는 가끔 팬들의 직장상사 욕을 들어주며 상담을 해주기도 하는 터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런 이야기도 들었지. 그는 짧게 상기한다.


 ‘, 맞아. 그리고 오빠! 우리 팬클럽에 새로운 간부님 들어왔어요! 오빠 진짜 완전 대박 헐 짱팬이래요!’

 ‘헤에, 그래?’

 ‘그런데 더 대박은 뭔 줄 알아요? 새로운 간부님이 오빠 남팬이라는 사실!’


 직장인이라서 오늘은 같이 못 왔지만, 지인짜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오빠랑 취향도 잘 맞아요! 짱이죠? 오빠 완전 마성의 남자에요! 남자도 다 꼬셔버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양손으로 엄지를 추켜세우던 한 어린 팬을 떠올리자, 기어코 오이카와는 푸스스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자그마한 소리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즐거운 생각이라도 해요? 간식 먹는 게 그렇게 좋아요?”

 “, 아녜요. 아까 전에 잠깐 팬들이랑 이야기 나눈 게 떠올라서.”

 “오이카와 씨 지금 자기 팬 많다고 자랑하는 거죠?”


 어휴, 얄미워. 에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장난스러운 말에도 과장스럽게 눈을 뜨며 고개를 휘젓는다. 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촬영하겠나. 일부러 저를 놀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지인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아예 도시락을 들고 다른 테이블로 옮기려는 모양에는 얼른 손으로 그를 붙잡으며 장단을 맞추던 오이카와는 별 생각 없이 창문을 힐끗 일별했다.


 “.”


 이윽고 세상이 멈추었다.


 찰나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게서 배제되었다, 시야에 들어온 한 남자만을 제외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검은 머리칼의 남자였다. 넥타이는 청색 바탕에 은실의 가느다란 스트라이프가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낯선 얼굴인데도 순식간에 꿰어진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박이지 못했다. 단초에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숨도 쉬지 못했다. 날숨 한 번에 날아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작금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와이즈미 하지메와의 과거와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남긴 말과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막연한 버팀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오이카와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 , .”


 촬영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무수한 인파 사이에서, 사내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이름을 모르는 몇 명이다. 아마도 회사 동료지 않을까? 정장 차림과 목에 걸린 비슷한 모양의 사원증으로 어림짐작한다. 그들은 카메라로 북적이는 곳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 사내 홀로 또렷하게 외면한다. 이윽고 다른 방향으로 발길 돌린다.


 아, 안되는데.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무작정 일어섰다. 일어나는 와중 허벅지와 테이블이 부딪쳐 덜컥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 씨?!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당황하여 제 이름을 불렀지만 미처 그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완전한 타인이다. 늘 그에게 최우선은 배구와 이와이즈미 하지메였고, 배구가 없는 현재 최우선은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매니저가 앉아있던 자리를 헤치고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있을 방향을 어림짐작하여 전진한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의아한 듯, 혹은 반가운 듯 제 이름을 불렀지만 기다리는 목소리가 아닌 터라 대답하지 못한다. 오이카와는 아까 전 카페에서 저가 바라보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단발의 여자아이가 핸드폰을 들고 꺄악,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와쨩은?


 아무리 고개를 둘러봐도 삐죽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밝은 대낮에도 플래시가 코앞에서 팡팡 터졌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이, 눈살 한 번 찡그리지 못하고 그는 망연하게 자리에 섰다.


 비로소 숨을 내쉰다. 현실로 돌아온다. 눈을 깜박인다.

 새삼스럽게도, 이와이즈미가 없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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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길만걸어 : 역시 몰텐님이시라니까요. 사실 알고 보면 오이카와랑 영혼의 쌍둥이아녜요?wwww]

 [우유빵 : ㅁㅈㅁㅈ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왜 언니들이 몰텐님께 부탁드렸는지 알겠더라고요.]

 [꽃길만걸어 : 저희 안목도 완전 쩔지 않아요? , 저번에 촬영 중에 인스타짤 올라왔을 때! 빨간 뿔테!]

 [우유빵 : 크 ㄹㅇ이었져]


 이와이즈미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방을 멀거니 응시하기만 했다. 굳이 자신이 타자를 치지 않아도 팬사이트 간부 전용 채팅방의 화면은 잘 올라갔다. 주로 오이카와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이번에 챙겨준 생일선물의 반응이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히나쨩 : 근데 반지는 낀 사진을 아직까지 못 봐서 많이 아쉽더라고요:(;´`;):]

 [우유빵 : 근데 몰텐님께서 산 목걸이 짤은 자주 올라오던데요??]

 [민트풍선 : ?? 목걸이요?? 설마 그 일자 목걸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치킨먹고싶다 : 헐 대박 그거 최근 오이카와 호크룩스잖아요]


 간부 중 한 명이지만 이번 생일선물 조공에는 일정상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 물음에 우유빵님과 꽃님이 빠르게 손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선물을 하러 갔을 때, 이와이즈미가 본인의 사비로 산 목걸이를 이번에 조공을 보낼 적 함께 부쳤었다고. 생일 다음날 오이카와가 SNS에 올린 인증샷에서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가 바로 그것이라고. 이와이즈미는 어수선한 채팅방을 오면서 애매한 표정을 짓고는 맥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굳이 숨기려고 한 적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동네방네 자랑할 의도도 없었던 터라 기분이 이상했다.


 뭐, 그랬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선물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로, 그의 생일 이후 촬영 때를 제한 대부분의 동영상이나 사진에는 그 목걸이가 함께 찍혔다. 남자조차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선물은 명백하게 오이카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의 취향이 바뀔 리는 없다. 그랬더라면 이제까지 제가 골랐던 모든 선물이 무용이 되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편지 한 장 없는 상자가 그 누구도 아닌 이와이즈미 하지메로부터의 선물이라는 것도 알지 못할 터였다.


 덕분에 그는 최근 올라오는 사진을 볼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했다. 미련이다. 혹시 너는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라는 근거 없는 물음이 홀로 두둥실 떠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지금도 같았다. 완전 계를 탔다며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가만 보다가 이와이즈미는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는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몰텐 : 그런데 이번 드라마는 촬영 시작한 지 꽤 됐는데 조공 소식이 없네요.]

 [우유빵 : 곧 해야죠! 밥차도 보내고! 간식조공도 보내려고요!]


 다행스럽게도 제 말에 오이카와가 얼마 전 촬영을 시작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바뀌었다. 무려 오이카와가 검사 역할이라니, 얼마나 섹시할까. 하는 감탄이 주된 내용이었다. 근래 촬영장이 어디인지, 밥차는 언제쯤 보내면 좋을 지에 대한 이야기도 슬쩍 나왔다. 이번에는 밥차 조공과 간식 조공에 대한 모금을 함께 할 예정인가 보다. 밥차 이후 남은 자금으로 간식 조공을 보내겠다는 펜페이지 회장의 말에 모두가 또 설레는 마음으로 밥차는 지난 번 보낸 모 회사가 좋더라, 간식은 이걸 넣는 게 좋을 것 같다, 둥의 의견을 보탰다.


 [민트풍선 : 이번에는 간식 조공할 때 꼭 도와드릴게요!]

