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하루, 감독 우시지마는 차분하게 학생들의 실력을 지켜보았다. 큼직한 체구에 위명까지 더해져 압박을 느낄 법 한데도, 학생들은 피하기는커녕 새로운 감독에게 달려들었다. 미야비는 이러한 풍경에 팬미팅라는 단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우시지마는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었다. 아이들을 싫어하고 냉정한 인상인 줄로 알았는데. 가끔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그가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했다. 미야비 역시 앞으로의 1년을 기대하며 3학년 첫 부활동을 끝냈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다 떨어졌던 계란을 사고, 할인 중인 품목 몇 개를 사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습관인 인사는 허공만 한 바퀴 머물다 돌아온다. 깜깜한 집 안은 누구도 오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익숙한 일이라, 그녀는 능숙하게 불을 켜고 짐을 놓은 후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밥솥의 뚜껑을 열 때다. 미야비의 예상을 깨고 현관의 문이 덜컹 열렸다.
“어?”
“응? 미야비쨩, 언제 온 거야?”
누가 할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떨떠름한 낯으로 제 핏줄을 마중했다.
“그러는 토오루야 말로 언제 온 거야?”
“아까 저녁에.”
냉장고가 비어있어서 방금 밖에서 사 먹고 왔어. 한 사내가 그리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제 자식 내버려두고 홀로 끼니를 때웠다는 말은 지나치게 매정했으나 고작 저런 사소한 문장으로 서운해지기엔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랜 세월을 보냈다. 애초에 미야비 역시 그가 오늘 집에 도착한 줄도 몰랐으니 셈을 따지면 피장파장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마저 제 몫의 식사를 차렸다.
“이제 먹는 거야?”
“부활동하고 왔으니까.”
“아…. 벌써 개학할 때가 됐나?”
“지난주에 했어.”
미간을 잠깐 찌푸리던 남자는, 이내 경쾌한 어조로 “시간 빠르네.” 덧붙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무정은 도처에 있었다. 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일별한 미야비는 덧붙이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몇 분 간 식탁 위 정갈한 찬을 보던 남자가 물었다.
“혹시 이와쨩이 다녀갔어?”
“응, 어제. 주말이라서 아빠가 밥 사줬거든.”
“아깝다! 하루만 더 빨리 올 걸. 그럼 오이카와 씨도 이와쨩에게 밥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밥을 얻어먹기 전에 토오루 얼굴에 멍이 들지 않을까….”
너무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여전히 발랄하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말투도 행동도 심지어 얼굴도 30대 중반처럼 보이지 않는다. 잘생긴 얼굴은 본인이 신경 써서 관리하는 탓에 끽해야 20대의 외관이다. 누구도 이 사람이 제 부모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미야비의 가장 가까운 혈연의 이름이다. 정작 미야비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가 아닌 그의 오랜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남자지만,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미야비의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닌 이와이즈미 하지메니까.
오늘도 그렇다. 하나 뿐인 딸의 개학 날짜도 모르고 저녁 9시가 넘어갈 때까지 그녀가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 데도 걱정의 말 한 마디 없다. 직업상 자주 출장을 가는 치이라 일주일 만에 얼굴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야비는 전부 알았다. 그가 자신과 오래 있는 것을 못견뎌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직업을 골랐다는 것을. 어릴 적에는 자주 상처받았고, 아빠의 품에 안겨 울기도 했지만 이제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안다. 전부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하나 뿐인 가족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새학기면 반도 바뀐 거야? 친구는 사귀었어?”
“새 친구는 모르겠지만, 같은 부의 친구가 있어서 괜찮아.”
“미야비 부활동이, 저번에 들었던 그건가?”
“응.”
이와이즈미 이모가 만들어준 소고기감자조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엌 전등만 켜둔 탓인지 토오루의 뒤가 어두컴컴하게 보였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짧게 침묵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옅은 쓴웃음이 입술 아래 그림자를 만든다.
“미야비쨩도 가만히 보면 되게 배구 좋아한단 말이야.”
“누구 닮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게.”
대체 누굴 닮은 걸까…. 오이카와가 한숨 쉬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미야비는 의아하여 눈만 한 번 깜박였다. 왜 제 젓가락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 경우에는 젓가락을 든 손이 문제인가. 그녀는 제 말이 토오루의 어딘가를 자극했음을 인정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에도 제대로 잠 못 든 채 술이나 퍼겠지. 미안. 가볍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들던 차였다. 오이카와가 먼저 여상스러운 체 하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조심해. 그래도 남자는 다 늑대들이고, 미야비쨩은 날 닮아 엄청 예쁘니까.”
“모욕적이야.”
“뭐어?”
“토오루보다는 아빠를 닮고 싶었는데….”
“아니, 그거 우선 유전적으로 무리잖아.”
그리고 이와쨩은 못생겨서 안 돼. 왜 토오루 주제에 우리 아빠를 욕하는 거야? 미야비쨩 정말 누구 딸이야? 아빠 딸. 그거 내가 아니라 이와쨩 말하는 거지? 너무해!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끝냈다. 미야비는 설거지를 하고, 어쩐 일로 제가 빨래를 하겠다는 토오루에게 기꺼이 제 몫의 빨래더미를 넘겼다. 텔레비전을 켜지 않아 두 사람의 말소리를 제하면 집은 조용했다. 불은 켜져 있지만 빛에 온기는 없다.
침실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때때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답장하며 베란다를 응시했다. 세탁기 옆에서 오이카와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자가 아주 오랜 어느 날을 회상하고 있음을 알았다. 저 하늘 위를 수놓은 별들처럼, 아마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마냥 반짝이고 찬란할 것만 같던 청춘의 어드매를. 자신이 망가뜨린 꿈을.
배구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늘 저런 모습이었다. 배우 마냥 유연하게 움직이던 얼굴 근육도 일시에 방향을 잃곤 했다. 늘 손끝에 아슬아슬하니 걸리던 날을 그리워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도리 없이 배구와 오이카와 미야비의 태생에서만 솔직했다. 내가 배구를 좋아하는 게 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야비?"
살짝 열린 베란다 문 너머로 오이카와가 말을 건넸다. 담배 냄새가 난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자. 나도 빨래 널 줄 아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오루 기다린 적은 없지만. 정말 매정하네. 갈수록 이와쨩만 닮아가. 유전적으로 무리라며? 나한테 이러는 부분이 말이야. 그건 토오루가 토오루니까 어쩔 수 없잖아. 누구도 진심 없는 우스갯소리로 균열을 덮는다. 오늘 밤,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미야비는 조용히 침실로 들어갔다. 자신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오히려 그를 괴롭게 할 테니까. 내가 그에게서 배구를 빼앗았으니까.
제2 체육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새학기가 시작된 후 처음 가는 부활동이었다. 그거 알아? 1월에 이노우에 감독님 은퇴하셨잖아. 바로 옆에서 은근히 운을 떼어오는 것에 그랬지, 하고 여상하게 대꾸했다. 저도 그도 모를 리가 없다. 그 탓에 현민대회가 있었던 3월까지는 오로지 고문 선생님과 코치, 그리고 주장 선배의 의논 아래 프로그램을 짜지 않았었나. 전 감독이 지휘하던 당시의 연습 내용을 상당 부분 땄지만 그래도 꽤 어설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새로운 감독님 오신대. 굉장히 유명한가봐. 고문 선생님이 진짜 기뻐하시더라.”