 [민트풍선 : 아니 도와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민트풍선 : 제발]

 [루리 : wwwwwwwwwwwwwww민풍님 조공 핑계로 오이카와 보려구wwwwwwwwwww]

 [민트풍선 : 저번에 진짜 회사 엎어버릴 뻔 했잖아요(இдஇ; ) 개인적으루 촬영장 갈까말까 진짜 고민하다가 안 갔는데(இдஇ; )]

 [루리 : 님 솔직히 말해요 그것도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잖아요]

 [민트풍선 : 들킴ㅎ]


 몰텐님은 이번에 오실 거죠? 그러고 보니 사인회에서도 팬미팅에서도 몰텐님은 한 번도 뵌 적 없네요. 맞아, 게다가 이제 간부가 될 정도로 해비팬이신데 왜 안 오셨어요? 남팬인거 쪽팔려서 그래요? 엑 근데 정모엔 오셨잖아요? 바쁘신가? 아니면 티켓팅이 꽝인가. 그럼 이번 조공은 좀 도와주세요... 저희가 다른 건 몰라도 오이카와는 보여드릴 수 있어요.. 솔직히 남자 한 명 있어줘야 저희도 힘 좀 덜죠ㅠ. 간식 50인분이 얼마나 무거운데. 맞아요. 게다가 실제로 몰텐님 뵀을 때에도 굉장히 힘 잘 쓰셨구. 저희 생선 사러 갔을 때에도 짐 대부분 몰텐님이 들어주시더라고요. 저희는 부탁도 안했는데! 매너 좋으셔서 ㄹㅇ 반할 뻔 했어요. 게다가 짐도 되게 많았는데 힘든 기색 거의 없으셨고.


 다시 한 번 따르게 올라오는 제 이야기에 이와이즈미는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짧게 망설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을 못했던 탓이다. 낯 뜨거운 칭찬에도 대답 않던 그는 결국 가장 첫 질문에 대한 답만을 간략하게 썼다.


 [몰텐 : 만약 시간 되면 도와드릴게요.]

 [꽃길만걸어 : 헉 정말이죠? 약속이에요!!]

 [몰텐 : 그런데 회사 때문에 평일은 무리]

 [몰텐 : 일거에요]

 [우유빵 : ㅠㅠㅠㅠㅠㅠㅠㅠ]


 죄송하다는 투의 문장을 몇 마디 더 쓴 후에야 이와이즈미는 다른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채팅창을 빠져나왔다. 맥주캔을 완전히 비운다. 썼다.


 만약 시간이 되더라도 가지는 않을 터다. 오이카와를 만날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비겁하지만 그렇다. 아직 저는 오이카와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기억하느냐에 대한 여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이와이즈미는 허망하게 배구를 그만두고,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진 채 만인의 앞에 서게 된 오이카와를 향해 괜찮아?” 라던가, “잘 지냈냐?” 라고 물을 자신이 없었다.


 비록 오이카와가 카메라 앞에서 그러하듯 활짝 갠 얼굴로, “물론이지.” 대답하더라도 저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아차리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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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올해 생일 선물.”

 “? 이게 전부 다요?”


 오이카와는 멍멍한 얼굴로 소속사 창고 안을 바라보았다. 보통은 청소 용구나 보관해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어, 그 역시 처음 문 열어보는 칸이었다. 낡은 백열전구가 깜빡깜빡 거리며 마치 사이키마냥 빛을 내리면 그 아래로 마치 산 마냥 선물들이 쌓여있다. 단언컨대 한창 교내에서 인기를 누렸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저런 양은 받지 못했다. 양 팔은커녕 밴 트렁크와 뒷좌석에 꾹꾹 눌러 담아도 2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할 정도다. 그는 새삼스럽게 제 팔뚝을 문질렀다. 분명 작년에도 팬들로부터 선물을 받긴 했지만, 저 정도는 결코 아니었는데. 인기가 생겼다는 것이 몹시 기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하긴, 이제는 맨 얼굴로 밖을 돌아다니기도 힘들 지경이긴 하지.


 “네 팬카페나 팬사이트가 워낙 여기저기 있으니까, 각 팬사이트마다 다 돈 모아서 너한테 보내준 거야. 당연히 개인이 보내 준 선물들도 있고.”

 “진짜 고마운데, .”


 오이카와가 창고의 중심부에 자리한, 그 포장된 크기나 모양을 모아 가전제품이 틀림없을 가장 커다란 박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건 너무 비싸지 않아요? 호의를 받는 행위에는 무척 익숙한 저라도 교복을 입은 아이가 저가 마련하기엔 썩 비싼 선물을 건네던가, 지나치게 값이 나가는 선물을 줄 때에는 미약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곤 했다. 매니저가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받은 건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개인이 보내는 선물이 아니라, 여러 팬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서 준 선물이니까. 그 말에는 또 나름대로 수긍이 가는 것이다. 오이카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전부 받을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물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저것들을 전부 제 집으로 옮기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 그는 먼저 음식을 비롯해 부피가 작아 보이는 종류의 선물부터 옮기기로 했다. 매니저와 지난달에 새로 들어온 코디가 많이 도와주었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도 눈에 띄는 명품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가방 몇 개와 와인 냉장고를 제외하고는 전부 옮길 수 있었다.


 “저 냉장고는?”

 “일단 저걸 둘 자리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차라리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건 어때?”

 “아직 계약도 안 끝났거든요.”


 꽉 채운 트렁크 문을 닫으며 오이카와가 샐쭉 웃었다. 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매니저가 운전해준 차를 타고, 또 그의 도움을 받아 짐을 다 옮기고 나서야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 그래. 오이카와. ? 이거. 비로소 가벼워진 손에 숨을 돌리려던 것도 잠시, 그는 저가 좋아하는 베이커리의 봉투를 또 받아야만 했다. 사내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뭐에요? 아잇치 형 주제에 선물?!”

 “죽는다.”


 주먹을 치켜 올리며 위협하는 모양이 썩 익숙하다. 오이카와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하다. 어쩐지 이 안에 든 것이 우유빵 같다. 팬이 준 선물도 반갑고 기쁘지만, 아무래도 익숙한 사람이 주는 선물이 더 생생하게 감동적이긴 했다.


 “그래도 생일 어제였으니까, 줄지는 몰랐죠. 오이카와 씨 완전 감동!”

 “감동 같은 소리 하네. 그러니까 오늘은 허튼 짓 말고 올라가서 쉬어. 내일 2시에 데리러 온다.”


 오이카와가 오케이 사인을 그렸다. 그는 매니저가 떠나는 모양을 보고서야 맨션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슬쩍 열어본 봉투는 역시 우유빵이다. 이제 열도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는 빙긋 웃었다.


 올 생일은 조촐하게 보냈다. 기실 밤늦도록 촬영이 이어졌던 터라, 생일이라는 사실에 계속 신경 쓸 틈도 없었다. 간간히 도착하는 생일 축하 메시지라던가, 단독 씬의 촬영 도중 깜짝 등장한 케이크가 아니었더라면 완전히 잊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독일로 떠난 그 해부터 제 생일을 크게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특별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특별해지지 못했으니까. 자신을 누구보다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단 한 명이 없기 때문에. 올해도 이와이즈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른쪽에 심장이 없어 외로운 날이었다.