토라가 씩 웃으며 말했다. 코우센의 배구부의 주전 선수인 그는 감독의 부재에 가장 크게 실감하고 있는 이 중 하나였다. 코치님이 애쓴 보람이 있나봐. 감독님의 은퇴가 확정될 무렵부터 자신이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배구부 감독을 수소문하고 다녔던 나가마츠 코치를 떠올렸다.
“그럼 올해에도 전국 우승을 목표로 삼아야 겠네.”
“당연하지! 이번에는 이타치야마도 꺾어버릴 테니까!”
조금 들떴다. 지난 번 인터미들에서 중등배구 유구한 강자인 이타치야마에게 패배해 2회전에서 떨어진 것은 시합에 나가지 않는 저에게도 상당히 아쉬웠던 일이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부실동으로 향하는 토라와 갈라지고, 먼저 체육관에 들어섰다. 한 달 만에 신는 배구화다. 삐걱이는 코트의 마찰음이 반갑다. 오이카와 선배! 고작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라도 반가운지, 코트를 정비하고 있던 사내 녀석들이 우루루 몰려온다. 저는 마냥 익숙하지만 남이 본다면 돈이라도 뜯어내려 하는 줄 알 것이다.
“방학 잘 보냈어?”
“그냥 그랬지.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신입 부원들이랑 인사 정도만 하고 빨리 끝날 것 같은데.”
그럼 드링크는 생략할까? 스코어보드는? 으음…. 스코어보드는 부탁할게. 연습게임이라도 할 셈인가보다. 오이카와는 지나친 환대를 흘리듯 받으며 서둘러 체육관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코어보드와 함께 개인적으로 일일이 득점을 기입해두는 공책을 함께 꺼내 체육관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못 보던 얼굴도 더러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어수룩한 행동, 혹은 긴장으로 빳빳한 몸이 누가 봐도 신입생인 것이 티가 났다. 나도 작년에는 저랬을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훑곤 의자도 꺼내둔다. 곧 고문 선생님과 코치가 올 것이다. 시계를 한 번 보고 체육관 정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때마침 토라가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대박 소식!”
일동 시선이 그에게 몰린다. 이제 자신이 누군가의 선배가 된다는 자각은 있는 걸까? 한숨이 푹 나온다. 옷 갈아입으러 간다더니 왜 저렇게 달려오는 거야. 왜, 라고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언젠가 핀치에 몰려 의기소침해진 팀의 사기를 끌어올릴 적의 그 성량으로 토라가 쩌렁쩌렁 외쳤다.
“이번에 새로 온다는 우리 감독, 우시와카야!”
그대로 입술이 짜부라든다. 눈이 홉 뜨였다. 설마 그 우시와카요? 거짓말! 진짜야! 내가 직접 뒷모습 봤다니까! 고작 뒷모습이잖아! 순식간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정식 입부하게 된 신입생들을 놀릴 생각에 묵직한 척 하고 있던 3학년들은 물론이고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신입생들 가릴 것 없이 흥분과 불신으로 말문을 텄다.
우시와카라는 이름의 파급력이 그러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불과 대학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된 배구 선수. 대학을 졸업하고선 파르마에 입단하여 이탈리아에서 귀화를 권유할 정도로 활약한 그는 일본 배구계에서는 역대 최고의 윙스파이커라 한다면 단연 한 손 안에 드는 우수한 선수였다. 얼마 전에 선수 은퇴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다른 구단의 감독도 아니고 고작 미야기 소재의 중학교 감독이라니. 대체 뭐가 부족해서? 센다이가 그의 고향이라고 하니, 본가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던 걸까? 그 전에 나가마츠 코치님은 도대체 무슨 인맥을 동원했기에 그 우시와카를 감독으로 데려온 걸까. 어쩐지 얼떨떨했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설렘 탓이겠지.
“왜 그렇게 떨떠름한 반응이야, 미야비. 너 우시와카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그랬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아했다. 어릴 적에. 그런데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 괴상하리만치 그 남자를 싫어했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친한 이는 왜 저가 아니라 그런 놈을 응원하냐며 서운한 기색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우시지마 선수의, 다른 코트의 선수들을 죄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이 놀랍고도 좋다고 말했을 때에는 그마저 잠시간 얼굴을 굳혔더란다. 그 때의 침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모든 유기된 것들이 숨을 죽이고 서리를 맞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 분위기가 두렵기보다 서러웠다. 그래서 팬을 자청하기를 포기했다. 소학교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받아보는 배구 잡지에는 그의 소식이 꼭 한 면쯤 실려 있어 오이카와 미야비는 어쩔 수 없이 우시지마의 근황을 전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그 기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유년의 동경심은 멀리 떠나지 않아, 내심 그가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이 제 일인 양 뿌듯하기도 했다. 작년 갑작스레 선수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을 땐 적잖이 충격도 받았다. 일주일 내내 시무룩하여 토라가 먹고 기운 내라며 하이라이스를 사주었던 기억이 있다. 이를 생각하면 저는 감추고만 있을 뿐, 여전히 우시지마 선수의 팬인 것 같다.
마침 체육관 입구에서부터 인영이 셋 보인다. 체육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죄 그로 쏠렸다. 부담스러우리만치 반짝이는 눈들은 배구를 하는 중학생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동경이다. 한명은 틀림없이 고문인 이케다 선생님, 다른 한명은 나가마츠 코치, 가운데 있는 한명은 유난히 몸집이 다부지고 크다.
“와.”
누군가가 얼빠진 감탄을 냈다. 진짜로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코치의 인맥에 감탄을 보내야 할 때였다. 코우센에 오길 잘했어. 신입생들의 중얼거림에 재학생 역시 공감했다. 시라토리자와 출신의 우시자마가 코우센에 감독으로 부임하는 날이 오다니.
현대에야 일본 배구가 더 이상 흔히 말하는 ‘몰빵 배구’에서 장점을 찾지 못하고 콤비네이션 중심의 배구 혹은 스피드 배구 물결을 따라감에 따라 학생 배구에서도 그러한 스타일의 팀이 늘어가고 있었고, 미야기 현 소재의 대다수의 배구부는 학생 배구에서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스피드 배구의 장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몰빵 배구를 하는 팀과의 시합에서 더 강점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었고, 한 때 미야기 현의 왕자王者는 꾸준히 몰빵 배구를 하는 시라토리자와 학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우시지마가 에이스로 있었던 시라토리자와 고등부와 당시 미야기 현에서 가장 먼저 스피드 배구를 도입했던, 우시지마와 마찬가지로 미야기의 자랑이자 일본이 낳은 천재 세터라고 불리는 국대 카게야마 토비오가 소속되어 있던 카라스노 고교와의 시합 이후 미야기 현의 많은 학교들이 대對시라토리자와를 목적으로 스피드 배구 팀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결과 미야비가 15살인 현재 시라토리자와 고교는 상당히 약체화되었다.
그러니 시라토리자와의 과거의 영광이며 원맨팀의 주축, 최고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시라토리자와 중등부가 아닌 스피드 배구를 하고 있는 코센에 온다는 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뭐, 그로선 단순히 현재 미야기 현 중학 배구 2대 강호라고 불리는 팀을 선택했을 지도 모르지만.
“크흠.”
기대 한껏 모은 등장에 배구부 아이들이 자연스레 고문과 코치의 앞에 옹기종기 몰려들었다. 당장 신입생들의 소개보다 더 설렌 등장이다. 미야비 역시 3학년 매니저라는 권력을 발휘해 누구보다 선두에 섰다. 이케다 선생님은 저가 더 뿌듯한 낯으로 우시지마를 소개했다.
“오늘부터 우리 배구부에 감독으로 부임하게 될 우시지마 와카토시 감독님이시다. 이상하게 부르지 말고 감독님이라고 불러.”
“넵, 감독님!”
주장인 유라도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는데, 넉살 좋은 토라는 제일 먼저 감격하여 외쳤다. 야, 너 바로 일 분 전에 우시와카라고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잖아. 3학년 동료들이 찬 눈으로 흘겨도 그는 꿋꿋하게 마저 외쳤다.
“신다 토라가! 3학년 리베로 입니다!”
“우시지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시지마는 그의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허억, 감독님이 대답해주셨어…! 당연하지, 감독님도 사람인데. 가벼운 핀잔에도 토라는 감격의 홍수에 빠져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야비는 그는 가벼이 무시하기로 했다. 작년부터 히마의 스파이크를 받아내는 것도 버거운데, 우시와카의 스파이크는 얼마나 대단할까? 라며 눈을 빛내던 녀석이었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놀랍게도 우시지마 역시 가볍게 그를 무시하고 인사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잘 부탁한다.”
“네!”
코치는 주장과 부주장을 가리켜 먼저 감독님께 소개했다. 주전 선수들은 일반 부원들과 똑같이 찬밥신세였다. 아마도 감독의 부임 첫날부터 자칫 선수들이 차별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어 그는 배구부의 유일한 여성인 미야비 역시 지목했다.
“그, 이쪽은 우리 부 매니저에요. 선배.”
엇비슷한 색의 눈이 마주쳤다. 제 가족 때문에 눈치만 빨라진 그녀는 남자가 얼핏 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시합 때에도 생각했지만 되게 읽기 힘든 얼굴이네. 미야비는 생각을 내색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3학년의 오이카와 미야비라고 합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제 남자는 누가 봐도 놀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왼손을 내밀었고, 미야비 역시 자연스레 왼손을 내밀어 손을 맞잡았다. 토오루보다 크고 단단한 손이다. 수천수만 번을 바로 이 왼손으로 스파이크를 내려쳤겠지. 손바닥 안 갈라진 세월의 계곡이 느껴진다. 어쩐지 알 수 없는 기분에 가슴 언저리가 술렁인다. 미야비는 이 기분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손에 쥐고 있던 예언자 일보를 꽉 쥐었다. 무너진 마법부 로비의 사진이 아주 쉽게 우그러진다. 사진 속에는 너덜한 상태의 해리 포터를 비롯해 뒤로는 덤블도어를 비롯한 불사조 기사단원들, 어린 학생들 몇이 모여 있었다. 남자는 어린 학생들의 정체는 알지 못해도 불사조 기사단원들은 모두 알았다. 사실 중심에 선 해리 포터와도 연이 있다. 꽤 친한, 그리고 제가 누명을 벗겨준 이후 더욱 친해진 후배 녀석인 시리우스 블랙이 소중한 대자랍시고 몇 번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사진의 주인공인 ‘살아남은 자’ 해리 포터도 아니었으며, 위대한 대마법사 알버스 덤블도어도 아니었다. 그는 뒤에 선 몇 명의 오러들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저 너머를 응시하고 있고, 이 몹시 잘생긴 사내가 응시하는 사진 옆에는 기사의 헤드라인이 굵고 반짝반짝하게 빛난다.
‘어둠의 마왕이 돌아왔다.’
단언컨대 이와이즈미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가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는 지나치지 않은가. 기사에서 덤블도어의 말에 의하면 어둠의 마왕, 즉 ‘볼드모트’는 이미 작년에 돌아왔다고 한다. 호그와트에서 트리위저드의 마지막 시합이 열렸던 밤, 해리 포터의 피를 발판 삼아 눈을 떴더라고. 아. 그제야 저는 오래 전 왼쪽 팔목에 새겼던 문신이 되살아난 이유를 깨달았다. 돌아왔다. 한 때 자신이 피상적으로 주인을 모신 자가, 오이카와의 어둠이 돌아왔다. 과거의 악몽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만은 지키겠노라는 신념을 이행한 증거가.
그래서 모두가 제게 사실을 숨겨온 것이었다.
알버스 덤블도어는 문신이 되돌아왔다며 불길해하는 제게 ‘볼드모트는 몰락했되 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고 설명해주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설명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노인은 무시해도 좋다고 했다. 아즈카반에서 벨라스릭스 따위를 비롯해 어둠의 마왕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들이 탈출했던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그들이 문신을 되살려 어둠의 마왕을 부활시키려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게 죄다 거짓이었다니. 짓이겨진 신문을 바닥에 던지며 이와이즈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는 덤블도어를 잘 알았다. 만일 그 노인네라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자가 돌아온다는 걸 알자마자 제게 이번에는 불사조 기사단으로 정당하게 협력해달라고 요청해야 정상이었다. 그는 선이면서도 교활하기 짝이 없어서,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죄다 사용하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사실을 숨겼다는 건 한 가지 이유 밖에 없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바라지 않았다.
물론 그를 이해할 수는 있다. 행여 소중한 사람을 또 잃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어떻게 지켜낸 영원의 반쪽인가. 우리는 서로가 모여야만 비로소 일이 될 수 있었다. 오래 전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명목 아래 이루어졌던 싸움은 지나치게 고통스러웠던 과정이었던 터라 두 번은 겪기 싫었을 터다. 배신당했다는 생각은 한 번으로 족하다. 내가 너를 죽이겠다는 증오도 한 번으로 족하다. 희생이라는 자기만족을 위한 미덕도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 죄다 한 번으로 족했다. 오이카와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정작 누구에게도 지킴 받지 않고 뛰어드는 것 역시 한 번으로 족했다.
구겨진 신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당장 몸을 일으켜 지팡이를 쥐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망토를 둘렀다. 남자는 늘 무언가를 결심한 직후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오직 하나만을 떠올리며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오이카와가 있을 곳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마법부가 반파되었고 적의 귀환이 공언되었다면 오러이자 불사조 기사단인 자가 있을 곳은 하나뿐이다. 이와이즈미가 선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는 눈을 단초 깜박인다.
“오이카와!”
순식간에 그는 그리몰드 광장 12번지에 도착했다. 언제 와도 음침하기 짝이 없는 집구석이다. 언젠가 후배 녀석을 만나기 위해 두어 번 방문한 경험은 있지만, 정작 집주인인 그가 이 집을 끔찍하게 여겨 대부분의 만남은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블랙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외친 소리에 식당에서 울리던 자잘한 말소리가 뚝 끊긴다. 저쪽이군.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인다.
“이와쨩? 잠깐, 이와쨩이 어떻게….”
회의를 하고 있었는지, 식당 안에는 낯익은 면면이 가득하다. 호그와트에 있어야 하는 몇 인물들은 없지만, 이와이즈미가 기억하는 불사조 기사단 단원들은 전부 있었다. 집주인인 시리우스 블랙도, 기사단을 이끄는 덤블도어도 있고, 역시 오이카와 토오루도 있다.
“늦었네, 하지메 선배.”
머리에 붕대를 둘둘 둘러맨 시리우스 블랙이 씩 웃었다. 마법부에서의 전투에서 상당히 다친 모양이었다. 어.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오이카와를 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지 상처나 붕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핏기 가셔 창백한 낯이다. 제가 저지른 잘못은 아는 건지, 시선 역시 저를 피하고 있다. 쉬이 상황을 이해한 덤블도어가 대신 웃었다.