 대충 샤워를 마친 후 매니저인 쿠도 아이치가 준 우유빵을 입에 문 채 포장지 까기에 돌입했다. 피로가 쌓였지만 할 수 있는 한 포장을 끄르고 잘 예정이었다. 선물들도 참 여러 종류였는데, 다들 배송 기간 따위를 고려해 일부러 케이크 보다는 쿠키 따위의 제과를 보내주었다. 우유빵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한 달 내내 먹을 수 있겠다. 그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들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이어 책부터, 티셔츠, 신발, 악세사리나 사소한 장식품, 제 얼굴을 그린 액자 따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꼭 집 안에 걸어두어야지, 다짐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도 있었고 장난스러운 장난감이나 무늬가 그려져 있어 폭소가 터진 것도 있었다. 조금 값비싼 물품이 보일 때면 기쁘면서도 염려스럽기도 했다. 잘 쓸 것 같지는 않은데, 버릴 순 없으니 다시 곱게 상자에 넣어 구석에 밀어두었다.


 대본을 볼 때 사용하라는 듯 선물해준 안경은 굉장히 제 취향이었다. 한 번 써봤는데, 약하게 들어간 도수가 딱 제게 적절했다. 내가 도수를 알린 적이 있던가? 무언가 조금 찝찝하기도 했지만, 극성팬들이라면 제가 종종 들르는 안경점을 알 수도 있었다. 그는 흔쾌히 선물을 받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선물을 준 팬사이트, 제 팬사이트 중 가장 큰 곳으로 알고 있다. 종종 주는 선물이나 간식들도 놀라울 정도로 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 선물 역시 내심 기대하며 그는 같은 디자인으로 포장된 상자 하나를 풀었다. 제 손바닥보다 조금 더 길쭉한 크기였다. 무게를 감안하면, 악세사리 쯤 되려나? 반지는 영 익숙해지질 않아 별로인데. 이제는 맹랑한 생각까지 하며 검은색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내용물은 그의 예상대로 악세사리였다. 정확하게는 목걸이다. 그것도 몹시 단조로운 디자인이었는데, 가느다란 목걸이 줄에 직선 무늬가 하나 죽 그어진 것이 전부였다. 심심하다 보아도 무방했다. . 오이카와는 목걸이를 들어 제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불빛에 반사되어 직선의 가장자리가 반짝반짝 거린다. 지나치게 단조로운 가로줄이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제 취향도 아니고, 딱히 저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디자인도 아닌데 마음이 술렁거렸다. 가로줄. 그 한 획의 선()이 문제였다.


 “, 정말.”


 겨우 생일도 지났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 떠올리게 하기는. 그는 불투명한 누군가를 향해 투덜거렸다. 얼굴 한 번, 연락 한 번 없는 주제에 어떻게 매일 제 의식에서 숨 쉴 수 있냐고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오이카와는 머뭇거리다가 목걸이를 착용해보았다. 줄 길이가 딱 적당했다.


 나쁘진 않네. 거울을 보여 요리조리 재어보았다. 그때마다 금색의 선이 입체적으로 제 윤곽을 드러냈다. 애초에 무난한 디자인이기도 하고, 제 얼굴이 받쳐주니 잘 어울렸다. , 그래. 찍어서 인스타그램에나 올릴까. 그는 선물 받은 셔츠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걸친 뒤 미남이라는 단어가 정직하게 새겨진 모자를 쓰고, 아까 전 안경마저 착용한 후 핸드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개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 보았다. , 전부 다 잘난 얼굴이라 고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사진)


모두들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오이카와씨 완전 감동했어~

#너희들이최고야 #완전센스쟁이들#어제까지촬영해서피곤해흑흑

#하지만다크서클이있어도멋쟁이오이카와씨다! #오이카와씨인스타


 

 글을 올리자, 놀랄 정도로 피로가 몰려들어왔다. 아무래도 남은 선물은 내일 풀어보아야겠다. 그는 모자와 안경을 벗은 뒤 셔츠까지 벗어 다시 곱게 갰다. 목걸이도 벗어야 할 텐데. 그는 가운데의 짧은 한 줄을 조심스럽게 매만진다. 어쩐지 벗고 싶지 않았다. 고작해야 팬이 선물한 목걸이인데.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쨩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들고 다닌다면 조금은 그가 제 가까이에 있다고 위로할 수 있을 테니까.


 오이카와는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뉘였다. 느리게 눈을 내리감는다. 결국 목걸이는 빼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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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이즈미는 꿀 같은 휴일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번화가로 끌려왔다. 어설프게 신경 쓴 옷차림이 몹시도 어색하다. 약속 장소인 하치 동상 아래에서 핸드폰만 만지며 약속 상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내 서너 명의 여인네들과 눈이 마주친다. 누구는 일을 하다 나온 것처럼 정장 차림에 피곤한 기색이었고, 누구는 하이힐까지 신은 채 화려하게 차려 입었으며 또 누구는 이와이즈미보다 서넛은 족히 어려 보였다. 전혀 접점 없는 것 같은 세 사람 중 둘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예상대로 이미 면식 있는 여자 한 명이 손을 올려 붕붕 저어보였다.


 “저기 있네요. ‘몰텐’님!”

 “…네.”


 제 진짜 이름도 아닌 것이 사람들 잔뜩 모인 곳에 울려 퍼지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심지어 호칭도 ‘씨’가 아니라 ‘님’이라니. 도대체 저 여자는 쪽이란 것을 모르는 걸까. 온라인 지인과의 만남은 본디 이렇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데도 차라리 본명을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이와이즈미는 닉네임을 크게 외치며 다가온 그녀들을 향해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냥 이와이즈미라고 불러요.”

 “어머, 몰텐님의 본명인가요? 이렇게 막 알려주셔도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그냥 불러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녀들은 왜 이와이즈미가 본명까지 알려주며 강조하는지 짐작하기 때문이리라. 하긴, 그는 외견상으로 보았을 때 오프라인 모임에 전혀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이와이즈미가 자신과 함께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생긴 것도, 심지어 말투마저 전형적인 운동부 사내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돌을 좋아할지언정 남자 배우의 팬사이트에 가입을 할 정도로 팬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지…. 닉네임 ‘꽃길만걸어’, 흔히 꽃님이라고 불리는 오이카와 대표 팬사이트의 간부 하나가 수줍게 웃었다.


 “그럼 이와이즈미 씨라고 부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 맞다. 그리고 이 분은 처음 보시죠? 저희 서포터 중 한 분인 ‘우유빵’님이세요. 우유님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저번에는 개인사정 때문에 못 오셨거든요. 그리고 이쪽은 저희 팬사이트의 드문! 오이카와 남팬인 몰텐님!”

 “안녕하세요, 우유빵이에요. 다른 분들에 비해 어려서, 편하게 말씀해주셔도 괜찮아요. 다른 언니들도 모두 제게 말 놓거든요.”

 “아, 네.”


 이와이즈미는 곧잘 웃는 우유빵을 향해, 아니, 우유님을 향해 겨우 자기소개를 했다. 몰텐이라고, 합니다. 제 스스로 이름 꺼내는 폼이 영 어색해 보인다. 그래도 배구공 브랜드를 따온 게 망정이지, 만약 저 분처럼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음식이랍시고 우유빵이라고 지었다면…. 끔찍했다. 만약 이와쨩이라고 지었다면 이와쨩님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몰, 아니, 이와이즈미 씨는 그냥 일반회원이긴 한데, 지난번 교류회에서도 되게 잘 도와주셨고 무엇보다 센스가 좋으셔서 오늘 특별히 제가 부탁했어요.”

 “아니, 센스가 좋다기보다는 이상하게 오이카와의 취향에 들어맞는 느낌이지만….”

 “맞아, 맞아.”


 꽤 친한 두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이와이즈미는 그녀가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랬다. 이와이즈미가 때 아닌 여자들과 무려 삼대 일로 만나게 된 이유는 오이카와 때문이었다. 멍청카와를 못 만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저를 괴롭히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까지가 단순한 걱정과 그리움 때문이었다면, 최근에는 조금 다른 이유들이었다.


 오늘은 바로 한 달 뒤가 오이카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팬사이트에서는 항상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사이트 내에서 자금을 모아 오이카와를 서포트하곤 했다. 사실 이와이즈미가 보기엔 수시로 했다. 새로 드라마를 찍으면 드라마를 찍는다고 밥차를 보내고, 시청률이 어느 정도 되면 또 어느 정도를 넘겼다고 간식거리를 보낸다. 혹시라도 저희 팬을 언급하면 언급했다고 인터뷰날 단체 티라도 돌리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겨서 오이카와와 그 주변 스탭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이카와를 챙겨주고 싶어서 무슨 일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개 중에서도 ‘생일’은 무려 일 년에 한 번 밖에 없는, 그것도 그들의 정신적 지주 혹은 남편과 다름없는 배우 오이카와 토오루가 태어난 날이었다. 당연히 팬사이트에서는 생일 석 달 전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와이즈미도 어느 정도의 금액은 보냈다. (사실 그는 항상 돈을 보탰다.) 그리하여 오늘은 투표와 간부 회의로 추린 선물 목록을 드디어 구매하는 날이었다. 사실 인터넷에서 주문을 넣으면 훨씬 편할 텐데, 이 사람들은 ‘내 배우에게 보내는 선물은 내 눈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어코 직접 거리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어색하게 낀 채 세 여자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선물 목록과 미리 알아둔 브랜드들, 그리고 백화점이며 브랜드점의 위치를 체크하며 동선을 짠다. 일단 목록 중 가장 많은 브랜드가 입점한 백화점에 향하기로 결정 나자 과감하게 걷는다. 사실상 저들의 쇼핑에 얼결에 낀 것과 다름없어 그는 따라다니기만 했다.


 그녀들이 이와이즈미를 센스, 라고 칭하는 안목을 신뢰하게 된 것은 약 네 달 전, 오이카와가 연말 방송사 시상식에서 신인 남자배우 상과 최우수 조연상 2관왕을 수상한 기념으로 선물 투하, 즉 ‘조공’이란 것을 보낼 때였다. 회원만이 볼 수 있는 사이트 내에서 선물에 대한 추천이며 투표가 진행 중이었는데, 사실 이와이즈미는 투표 후 댓글로 별 생각 없이 언젠가 오이카와가 지나가며 오래 눈에 담은 신발 하나를 언급했을 뿐이었다. 그의 댓글은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고, 산발적으로 올라오는 추천 목록들에 조용히 묻혔다. 하지만 조공을 보낼 적, 정한 물품을 모두 구매하고 포장까지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금액이 남자 운영진은 고민 끝에 댓글 중 몇 개를 뽑아 함께 보내기로 했고, 개 중 이와이즈미의 의견이 뽑혔다. 우연과 우연이 거듭한 산물이었다. 그런데 막상 조공을 보내고 나자, 운영진이 고심들여 결정한 선물들과 다수 팬들의 투표로 뽑힌 목록을 전부 제치고 이와이즈미가 덧글로 무심코 달았던 신발이 오이카와의 분신이라 일컫어질 정도로 ‘최애 신발’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이카와가 애용한다는 브랜드도 아니었고, 그가 방송에서 자주 보이던 디자인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좋아하는 색도 아니었는데!


 이후로 비슷한 투표가 올라올 때마다 간부들은 묘하게 닉네임 ‘몰텐’의 댓글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 않을 때도 있었지만, 제 의견 하나씩 말할 때도 잦았다. 마들렌보다는 그냥 라즈베리 박힌 쿠키가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에도 오이카와는 페이스북으로 간식 잘 먹었다며, 특히 라즈베리 쿠키가 취향이었노라 첨언을 남겼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말투는 무심했고, 딱히 제 의견이 뽑히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추천하는 것들은 묘하게 구체적이었고, 놀랍게도 죄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취향에 직격했다. 운영자는 이와이즈미를 처음 만났을 때, 사실 오이카와 본인인 줄 알았다고 웃었을 정도였다. 이후로 간부들은 언제부턴가 조공이나 서포트를 할 때만 되면 이와이즈미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오늘처럼.


 이와이즈미의 의견이 별로 필요 없을, 이번에 새로 나왔다는 아이패드를 구매하고는 투표로 뽑은 물품들을 살폈다. 옷 차려입을 일이 별로 없었던 터라 최근 행사를 다닐 때 입을 정장이 없다던 인터뷰를 보고 정한 유명 브랜드의 쓰리피스 정장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들이 브랜드를 고르고 디테일은 이와이즈미가 껴서 정했다. 사실 그 역시 오이카와의 취향을 고려했다기 보다, 저가 보기에 어울릴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과 과거를 더듬어 의견을 내민 것이다. 그래도 옷 사이즈만은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다. 그는 이 정도의 디테일은 팬사이트에도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꽃님에게 남자라서 대충 알 수 있다는 변명으로 넘겼다.


 이어 언젠가 인터넷으로 돌아다니는, 안경을 쓴 채 대본을 읽는 사진을 보고 투표에 올려 뽑힌 안경, 차, 청바지와 향수, 앨범, 그리고 책 따위를 골랐다. 차는 오이카와는 절대 차 따윌 챙겨 마실 녀석이 아니라는, 묘하게 단정적인 이와이즈미의 의견을 받아 최대한 간단하고 편리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변경했다. 마찬가지로 책 역시 유명한 고전이나 자기계발서 따위를 추천하던 여자들과 달리 스포츠나 판타지 계열의, 남성향 만화를 사는 게 좋겠다는 이와이즈미의 주장을 받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꽤 오랫동안 공방이 오갔지만, 그 역시 꽤 강경했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땅 같다 해도 배우 오이카와는 결국 그가 알던 오이카와 토오루다. 운동을 좋아하고, 1984따위를 읽으며 현대 문명에 경각심을 가지기 보다는 원피스를 보며 낄낄거리길 좋아하던 사내놈인 것이다. 간부들은 결국 이와이즈미의 주장을 일부 납득해 자기계발서를 두어 권 넣었지만, 그는 그것들이 결국 오이카와의 책장 구석에 전시될 운명임을 직감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자잘한 포장재들과 물건들을 사기 위해 주위를 배회했다. 이와이즈미 저도 꽤 피곤했는데 하이힐을 신은 운영자 분은 발이 아프지도 않는지 잘도 돌아다녔다. 예산을 계산해보다 그들은 중간 정도 되는 액세서리 브랜드에도 들어갔다. 남성용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아, 이거 예쁘다.”