“예언자 일보를 보았구나.”
“예. 불사조 기사단원들이랑 자주 교류를 했던 것 치고는 유감스럽게도 소식이 늦었네요.”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말투가 토오루를 닮아가는구나, 하지메. 그러나 경험 많은 노인은 능숙하게 이와이즈미의 빈정거림을 넘겼다.
“그래, 마침 잘 되었군. 이참에 하지메, 자네도 함께 일을 돕지 않겠나?”
“교수님!”
외침은 식당 쪽에서 터졌다. 오이카와였다. 이와이즈미는 거리낌 없이 인상을 구겼다.
“졸업한지 곧 스무 해가 다 되어가는 데도 날 그리 불러주다니, 영광이구나.”
“저와 약속했잖아요, 덤블도어.”
“하지만 하지메도 알게 되었잖니.”
“이와쨩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에 매서운 공방이 오갔다. 다른 자들은 날카로운 공방에 말 붙이지 못하고 상황을 관조할 따름이었다. 아니, 오이카와를 비롯해 이와이즈미와도 친분이 깊은 일부 사람들은 도리어 흥미로운 기색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야.”
이와이즈미는 홀로 팔짱을 끼고 오이카와를 향해 턱짓했다. 기실 연인이나 소꿉친구를 부르는 태도라기에는 상당히 불량스러웠다. 오이카와는 그 짧은 단어에 침묵 마법에 걸린 마냥 입을 꾹 다물었다.
“누가 보면 내가 볼드모트에게 돌아간다는 줄 알겠다?”
힉. 순간 짧은 신음이 어딘가에서 샜다. 식당 밖에서 난 소리였다. 이 저택에 있던 어린 녀석들이 몰래 훔쳐듣고 있기라도 한가보다. 범인을 짐작하는지, 몰리 위즐리가 화가 난 기색으로 식당 밖을 나가기에 이와이즈미는 신경을 끄고 덧붙였다.
“뭐가 무서운지는 대충 알겠어.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무서워하는데?”
자신의 배신은 명백하다. 이미 십년 전 제 행위는 덤블도어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고 오랜 시간 뒤 의심을 푼 불사조 기사단들은 저더러 희대의 로맨티스트라 비웃곤 했다. 뭐, 몰락했던 데스이터들은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더 이상 서로에게 지팡이를 겨누게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 자명하다.
“내가 죽을까봐 무섭다면 너도 나서면 안됐었지. 내가 공주님이냐? 성 안에서 얌전히 지켜지고 있게?”
이와쨩 얼굴이 어딜 봐서 공주야? 제 본심은 이미 질문을 하고 있는 당사자가 훤히 꿰뚫고 있고, 반박할 말은 없어 오이카와는 애꿎은 말만 잡고 늘어졌다. 풉. 리무스 루핀과 시리우스 블랙이 짧게 웃었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소년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네가 허튼 짓 할까봐 그렇잖아.”
“내가 뭘.”
“이와쨩은 항상 자기보다 날 더 우선순위로 두는 겁쟁이니까.”
“하아? 누가 할 말인데.”
“하지만 이와쨩은 정말 쓸모없는 곳에서 그리핀도르 같은걸.”
오이카와 씨는 그런 기사도 정신, 전혀 바라지 않아. 뻔뻔하게 말하던 목소리가 칭얼거림처럼 변해간다.
“솔직히 너 또 그럴 거잖아.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이와쨩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선택할 거잖아.”
“…….”
“물론 나도 이와쨩이 가장 소중하고, 이와쨩을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는 날 포기하면서까지 너를 홀로 두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넌 아니잖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제 목을 조르는 듯했다. 진실이었다. 그야, 네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으니까. 맹목적으로 바란 건 줄곧 오이카와의 행복이고 그의 삶이었지 제가 아니었다.
“하지메. 나는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싸우는 거야.”
나 역시 무엇보다 너를 사랑하는데, 자신의 사랑은 오이카와와는 전혀 달랐다. 혀 위로 모래가 까끌거리듯 하다. 물기 없이 버석 말라버린 사막이다. 덤블도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나와 같다면. 그러니까, 위험에 처했을 때 기꺼이 나만 지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럼 좋아. 함께 싸우자.”
“…….”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뜨거운 데에도 이와이즈미는 전혀 대답할 수 없었다. 빛 담아 눈부신 시선을 보며그를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거짓이니까. 인정한다. 오이카와를 되찾고, 오랜 시간 평화롭게 있었지만 이와이즈미의 사랑은 여전히 비겁했다. 세상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피어나도 그는 언제든지 오이카와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었고, 기꺼이 그럴 것이었다. 너는 많이 실망하겠지. 어쩌면 그리핀도르 답지 않다고 질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팔짱을 풀고 어깨에 힘을 늘어뜨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내 말문을 열었다.
“덤블도어.”
나지막이 부르는 이름은 제 연인이 아닌 다른 자의 것이다. “그래.” 현명한 마법사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음에도 동요 없이 대답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내리깔았다.
“위대하다는 건 저 녀석을 보고 말하는 겁니다.”
나는 그렇지 못해요.
썩 쓸쓸한 음색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 식당을 빠져나갔다. 결국 그는 세상 모든 대의(大義) 중 오이카와만을 위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드디어 호그와트 내 퀴디치 리그 첫 경기가 다가왔다. 첫 시합은 그리핀도르 대 후플푸프였는데, 교내에서는 벌써부터 시합의 결과를 예측하며 떠들곤 했다. 슬리데린은 작년에 제게 패배당한 그리핀도르가 마땅히 이번에도 질 것이라며 비웃었고, 래번클로는 벌써부터 제1 시합 결과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세워두고 각 경우에 따른 작전을 짜두고 있었으며, 마땅히 소속 기숙사인 후플푸프와 그리핀도르 기숙사 학생들은 선수들의 연습을 재촉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이카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작년 처음으로 퀴디치라는 운동을 접해 보았고, 금세 색다른 운동에 듬뿍 빠졌다. 이와이즈미도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들은 비행술에 괜찮은 소질을 보였으며, 심지어 이와이즈미의 경우에는 올해 초 있었던 그리핀도르 퀴디치 선수 선발에 몰이꾼으로 뽑히기까지 했다! 소학교 시절, 사내아이들이 제발 한 시합만 함께 해달라는 애원으로 기른 힘은 2학년이 블러저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하였나 보다. 오이카와는 마치 저가 선수로 뽑히기라도 한 양 힘껏 제 소꿉친구를 축하해주었고, 연습을 닦달했다.
이번 시합은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데뷔전과 다름없었다. 오이카와는 매일 저녁 너도밤나무 아래에 앉아 이와이즈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모님께 새로 받은 님부스 1001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허공에서 재빨리 회전할 때에는 박수를 치고, 어디로 날아가든 끝내 시선을 놓지 않았다. 바람에 휩쓸려 휘청하기라도 하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는 덕에, 이와이즈미는 아닌 척 은근히 그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시합을 열흘 앞두고는 매일 작전회의니 연습이니 하는 명목으로 끌려 다닌 터라 수업 시간과 통금 시간을 제하고는 두 아이는 잘 만나지도 못했다. 이와이즈미는 허겁지겁 음식만 입 안에 우겨넣고 다른 팀원들과 서둘러 연회장을 나섰고, 매번 녹초가 되어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었다. 대화도 무색하고, 혹시 모를 염탐꾼들을 방지하기 위해 연습을 구경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점진적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할 즈음, 다행스럽게도 퀴디치 날이 밝았다.