 “그냥 차라리 약지에 끼는 걸로 주는 건 어때요? 위장용으로 쓰라고.”

 “음, 아무리 오이카와가 배우라도 그건 좀 그렇고. 아, 저런 디자인은 어때요? 깔끔하고 예쁘잖아요.”


 유리 진열장에 옹기종기 보여 떠드는 사람들 뒤에서 이와이즈미는 그들이 추천하는 흐릿한 윤곽만을 응시했다. 목걸이로 할 건지, 반지로 할 건지, 만약 반지로 한다면 또 어느 손가락에 끼울 걸로 정할 건지 한참 의견이 오갔다. 애초에 오이카와는 반지 자체를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하려고 했지만 가만 생각하자니 그건 그가 배구를 할 때의 이야기 한정인 것 같아 조용히 입을 다물고 목걸이로 눈길을 돌렸다.


 “이와이즈미 씨는 이거랑 이거 중 어떤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가 보기에는 죄다 비슷한 디자인을 들이밀며 우유님이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침음을 삼키며 고민했다. 오이카와가 만약 손에 낀다면. 둘 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오른쪽이요.”


 그래도 가능한 깔끔하고 얇은 쪽이 덜 불편하게 느껴지겠지. 그의 대답에 꽃님이 외쳤다. 내 말 맞지? 이런 게 잘 어울릴 거라니까!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번에는 그들이 팬미팅에서 잡았던 오이카와의 손을 상기하며 몇 호가 그의 검지에 들어갈 지 의논하는 것을 가만 들었다. 그러다 문득 목걸이 하나에 시선이 박힌다. 그가 여태까지 제 의견 내비친 것처럼, 오이카와의 취향인 것도 아니었으며 그에게 어울릴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냥 마음에 닿았다.


 “이 사이즈면 될 것 같은데?”

 “차라리 한 치수 작은 쪽이 나을 것 같지 않아? 그러면 검지에 안 맞아도 다른 손가락에 맞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게 낫겠다.”


 사이즈를 정하고 주문을 넣는 것을 보다가 무심코 저를 바라보고 있던 점원에게 손짓했다. 이것도 24K로 저쪽 포장할 때 같이 넣어주세요. 제 말에 세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제게 몰렸다.


 “이와이즈미 씨, 뭐 사세요?”

 “저희 예산 잠시 계산해 봐야….”

 “아니, 이건 제 돈으로 살 테니까 그냥 선물 보낼 때 대충 끼워서 보내주세요.”


 네? 여자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이와이즈미 씨, 이번 조공 입금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몇 만 엔은 하는 목걸이를, 그것도 배우 생일이라고 개인이 덥석 구매하는 것이 퍽 신기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렇게 오이카와 취향으로 보였어요?”

 “오이카와 취향은 아닐 테지만,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이와이즈미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갑을 꺼냈다. 우유님이 점원이 목걸이를 꺼내 포장하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어린 그녀가 생각해도 달랑 직선 하나(一)가 있는 목걸이는 지나치게 시시해보였다.


 순식간에 값을 치룬 목걸이를 상자에 곱게 들어가는 것을 보며 팬사이트 운영자가 물었다.


 “여기 안에 문구나 편지 같은 거라도 따로 넣어드릴까요? 원래는 안 되지만, 이와이즈미 씨니까 특별히.”

 “괜찮아요.”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단정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다른 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제대로 전달이라도 되도록 원래 목록에 있던 것처럼 보내주세요. 설령 오이카와가 존재를 잊더라도 집 한 구석에 방치될 수 있도록.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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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이와이즈미의 귀에는 오이카와의 이름이 지나치게 잦다. 이번에 시작했다던 드라마가 동시간대 1위를 달리며 승승장구 중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이카와의 연기가 장난 아니라며 뭇 여사원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어제 본방 봤어요? 봤어, 봤어. 오이카와 정말 멋졌지? 내가 유카리라면, 세토 말고 이노우에를 선택할 거야. 솔직히 누가 봐도 저만 잘난 남자보다는 그런 순정파가 좋잖아? 맞아요. 게다가 잘생겼고, 돈도 많은데! 탕비실을 지나며 들리는 말에 이와이즈미의 입꼬리가 어설프게 내려간다.


 지난 밤, 이와이즈미 역시 그 드라마를 보았다. 애초에 그런 연극에는 흥미가 없어 간간히 인터뷰나 신문 기사 따위로 오이카와의 소식을 접한 게 전부였건만 어제는 퇴근 후 지나치게 할 일이 없어 텔레비전을 돌리다가 불현듯 채널이 멈춘 곳이 오이카와가 클로즈업 된 화면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생소한 이름을 달고 타인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광경이 참으로 우스워 폭소를 금치 못했더란다.


 세간에서는 오이카와의 연기가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기가 분명 극장에서 몇 년은 굴러먹은 배우일 것이다, 라던 일부의 추측이 무색하게 오이카와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혀진 바가 없다. 본디 그가 속한 기획사가 연기자의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여기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만 공인된 정보에 의하면 오이카와가 연기를 배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고작 연기 학원 몇 달 다니며 죽어라 혼자 공부한 것이 전부라는 어떤 인터뷰에서의 발언이 또 약간의 화제가 되었다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팬 중 한 명인 여자 동기에게서 전해 들었다. 하지만, 글쎄.


 이와이즈미는 단 한 번도 오이카와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도 그럴게, 그의 눈에는 오이카와가 거짓부렁을 하고 있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이다. 지나치게 가까우면 이 역시 문제가 되는 것임을 이와이즈미는 처음 알았다. 그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봐도 몰입이 불가능했다. 분명 이노우에가 부모와의 마찰로 인해 크게 다투는 심각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폭소 밖에 나오질 않았다. 저게 뛰어난 연기라고? 저렇게 과장하고 있는데?


 그러나 시야에 비치는 얼굴만은 반가웠다. 그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줄곧 채널을 바꾸지 않았던 것은 그 탓이다. 간만에 보이는 얼굴이, 비록 우스운 몰골일지라도 네 목소리가 몹시 그리웠었다. 카메라는 종종 오이카와의 얼굴을 큼직하게 잡아주기도 해서, 이와이즈미는 그의 조금은 바뀐 얼굴을 훨씬 자세히 볼 수도 있었다. 그는 얼핏 찍히는 손이나 발자국 모양에도 단숨에 누구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으므로.


 “이와이즈미. 오늘 퇴근하면 뭐해?”

 “왜?”

 “왜긴 왜겠어.”


 이거 하려고 그렇지. 잔을 들어 손목을 꺾는 시늉을 하며 영업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기, 후지와라가 씨익 웃어보였다. 그놈의 술, 지겹지도 않냐. 가벼운 타박에도 후지와라는 알콜이 바로 직장인의 힘이라며 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 왜, 시마다 데리고 가지? 이와이즈미는 여자 동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후지와라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하는 것이다.


 “시마다는 오늘 그 잘난 오이카와 나오는 드라마 때문에 안 된단다.”


 본방 사수를 해야 한다나, 뭐라나. 이와이즈미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목요일이지. 오이카와의 드라마는 주 2회 방영된다. 음, 이와이즈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그럼 나도 패스.


 “아, 왜!”

 “피곤해. 내일 마시자.”


 후지와라는 제 머리를 벅벅 긁다가 결국 알았어. 꼬리를 내렸다. 이와이즈미의 그의 등을 툭툭 치며 미안다고 가볍게 사과한다. 그가 자리에 돌아가는 것을 보곤 이와이즈미 역시 짧은 휴식을 마친다.

 

 이와이즈미가 오랜 소꿉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의 흔한 빠돌이가 되기까지 불과 일주일 남은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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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간단하게 이번에 맡은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단정하게 생긴 리포터가 웃음 지으며 마이크를 넘긴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촬영장 한 켠에 겨우 마련한 인터뷰 공간은 상당히 빈약했다. 중계 카메라 너머로는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남자는 일련의 시선을 거두며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음지었다.


 “저희 감독님의 저를 너어무 예뻐해 주셔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도 우리 예쁜 윳쨩, 그러니까 유카리쨩을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소꿉친구 역할을 맡게 되었답니다!”

 “어머, 윳쨩은 애칭인가요?”

 “네. 유카리는 윳쨩, 그리고 제가 맡고 있는 이노우에는 이놋치라고 부르고 있어요. 제가 애칭으로 부르는 걸 좋아하거든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황금시간대의 수목 드라마 주조연 자리를 꿰찬 것은 반 즈음 운이었다. 오이카와는 발랄한 어투로 리포터의 질문에 대답하며 머릿속으로 과거를 흘린.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며 울었다. 데뷔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라면 자신이 추태를 부린 장소였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제 소속사 대표님과 친분이 있는 감독의 생일 파티였다. 물론 그가 감독과의 친분은커녕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였으나, 상당히 인지도 있는 유명인이기에 신인인 저를 소속사에서 강제로 보낸 것이다.


 함께 간 소속사의 식구들이 감독에게 선물을 건네고, 그의 눈에 들어보려 갖은 애를 쓰는 사이 오이카와는 홀로 멀리 떨어져 자작했다. 비록 신인이었지만 저렇게 친분을 쌓아서 어떻게든 편의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그의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이 남자는 연예계의 생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게 실력만을 주장하고 있었다. 오래 전 배구를 했던 것에 대한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그는 술을 마셨고 결과적으로 취했다. 공교롭게도 그 때 누군가 다가와 오이카와의 옆자리에 앉았더란다. 그는 제 옆의 여자에게 술주정을 부렸다. 저기요, 이와쨩 좀 불러주세요. 매니저 아닌데요. 소꿉친구에요. 아니, 소꿉친구도 아닌데. 맞나? 이제는 모르겠어. 친구도 아닐 거야, 아마. 전화 해볼까? 번호 바뀌었으면 어쩌지. 익숙한 번호를 습관처럼 눌렀다가 그냥 닫아버렸다. 오이카와 씨, 못하겠어. 응? 아니야. 애인은 무슨. 여자도 아닌데? 걔 못 생겼어. 키도 작고. 사실 성격도 무지 나빠. 응. 아니. 그런데… 아니야. 이건 말 안 할래.


 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여자는 웃는 듯 술잔을 홀짝였고 오이카와는 제 잔 아래에서 생기는 희미한 소용돌이를 보며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 씨랑 그 녀석, 부모님이 되게 친했어. 어머니끼리 고등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대. 집도 가까워서 자주 교류했는데, 친구가 임신 시기마저 겹쳤으니 매일 붙어 다닐 만도 했겠지. 소꿉친구가 나보다 한 달 정도 더 일찍 태어났어. 그러니까, 응. 오이카와 씨는 이와쨩이 없이 살았던 때가 없구나. 징그럽다고? 에에, 전부 나보고 그런 말 하더라. 그럼 오이카와 씨가 더 징그러운 말 하나 알려줄까? 알렉산더 대왕 알지? 응, 그 대왕님의 생일이 오이카와 씨의 생일이고 대왕님의 사망일이 이와쨩의 생일이다? 어쩌면 우린 운명일지도.’


 일순간도 이와이즈미 없는 세상에서 숨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진부하지만 사실이었다. 함께, 라는 부사가 저희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들은 없으리라. 같이 배구를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파트너가 되면서 결속력은 강해졌다.


 ‘배구, 그래. 배구라는 단어도 빼 놓을 수밖에 없지. 있잖아. 오이카와 씨 원래는 배구 했었거든? 배구 없는 삶을 생각도 못 해봤을 정도로 열심히 했단 말이야. 어느 정도였냐면, 이와쨩이. 그러니까 소꿉친구가 옛날에 나한테 그랬었어. 넌 배구 없이는 못 살 놈이라고. 죽을 때까지 공만 쫓을 운명이라고. 음, 원래 운명은 이와쨩이 아니라 배구였던 걸까? 실은 둘 다 아니었지만.’


 정말로 좋아했다. 천재는 아니었지만 실력은 뛰어났다. 천재에게 뒤지기만 했지만 오이카와는 충분히 꽃피었다. 고등학교까지 이와이즈미와 함께 배구를 했다. 대학은 갈라졌지만, 여전히 배구를 손에서 뗄 순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비록 이와이즈미가 아닌 다른 에이스였지만 그는 최초로 우승했다. 대학 리그였다. 그 공의 반이 오이카와의 몫이었다는 건 팀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관객석에 있었다. 그는 마치 제가 우승한 것처럼 오이카와의 우승을 축하해주었다. 뭐야, 오이카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라면 가능할 줄 알았어. 오이카와는 삐걱이는 무릎마저 잊고 마주 웃었더란다.


 ‘데드 플러그였던 셈이지. 사실은 대회 기간 중에도 가끔 무릎이 쿡쿡 쑤셨거든. 그런데 그야, 옛날부터 오버워크 할 때면 경험하곤 했고. 당연히 그 때에도 그러려니 했는데, 우승 이후 연습 중에 말이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무릎이 아픈 거야. 그만 붙잡고 주저앉았어. 그 날 병원 갔는데, 뭐라고 했더라. 더 이상 배구는 무리일 것 같다고. 응.’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눈가가 처연하게 내려앉는다. 마땅한 부상이었다. 처음 배구를 시작할 적부터 스파이크 서브만을 연습했다. TV너머로 3연속 서비스 에이스를 얻어내던 한 선수의 모습이 너무 멋져서. 몸이 굳어지기 전부터 점프 서브만을 연습한 것으로도 모자라 꾸준히 있어오던 신호마저 무시해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선수로서의 종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꼭 배구를 하고 싶다고 이 악물고 부탁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의사는 말했다. 독일에 유능한 정형의가 하나 있는데, 비용도 시간도 확률도 장담할 수 없다고. 다만 그 확률에 기대고 싶을 정도로 진심이라면, 연결시켜줄 수 있다고. 그래서 독일로 갔다.