오이카와는 좋은 자리를 선점해두기 위해 서둘러 경기장으로 향하는 아이들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급조한 응원가가 점차 멀어지고,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작년보다 덜름한 망토가 소년의 복사뼈를 간지럽혔다. 지금쯤이면 아마 회의를 위해 따로 모였을 것이다. 시간을 잘 맞추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기장을 빙 돌아 뛰는 모양이 다소 조급스럽나 싶더니,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앞을 미처 보지 못하고 둔탁한 무언가와 부딪쳤다.
윽, 하는 신음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몸이 크게 휘청거렸으나 상대방이 잡아준 덕에 다행스럽게도 꼴사나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오이카와가 슬그머니 눈을 뜬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단정하게 맨 노오란 줄무늬 넥타이였다.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다. 반쯤 기울어진 몸을 바로세우며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 전 응원 한 마디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서두른 것이 실책이었다. 고마워. 그는 인사를 하며 제 흐트러진 옷차림을 바로 하고, “여기도.” 상대방이 조심스럽게 구겨진 망토 소매를 펴주었다, 뒤늦게 얼굴을 마주했다. 공교롭게도 이따금 후플푸프와 함께 수업을 들을 때면 본 얼굴 이었다. 선한 인상과는 별개로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가끔 교수님께 불리던 이름이 일본식이라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니까, 스가와라… 였나?”
“오, 기억하는구나.”
“일본식 이름이라서.”
“혼혈이지만. 코우시라고 해.”
웃음 짓는 모습이 썩 싱그럽다. 보는 사람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인데. 토오루 맞지? 그러면서 쉬이 제 이름을 말하는 것이 기억력도 꽤 좋은 성 싶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는 중이었어?”
“아. 우리 팀 막사에. 시합 전에 친구 얼굴을 보려고.”
“이런. 퀴디치팀들은 지금 전부 최종회의 중일 텐데.”
벌써? 아까 지나는 길에 그리핀도르 팀이 막사로 들어가는 걸 봤거든. 아무래도 저가 조금 늦었나보다. 오이카와는 눈가를 찡그렸다. 스가와라가 단조롭게 조언해주었다. 인사는 시합 후로 하고,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잡아서 응원에 열중하는 게 어떨까? 저가 생각하기에도 그 편이 나을 것 같다. 긴 숨을 내쉬고 오이카와는 뒤를 돌았다.
“항상 시합 전에는 내가 이와쨩에게 한 마디 했었는데.”
“늘 같이 다니는 검은 머리 남자애 말하는 거지? 너희 둘 정말 친한가봐?”
“당연하지. 우린 가장 친한 친구니까.”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재차 질문해본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친했던 거야? 응. 옆집이었어. 가족처럼 자랐거든. 둘 다 마법사 마을에서 자랐어? 아니, 런던에서. 굉장한 우연이네.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오이카와는 마치 큰 칭찬이라도 받은 것 마냥 어깨를 으쓱이며 턱을 세웠다. 그치? 굉장하지? 나란히 걷는 걸음이 사뿐하다. 그는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어릴 적부터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하면 항상 이와이즈미가 속해있던 팀이 이겼다던가, 그리고 자신은 한 번도 이와이즈미와 다른 팀이 된 적이 없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두 사람이 퀴디치 경기장 응원석에 올라, 한쪽에 자리 잡고서야 스가와라는 넌지시 말했다.
“그 말은 이번에도 너희 팀이 이길 거란 소리야?”
“당연하지!”
“흐음. 절대 네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걸.”
미안한데 우리 팀도 호락호락 당해줄 정도로 약한 팀은 아니거든. 소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사뭇 자신만만한 모양은 제 팀에 대한 신뢰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쨩은 한 번도 진 적 없거든! 무려 이 오이카와 씨가 믿고 있으니까!”
뭣하면 내기도 할 수도 있어. 소년이 빳빳하게 외쳤다. 할까, 내기? 노랗고 붉은 목도리가 한데 뒤엉켰다. 누가 뒤로 뺄 줄 알고. 오이카와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와이즈미를 믿었다. 매번 제 친구가 게임을 할 때마다 ‘믿고 있어.’라고 단언할 정도로. 이와이즈미는 제 무조건적인 믿음을 배반한 적 없다. 비록 오늘은 그 말을 건네주지는 못했지만, 그렇다 해서 제 굳건한 탑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믿음도 부럽네….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소년이 다소 짖궂게 웃는다.
“좋아. 그럼 저녁 식사 시간에 지는 쪽이 이기는 팀의 기숙사 테이블에 가서 똥폭탄을 던지고 오는 거야.”
“뭐?”
보통은 내기에서 지는 쪽이 더 굴욕적인 결과는 맞지 않던가? 생각한 것과는 다소 다른 내용에 오이카와가 눈을 둥그레 떴다. 눈을 반쯤 휘면, 그 아래 위치한 눈물점이 슬쩍 접힌다.
“시합에서도 지는데 내기까지 비참한 쪽이면 너무 슬프잖아. 이래야 이긴 쪽도 진 쪽도 조금은 공평하게 즐거워지지.”
썩 그럴법한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마냥 한쪽만 즐겁게 내버려두진 않겠다는 건가. 얼굴은 상쾌하게 생겼는데 성격은 전혀 상쾌하질 않네. 오이카와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기 성립이야.”
물론 그는 그 날 저녁, 정말로 자신이 앉아있는 테이블이 똥범벅이 될 거라곤 상상을 못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대답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아마도 의사인가 보다. 시선은 확실하게 저를 향하고 있다. 까만 동공 너머로 제 얼굴이 보인다. 서서히 차오르는 현실감은 확실히 정신이 든 모양 같다. “네.” 나는 대답하며 가장 먼저 머릿속에 든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혹시 ‘오이카와 토오루’가 제 이름인가요?”
“…….”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역시 본인의 이름을 도리어 되묻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상대가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이상한 쪽은 본인이었다. 객관적으로 소년은 자신의 상태가 다소 어딘가 어긋났다고 판단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이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병실 내부에서 숨소리만이 잘근잘근 떠돌았다. 몇 번 순진한 낯으로 눈을 깜박인다. 그 불규칙적인 숨소리들을 들고서야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뿔싸, 이 방에 있는 건 자신과 의사선생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 코앞에 선 의사로부터 벗어나 시야를 넓게 하자, 비로소 몇 명의 사람들이 더 비쳤다. 입을 쩍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기억에는 없지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얼굴이 아까 전, 힐끔 의사 선생님의 동공 너머로 흐리게 비쳤던 제 것과 닮았으니까. 단순한 머리색이라던가, 눈매 같은 것들.
의사가 그 중 한 가운데 선 여성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오이카와 씨, 혹시 이 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나,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므로 고개를 저었다. 토오루…. 그러자 여자의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느낌에 심장이 덜컹,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제 심정은 아랑곳 않고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지극히 단순한 내용이었다. 본인이 몇 살인지 알고 있느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위를 기억하고 있느냐 따위의 시시한 물음들. 보통 사람이라면 망설임 없이 줄줄 흘러나왔을 답변이나, 정작 제가 말하려니 머릿속이 안개 낀 듯 서러워져 직전과 같은 문장 밖에 말하질 못했다.