 ‘사실 친구들에게 연락 안하고 그냥 확 가버렸거든, 나. 그도 그럴게, 수술하고 재활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잖아? 그럼, 짜잔! 모두의 아이돌, 오이카와 씨 부활! 보고 싶었지? 라며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단 말이야. 이와쨩은, 뭐. 한 대 때릴지도 모르지만. 정말 독일로 가면 나을 거란 생각 밖에 없어서, 부상이라며 괜히 투정부리고 슬픈 척 할 가치도 못 느꼈거든.’


 그러나 생각은 그저 꿈으로 남고, 오이카와는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어느 정도 뛰는 것은 가능했지만 배구선수를 직업 삼기에는 무리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아, 그 무력감. 2년이 공중으로 날아간다. 오이카와는 외국어가 쏟아지는 거리 가운데에서 망연히 서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배구에 대한 상실감이 지나치게 컸는데,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이 이와이즈미 밖에 없었다. 태초부터 그에게 있을 거라 확신한 것들이 배구와 이와이즈미 둘 뿐이었던 것이다. 헌데 왜 하나를 상실한 지금은 남은 하나마저 보이질 않는지.


 오이카와는 일본 국가번호 두 자리만을 누른 채 멈췄다. 혹시 전화를 걸었는데, 낯선 사람이 누구세요,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와이즈미가 너무너무 화가 나서 날 보려 조차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왕왕거렸다. 결국 지금까지도 오이카와는 그에게 차마 연락 걸지 못했다. 오이카와 씬 정말 이와쨩에게 미움 받기 싫단 말이야.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로.


 ‘그쪽 이름이 오이카와 토오루, 맞죠? 얼마 전 뮤직비디오로 한참 화제 된 배우신거죠?’

 ‘선수.’

 ‘네?’

 ‘…진짜 되고 싶었는데.’


 쿵. 그리고 암전. 깨어났을 때 오이카와는 집이었다. 사흘 후 소속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저에게 이번 드라마의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고. 감독이 오이카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으니 꼭 부탁드린다고. 알고 보니 그 파티에서 만난 여자가 이번 드라마의 메인 작가였다고 한다. 우스운 인연이다. 시놉시스를 읽은 오이카와는 제 처지를 연상시키는 남자를 보고는 수락했다.


 “벌써부터 오이카와 씨 연기가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던 걸요?”

 “와, 누가 퍼트렸대요? 방영 시작하면 난 이제 큰일 났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 얼굴이 피로했다. 오이카와는 남몰래 눈을 진하게 깜박였다. 드라마 방영이 다가오면서 촬영은 더욱 촉박해지고 그 탓에 최근에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촬영장에 있어야만 했다. 벤에서 쪽잠을 자는 하루의 연속이라 몸도 뻐근하다. 하지만 연예인은 그런 걸 내색해선 안 되는 직업이라던가. 옛날부터 웃는 모양에는 도가 터서 다행이었다. 그는 입매를 조금 더 휘었다.


 “데뷔 때부터 연기력으로 화제를 모았으니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아닐까요?”


 은근히 저를 띄어주는 리포터에게 이 말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 겸양을 떨곤, 다시 인터뷰를 진행한다. 주로 드라마의 줄거리나 이노우에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노우에는 원래 음악을 정말 하고 싶었지만, 회사를 이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쳐 어쩔 수 없이 음악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재벌 2세였다. 초등학교 동창인 소꿉친구 여주인공을 어릴 적부터 짝사랑하고 있어 묵묵히 그녀의 옆을 지키는 순정적인 남자기도 했다.


 “사실은 이노우에에게 정이 많이 가요. 조금 저랑 닮았거든요.”


 오이카와는 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 떠올랐다. 사랑인지 의존인지 강박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자 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강제로 배구를 그만두게 되고 사계절을 헛돌았다. 대학은 자퇴했다. 체육특기자로 추천 입학한 것이기 때문에 배구를 못하게 된 지금은 돌아갈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지?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악쓴 재활치료 덕분에 선수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취미로 공을 조금 만질 수 있게 될 즈음, 불현듯 과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있잖아. 만약 오이카와 씨가 배구 말고 다른 것을 한다면, 뭐가 좋을 것 같아?’

 ‘왜,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연예인이라던가, 아이돌이라던가. 지금 얼굴 보는 것도 징글징글한데, 정말 텔레비전에서까지 네 놈 얼굴 보게 된다면 답이 없겠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나가던 농담이었다. 그 때의 상황도, 당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하나도 기억에 없지만 그의 대답만은, 호흡의 간격마저 똑똑히 기억났다. 응, 그럼 연예인이 되자. 오이카와는 단순히 그 한 문장을 상기하곤 결론지었다. 단지 이와이즈미가 ‘그럴 것 같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당위는 충분했다.


 대중매체는 훌륭한 연락책이다. 비록 그에게 이와쨩, 나 이제 더 이상 배구 못한대. 라며 울 수는 없겠지만 오이카와 씨는 그럭저럭 잘 먹고 살고 있다고 웃는 얼굴을 보여줄 정도는 되었다. 네가 남아있어 생을 버텼다는 고백은 죽을 때까지 못하겠지만 어느 먼 미래에 지금은 연락이 끊긴 소꿉친구가 있었다, 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기어코 너를 끊어낼 수가 없어 나오는 이기. 나를 보고 들으며 절대 네가 날 잊지 않길 바라는 비겁. 오이카와는 카메라를 보며 웃는다. 다행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을 이와이즈미에게 건넬 수 있다. 의지에 관계없이 그는 전부 받을 것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정물이 되리다.


 우리의 이별은 아직 먼 일이다. 비록 일방향일지라도 오이카와는 그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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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간단하게 이번에 맡은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식당의 왁자지껄한 소음에서부터 테이블 몇 개 떨어진 텔레비전에서부터 소리가 새어나온다. 다음 주부터 새로 방영할 드라마의 홍보 인터뷰였다. 리포터가 상당히 잘생긴 남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빙글거리는 웃음을 짓는다.


 “저희 감독님의 저를 너어무 예뻐해 주셔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도 우리 예쁜 윳쨩, 그러니까 유카리쨩을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소꿉친구 역할을 맡게 되었답니다!”

 “어머, 윳쨩은 애칭인가요?”

 “네. 유카리는 윳쨩, 그리고 제가 맡고 있는 이노우에는 이놋치라고 부르고 있어요. 제가 애칭으로 부르는 걸 좋아하거든요.”


 “아. 저 드라마, 시청률 벌써부터 기대된다고 말 나오던데.”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했다. 입사 동기라서 친구처럼 지내오고 있는 이였다. 그래? 딱히 관심이 없어서. 이와이즈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근처에 앉아있던 동기가 휴대용 거울로 입가를 확인하며 대화를 잇는다.


 “이와이즈미 군이 드라마에 관심 있을 리가 없지. 난 저 드라마, 꼭 본방사수 할 거야. 무려 오이카와 토오루가 주조연이라고!”