“역시 현재 환자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기어코 의사는 선고했다. 일시적인 증상일지, 영구적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고 자세한 영역은 정밀 검사를 해보아야 하겠지만 본인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없는 이 상황은 한 가지 결론밖에 도출해내지 않는다고. 침통한 의사의 말에 어머니, 로 추정되는 사람은 더욱 소리 높여 울지 시작했다. 아버지인 것 같은 사람이 어머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닮은, 그러나 30대 중반의 남자가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그 외의 외상이나 내상이라던가, 검사 예약에 대한 말을 늘어놓았다. 모든 것이 나 아닌 남의 이야기 같았다. 병실이 절망과 비탄의 장으로 물들었다. 생경했다.
그런데 찰나였다. 소수의 조촐한 인파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돌연 중얼거렸다.
“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고개가 돌려졌다. 그곳에는 민트색의 체육복을 입고 있던 한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여자의 울음을 달래주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호감 가는 외모의 청년은 의사선생님과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지금 저 소년을 보고 있는 것은 저 뿐이었다. 가장 구석진 곳에 서서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도, 나지막한 목소리도 저만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무언가 신기했다. 홀로 묵음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던 소년이, 기어코 한 마디를 뱉었다.
“망할카와가.”
제 성을 닮은 욕 비슷한 말이었다. 푸하하.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그 울림이 너무 익숙한 탓일까? 정말 신비로운 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진짜 ‘오이카와 토오루’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나이도 취미도 특기도 가족도 친구도 전부 기억나지 않는데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모든 부재가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모르는 어떤 오이카와 토오루가 탄생한 날이었다.
* *
나는 학교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왜 떨어졌는지는 모른다. 부모님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들도 모르고 있다고 짐작된다.
몇 번의 지루한 정밀 검사를 치룬 결과, 의사는 기억 상실이 확실하다고 진단했다. 옆에는 아버지와 친형(깨어났던 날 의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남자였다.)이 있었다. 기질-역행성 기억상실이라고, 꾸준히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을 수는 있는 건가요? 형이 물었다. 흐렸다. 나는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낯설었다.
“완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운이 좋아 기억을 조금씩 되찾는다고 해도,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릴 겁니다.”
의사는 말했지만, 기질 저는 아무렴 어떤가, 라는 심정이었다. 숨을 쉬는 데에도 이상이 없고, 제대로 자아를 가지고 생각을 하고 있다. 머리를 약간 다친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 지금 당장은 건망증세가 자주 나타날 거라 말했지만 최소한 삶에 이상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신체 회복력이 다소 빨랐던 것을 생각하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보호자분들께서 잘 챙겨주세요.”
그의 당부대로 가족들은 어떻게든지 옆에 붙어서 저를 도왔다. 아니,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자신의 이름에서 토오루가 관통하다는 의미의 토오루(徹)라는 것도 알았고, 18살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생일은 7월, 음, 7월의 어느 날이라고 한다. 막둥이로 태어났는데, 어릴 적에는 발육이 다소 느려서 굉장히 가족들이 걱정을 했다고. 그런데 지금 제 키랑 몸을 보면 절대로 발육이 느린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뭐, 모르겠다.
가족의 이름도 배웠다. 어머니, 아버지, 형. 아, 형은 결혼도 했고 애도 있다고 했다. 조카 이름이, 그, 무슨 루로 끝났는데. 주말에 함께 다 함께 병문안을 온다니 그 때 다시 물어봐야 겠네.
잠에서 깨어난 일주일은 몹시 지루하고도 바빴다. 가족들은 끊임없이 제게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했다. 나는 모르는 나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말해도 기억이라곤 전혀 나질 않는데. 그들은 어떤 작은 기적에 몹시 매달리는 눈치였다. 그래도 가족이고, 저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꽤 슬플 것 같으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제가 토오루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던 금요일이었다. 전날 병원에서 하루 종일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한 나머지, “엄마, 내가 자주 보던 책이나, 좋아하던 음악 같은 건 뭐에요? 병원에 계속 있으려니 지루해서.” 라는 질문에, “토오루, 너는 책이라면 늘 배구 잡지만 품에 안고 살았지. 아, 그러고 보니 배구는 기억나니?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잖니.”라고 대답하며 약 반 년 치의 배구 잡지를 들고 오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다소 너덜거리는 잡지의 가장 최근호를 꺼냈다. 월간 배구. 표지 상단에 큼직하게 박힌 단어가 인상 깊었다. 의미 없이 팔과 다리가 간질거렸다. 굉장히 그리운 울림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러니까, 내가 아닌 이전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배구를 많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느릿하게 한 장 한 장 넘겼다. 서브, 리베로, 봄고 예선 등 생소하지만 기시감이 드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또 손끝이 움찔 떨린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지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깜한 지식들을 끼워 맞춰보려고 노력하며 열심히 기사들을 탐독하던 중이었다.
난데없이 문이 덜컥 열렸다. 마땅히 검진을 온 의사 선생님, 혹은 퇴근 후 잠깐 제게 들린 가족으로 짐작한 채 고개를 돌린 저는 낯선 얼굴에 눈을 댕그랗게 떠버렸다.
“어.”
아니다.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처음 제가 깨어난 날에 보았다. 분명 ‘망할카와가.’ 따위의 말도 했었지. 기억이 났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위의 상황에 정신없이 휩쓸렸기 때문에 통성명은 하지 못했다.
“우리 첫날에 봤었지?”
그러니까 이름이…, 그때와 다름없이 남자 아이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못생긴 얼굴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와이즈미.”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양 대답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해.”
이런 나라도, 앞으로 잘 부탁해. 이미 제 이름은 알겠지만, 저에게는 이 통성명이 처음이므로 손을 내밀었다. 가습기의 연기가 구름처럼 퐁퐁 솟아나왔고 까만 창문 너머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났다. 이와이즈미는 한참을 제 손만 빤 노려보다가, 겨우 손을 맞잡는다.
마츠카와는 아침 연습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느긋하게 등교하려고 했건만, 평소의 습관 탓일까. 일반 등교 시간보다 십 분 정도 더 이르게 도착해버렸다. 느린 걸음으로 교정을 거닐었다. 그가 다니는 후문에서 교사까지 가려면 어차피 매일 들르는 체육관을 거쳐야 했는데, 요상스럽게도 그곳을 지나는 제 귀에 팡팡 공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오늘은 월요일인데. 제 3년간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 한 아오바죠사이 남자 배구부의 휴일은 매주 월요일이었다. 도대체 뭔가, 싶어 슬그머니 문을 열어보니 오이카와가 있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손부채질을 하다 말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쟤는 왜 오늘 같은 날에 아침부터 연습이야.
입고 있는 교복이 온통 땀에 젖은 모양이 이곳에 잠깐 있던 꼴은 결코 아니었다. 허, 어처구니가 없어 마츠카와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이내 강력한 서브가 뒤따랐다. 공을 던지고, 서브가 날아간 장소를 확인하다가, 제가 의도한 곳과 다소 빗겨나간 것에 오이카와는 “아!” 아깝다는 듯이 소리치며 볼카트에서 다시 공을 꺼내려고 했다. 비로소 코트 안쪽으로부터 돌아간 그림자를 잡아챈다. 인기척을 느낀 소년이 체육관 입구로 고개를 돌린다. 이제야 저를 바라보는 눈이 흡족하다. 마츠카와는 입매를 휘며 줄곧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들어 흔들어보았다.
“좋은 아침.”
“맛층이 왜 여기에 있어?”
“눈이 일찍 떠져서.”
어차피 녀석도 슬슬 교실로 갈 준비를 해야 할 마당에 굳이 체육관 안으로 발을 디딜 필요는 없어 보여 운동화를 신은 채 입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오이카와가 마츠카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는 너는 왜 체육관이야?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냥. 요즘 준비하고 있는 서브가 좀 마뜩찮아서.”
“이와이즈미가 너 오버워크라고 잡아간다.”
“윽.”
이와쨩에겐 비밀이야. 오이카와가 슬쩍 검지를 올려 제 입술에 붙였다. 흐음, 글쎄. 단언하는 대신 괜히 말끝을 흐리던 마츠카와가 제 시계를 확인한다.
“언제부터 연습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됐어. 한 7시?”
“오래 했네.”
십 분만 지나면 여덟시 반이야. 슬슬 교실로 가자.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오이카와가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연습만 시작했다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녀석이니 저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를 만하다. 그래, 벌써.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더위를 깨달은 그가 땀에 달라붙은 교복 셔츠를 팔랑였다. 흰색의 하복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근육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가 슬쩍 감추길 반복한다. 마츠카와는 힐끔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신발을 벗고 체육관 위에 올라섰다.
“공 줍는 거 도와줄게.”
“오, 맛층이 어쩐 일로?”
“싫으면 갈까?”
“아니!”
열심히 오이카와가 던져둔 공을 정리하고 나란히 교실로 향했다. 옷이 젖었는데 괜찮겠냐 물었더니 찝찝하긴 하지만 벗는 것 보단 낫지 않느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왜, 엉큼한 생각이라도 들어? 넌지시 놀리는 어조로 묻기에 비웃음만 지었더란다. 내가 아침부터 그런 생각 할 놈으로 보이냐. 라는 대답을 하며 그를 억지로 교실 안으로 밀어넣고는 저 역시 교실 안으로 돌아온다.
뭐, 사실 조금 했다.
근데 그게 어때서. 마츠카와는 제 상상에 당당했다. 못 할 놈으로 할 것도 아니고 그보다 더 한 것도 본 애인을 상대로 했는데 뭐 어때서. 교실에 앉아 학급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방을 정리했다. 그래도 집 밖을 나와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다름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라니, 오늘은 그럭저럭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마츠카와에게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교사가 제 번호를 지목하며 문제를 풀라던가, 지문을 읽으라는 사건도 없었고 심지어 고문 시간에 잠깐 졸았을 적에는 걸리지도 않았다. 평온한 하루였다.
식당에서 하나마키와 마주쳤고, 녀석이 수학 교과서를 빌려 달라기에 흔쾌히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데? 5교시. 혹시 나 네 책에 필기해도 되냐? 그럼 나야 고맙지. 나란히 제 교실을 향해 올라가며 대화를 나눈다. 제 책에 필기하면 도움이 되는 건 저니까. 2층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근데 날씨 진짜 덥다. 소리를 뱉으며 창문 밖을 힐끔 내다보던 하나마키가
“어.”
하고 돌연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츠카와가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가며 묻는다. 왜.
“아니, 별건 아니고. 그냥 오이카와가 보여서.”
오늘도 변함없이 인기 만발이네, 우리 주장님은. 짓궂게 웃으며 눈을 마주치는 것이 당연한 동의를 구하고 있다. 마츠카와는 잠깐 제 친구가 보았던 끝을 보았다. 그가 말했듯이, 오이카와였다. 그러나 문제라면 오이카와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곧잘 그러했듯 그는 다른 계집애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미소를 흘리며 대하는 모습이 몹시도 능숙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둥둥 떠다닌다. 뭐, 마츠카와는 애써 생각했다. 그럴 수 있었다. 교내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상당히 인기 있는 녀석이고, 가끔 밖에 나가면 여자 아이들이 그에게 번호를 묻기 일쑤고. 교내에서 계집애들과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3년간 줄곧 봐와서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몸까지 굽혀가며 키 작은 후배와 눈높이를 맞춰주는 꼴에 얼마나 속이 뒤틀리는지.
허. 너무 기가 찬 나머지 콧방귀가 나온다. 하나마키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저런 게 뭐가 좋다고 모여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마츠카와가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고등학생을 넘어선 외모는 단지 아주 약간 표정을 찡그리는 것만으로도 금세 무서운 낯을 자아냈다. 질투하냐? 실실 웃으며 어깨를 툭, 건드리면 상대방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아, 그래. 심지어 수긍하는 꼴이 썩 신경질적이다.
“야.”
“왜?”
그는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하나마키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뭔데? 내 자물쇠 키. 29번 사물함에 있으니까 알아서 꺼내가.
“뭐? 너는?”
“잠깐 아래에.”
“하아?”
그러고는 계단 가운데에서 제 친구를 홀로 두고 저벅저벅 아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너 진짜 나 버리고 가냐?! 비명 같은 울림이 뒤에서 들려도 대답은커녕 걸음만 빨라진다. 긴 다리가 계단 두 개를 한꺼번에 밟는다. 괜히 짜증이 나 속이 갑갑해진다. 마츠카와는 하복의 가장 위 단추 하나를 풀었다.
순식간에 1층에 도달한 그는 오이카와가 보였던 곳으로 향했다. 본관 건물을 빠져나가 팬지꽃 피어난 뜰. 사뭇 사나운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다행스럽게도 그는 여전히 가운데에 있다. 화사한 여자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희희낙락하게 웃는 얼굴로. 마츠카와는 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오이카와.”
낭랑한 목소리 사이로 썩 사나운 음성이 가로지른다. 순간 대화가 훌쩍 멎고, 오이카와 역시 다정한 낯을 바꾸었다. 맛층? 의아한 눈빛이 두어 번 깜박이며 붉은 알고리즘을 만들어냈다. 아. 오이카와는 저 맥락 없이 좁은 미간의 의미를 찰나에 깨달았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다듬으며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할 말이 있어서.”
“아…. 꼭 지금 해야 해?”
“중요한 이야기라서.”
오이카와는 으음, 괜히 고민하는 척 했다. 일부러 말을 끌려는 의도가 훤히 보여 마츠카와가 흉흉한 빛으로 눈짓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결국 그는 제 남자친구를 따라주기로 했다. 그도 알고 저도 아는 뻔한 거짓말에 맞장구치며 오이카와는 서운한 얼굴로 여자 아이들에게 말했다.
“미안. 아마 부활동 관련 이야기일 거야.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다음에 이야기 하자.”
아…. 아이들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풀죽은 얼굴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다음에 더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 그래. 오이카와는 마냥 순진한 1학년 아이들을 향해 방긋 웃어주고는 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을 와해했다. 그들을 가르고 마츠카와에게 다가온다.
“갈까, 맛층?”
눈을 휘는 것이 요사스러웠다. 화를 내고 싶어도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그런 낯이다. 제 꼴 잘난 줄은 알아선. 마츠카와는 그래도 타인에 비해 그에게 덜 휘둘리는 편이었으나, 빌어먹게도 애정은 위대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아스팔드 위로 깔리는 건조한 마찰음. 오이카와는 나란히 그의 발걸음에 맞춘다. 맛층,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넌지시 말을 건네는 상대가 한숨처럼 말한다. 그래. 뭔데?
“매점 가자.”
“하아?”
“아이스크림 사줄게.”
뜬금없는 말에 오이카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푸하하. 폭소를 터트렸다. 고작 아이스크림 먹자고 말하려 부른 거야? 오늘 날씨가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졌어. 맛층은 친구 없어? 매정에 가자고 이야기 중인 오이카와 씨를 이렇게 끌고 나온 거야? 그 놀림조에 소년은 도리어 몹시 곤란한 비밀을 터놓듯이 고백하는 것이다.