 “신인인데 너무 기대하는 거 아냐?”

 “연기 꽤 괜찮던데? 무엇보다 잘생겼으니까 괜찮아.”


 대화는 제대로 고막에 닿지 못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깜박인다. 저 멀리 화소로 이루어진 남자가 말갛게 웃고 있다. 지나치게 익숙한 사람이라, 도리어 화면 안에 갇힌 모습이 낯설다.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먼 옛날이었다. 구기대회에서 이와이즈미의 활약으로 그의 반이 우승한 날이기도 했다. 우승 기념으로 반 아이들이 모두 온갖 종류의 매점 과자들이 든 컴퓨터 본체만한 크기의 과자 상자를 받았었다.


 ‘이와쨩은 배구 말고, 야구해도 충분히 장래가 유망할 것 같다. 코시엔에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프로가 되었을지도.’


 마땅히 이와이즈미 몫의 부상은 배구부 전체의 것이 되었다. 하나마키와 오이카와가 득달같이 달려와 강제로 개봉한 상자를 함께 나눠먹으며 오이카와가 가볍게 말했다. 확실히, 이와이즈미 선배가 쿄타니의 공을 장타로 날려버리는 모습은 대단했죠. 옆에서 와타리가 고개를 주억이며 봉지를 뒤적였고, 우스갯소리와 함께 오이카와는 넌지시 물었다.


 ‘그럼 있잖아. 만약 오이카와 씨가 배구 말고 다른 것을 한다면, 뭐가 좋을 것 같아?’


 배구 말고? 말고. 이와이즈미를 포함해 후배들이 각자 생각에 빠진 가운데, 오이카와의 바로 옆에 있던 마츠카와는 포키를 먹으며 심드렁하니 말했다.


 ‘넌 얼굴로 먹고 살 것 같은데.’

 ‘호스트라던가.’


 하나마키가 덧붙였다. 에엑. 기대 이하의 발언에 오이카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오이카와 씨 미모가 부러워서 질투하는 거야? 괜히 징징거리는 것에 마츠카와는 또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넌 배구 말고 잘 하는 거 없잖아. 뭐야, 질투가 아니라 무시였어?! 그 과장스러운 반응에 신이 난 후배들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호스트, 어울릴 것 같긴 해요. 확실히 오이카와 선배,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자들에게 인기는 많으니까…. 하나마키도 질세라 맞장구친다. 그렇지. 당당하게 돈 뜯어먹고 살 놈이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오이카와는 울상이 된다. 기실 그 대화가 오이카와를 놀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유일한 희망인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까지 제 턱만 매만지며 침묵하고 있는 소꿉친구를. 이와쨩, 이와쨩은 어떻게 생각해?


 ‘어, 그럴 것 같네.’

 ‘뭐? 이와쨩은 소꿉친구가 제비가 되는 게 좋은 거야?!’


 이와쨩도 내가 뒷세계 큰 손의 정부를 꼬셔서 이것저것 얻어먹다가 그 큰 손에게 걸려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 같아?! 그 잠깐 사이 이 녀석들은 무슨 소설을 지어내고 있었던 거야. 이와이즈미는 억울하게 외치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넌 얼굴값 할 것 같다고. 왜,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연예인이라던가, 아이돌이라던가.’


 지금 얼굴 보는 것도 징글징글한데, 정말 텔레비전에서까지 네 놈 얼굴 보게 된다면 답이 없겠지만.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우마이봉을 뜯었다. 오이카와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활짝 웃었더란다. 만약 오이카와 씨가 연예인 하게 되면, 이와쨩은 평생 내 얼굴만 보게 되겠네?


 이와이즈미는 본능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어느 동네 고문이냐. 텔레비전 끊을 거야. 너무해! 아, 그런데 솔직히 이와이즈미는 좀 징그럽긴 하겠다. 맛층까지?! 생각해봐. 너네 둘이서 실컷 놀다가 다음에 보자. 안녕, 하고 헤어졌는데 집에서 또 오이카와가 보이는 거야. 그거 완전 고문이지. 이제 좀 벗어나나 싶었는데 또 네 놈에게 시달릴 테니까. 저기, 지금 주장 씨 취급 너무하지 않나요?


 아, 어떻게 네가 있던 풍경은 이토록 세밀하게 남아있는지….


 “벌써부터 오이카와 씨 연기가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던 걸요?”

 “와, 누가 퍼트렸대요? 방영 시작하면 난 이제 큰일 났다.”


 이와이즈미는 하염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오래 전, 급작스레 소식 끊긴 남자의 얼굴이다. 왜 소식이 끊겼는지는 모른다. 다만 네가 배구를 그만두었다는 소문만이 도쿄서부터 미야기까지 퍼져왔다. 이와이즈미는 대학교 3학년 이후 오이카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니다. 없었다.


 일방적인 재회는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퇴근 후 소파에 너부러져 아무렇게나 리모컨을 돌리는데, 오이카와가 보였다. 그는 거짓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잊을 리 없는 목소리가 전파 너머로 진동했다. 실제로 듣던 것과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었다. 머리카락은 흑색이었지만 눈동자 빛은 여전했다. 예전보다 말라 도드라진 턱선. 근육은 일부가 죽었다. 낡은 편자가 흑백의 사막에 자국을 남긴다.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자신이 모르는 오이카와를 응시했다. 몇 년이었다. 화면 너머의 남자는 꽤 자연스럽게 전혀 모르는 역할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이와이즈미는 남자의 본질을 지나치게 꿰뚫고 있던 터라 본의 아니게 그 균열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랬다. 그는 오이카와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니었다. 정정한다. 아니다. 그 단편 하나에 잠시 숨 죽였던 감정이 풍선처럼 떠올랐으니.


 그는 직감했다. 자신은 평생 오이카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한 번 그를 발견하자 이후로는 매일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석자였다. 한참 주목을 받고 있는 신인은 텔레비전이며 사람들의 입이며 잡지며 모든 매체에 도사리고 있었다. 귀를 막으면 네가 보였다.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던 오이카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슬슬 일어서죠.”

 “아, 일하기 싫다. 야마모토 대리님 오늘 기분 안 좋아서 너무 눈치 보여. 옆자리에 있는데, 으.”


 동기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와이즈미도 그들을 따라 정장 마이를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저 먼 세계에 있는 오이카와는 웃고 있다. 사실은 엄청 피곤한 주제에 잘도 웃는다. 평소보다 올라간 입매의 의미를 당연하게 읽어낸다. 한 동기가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이와이즈미, 왜 TV에서 시선을 못 떼냐. 너, 뭐 오이카와의 팬 그런 거야?”


 짜증나게 생겼는데, 무슨.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계산대로 향했다. 사실은 이노우에에게 정이 많이 가요. 조금 저랑 닮았거든요. 뒤로는 너의 목소리. 그래도 오늘도 이렇게 살아 있구나. 이와이즈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흰 당나귀가 푹푹 나리는 눈을 밟는다. 다행이었다. 눈을 가려도 네가 들린다.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던 오이카와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의 이별은 아직 먼 일이다. 비록 일방향일지라도 이와이즈미는 그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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