“그야 네가 골라주는 걸로 먹을 거니까.”
“애네.”
뭐, 답변이 귀여우니까 봐줄게…. 웃기지마, 봐주는 쪽은 나겠지.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원곡을 알 수 없는 콧노래가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마츠카와는 그 노래도, 방금 전의 제 행동도 전부 우스워 가볍게 웃고만 말았다.
오늘은 생일이다. 이제 저도 나이를 하나 더 먹게 된다. 그러나 배구부 아침 연습에 예외는 없다. 그는 서둘러 준비를 하고 학교로 향했다. 새벽부터 헐레벌떡 나선 탓에 어머니가 황급히 던진, ‘생일 축하한다, 시게루!’라는 말이 등교 전 들은 축하의 전부지만 아침부터 발걸음이 가볍다.
황급히 부실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담뿍 새어 나오고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기운차게 인사하며 문을 들어갔다. 이제 3학년이 되는 선배들과 동기들 몇몇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야하바!”
제 사물함의 문을 열고 짐을 안에 넣는데, 오이카와가 살갑게 웃으며 제 등을 가볍게 툭 친다. 너도 와서 같이 끼자. 네? 뭔데요? 눈을 깜박이며 체육복 위에 걸쳤던 교복 자켓을 벗으니, 그의 옆에 있던 하나마키 선배가 낄낄 웃으며 대신 답했다.
“오늘 마츠카와 녀석 생일이잖아. 깜짝 파티 해 주려고.”
“아…….”
형용하기 힘든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나도 생일인데, 라는 생각과 오늘 마츠카와 선배도 생일이었나? 하는 뒤늦은 자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아니, 뭐. 그러고 보면 선배들이 자신의 생일을 알 리가 없지. 따로 제 생일을 알린 적도 없었고. 보아하니 마츠카와 선배의 생일은 작년에도 챙겨준 것 같고. 그나저나 나도 마츠카와 선배의 선물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저, 죄송한데 선물은 준비 못했는데요. 말하니 이와이즈미는 그게 뭐가 대수냐며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만 있으면 되지, 뭘. 케이크도 우리가 이미 준비했고. 너희들은 우리랑 같이 동참해서 파티 준비랑 폭죽 터트리는 것만 좀 도와줘. 이왕 축하하는 거 다함께 하는 편이 즐겁잖아. 확실히 축하할 법한 날에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끼는 게 좋았다. 야하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리하여 야하바 시게루는 자신의 생일에 선배의 생일 파티를 돕기로 약속했다.
파티는 고등학생들이 급하게 준비하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 뻔했다. 감독과 코치님께 이미 협력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흔쾌히 동의했다. 수업이 끝나고 부활동이 시작되기 전, 감독이 먼저 회의실에 마츠카와를 따로 불러 약 삼십분을 잡아둘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 잽싸게 체육관을 꾸미고, 불을 끄고 있다가, 마츠카와가 체육관에 들어오는 순간 케이크를 들고 등장하면서 놀라게 만드는 거라고. 확실히 주어진 시간이 삼십 분 남짓이기 때문에 스피드가 관건이었다.
계획을 짠다고 다소 어수선했던 아침 연습을 끝내고 1학년 아이들과 다함께 교실로 돌아가는 길, 줄곧 무언가를 고민하던 와타리가, “있잖아.” 야하바를 향해 몸을 짧게 틀었다.
“왜?”
“선배들은 아무래도 선물이 없어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조금 그렇잖아. 음…. 우리끼리 소소하게 돈을 모아서 매점에서 간식이라도 사 드리는 게 어떨까 싶어서.”
그거 좋은 생각인데? 맞아, 괜찮다! 다른 1학년 아이들도 우루루 몰려와 찬성했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다. 도리어 그 편이 저 역시 약간의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았다. 야하바 역시 그럼 점심시간에 다 같이 만나서 선물을 고르자고 말했다. 웃음과 알겠다는 긍정이 자신의 주변으로 와르르 터졌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어설프게 웃으면서 교실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교실은 나은 축이었다. 친한 동급생들이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주었다. 어이, 야하바. 생일이라며? 생일빵이랍시고 등을 팡 때리는 사내 녀석들의 장난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여학생들이 선물로 주는 가벼운 사탕 하나가 보석 같았다. 소년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전부 받아주었다. 역시 생일은 이런 기분이지.
그러나 비로소 제 생일을 만끽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야하바는 멀리 떠밀리고 만다. 점심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동료들은 전부 마츠카와 선배가 좋아하는 과자만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자신 저 역시 오늘이 생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 일처럼 보였다. 마치 축하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이잖은가. 그런 말을 하려면 아침에 진작 꺼냈어야 했다…. 뭐, 그래도 반 아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축하를 받았으니까. 그는 더 열성적으로 선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자 안에 과자를 우겨넣고, 예쁘게 포장도 했다. 사내 녀석들의 손재주가 다 엇비슷하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무늬가 있는 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조금 더 좋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매점에서, 그리고 교실로 데려가 숨기는 과정에서 선배들의 눈에 띄게 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상자를 들고 교실로 들어오는 저를 향해 동급생들이, “뭐야, 야하바. 생일 선물 받은 거야?”라고 물은 것이 착잡하긴 했지만, 이 역시 어떻게든 웃으며 넘겼다.
시간이 흘러 비로소 부활동 시간이 왔다. 삼월의 첫날이고, 자신의 생일인데도 그다지 의욕이 나질 않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일 년을 함께한 자신의 반만큼이나 배구부를 좋아했기에 더 서운한 것 같다. 사실 선배들은 그렇다 쳐도, 와타리나 다른 애들도 제 생일은 까맣게 잊고 마츠카와 선배의 생일을 챙일 줄은 몰랐다. 물론 마츠카와 선배에게 죄는 없지만….
아, 나도 모르겠다.
과자 상자를 들고 도착한 체육관은 매우 바빴다. 누가 구했는지, ‘Happy Birthday’라는 단어가 적힌 큼직한 현수막을 2층 난간에 매달았고, 마찬가지로 난간마다 풍선을 불어 장식해두었다. 야하바도 서둘러 일손을 도왔다. 넘치는 풍선들은 그냥 바닥에 던져두고, 하나마키가 근처의 베이커리에서 사 온 생크림 케이크를 두 개나 꺼냈다. 하나는 작았고, 다른 하나는 배구부들이 한 입 씩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작은 케이크에 초를 꽂는 것을 도우며 물었다.
“왜 두 개나 사셨어요?”
“하나는 마츠카와 얼굴에 던지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먹으려고.”
“과연….”
혜안에 절로 감탄이 일었다. 곧 마츠카와 선배가 당할 꼴을 생각하면, 누구도 제 생일을 모르고 지나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주억이며 정리를 도왔다. 마침내 1학년 각자의 손에 폭죽이 들리고,
“맛층 온대!!”
주장의 외침에 서둘러 체육관의 불이 꺼졌다. 급하게 하나마키 선배가 켠 케이크의 촛불만이 어슴푸레하게 빛났다. 그림자 너머로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따위의 뒤늦게 긴장한 아이들의 허둥거리는 움직임도 보였다. 야하바는 저도 어쩐지 두근거리는 마음에 체육관 문만 빤히 바라보았다. 회의실에서 체육관까지 몇 분 정도 걸리더라? 어림짐작하며 문 닫힌 체육관 밖에서 나는 발소리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던 와중이다.
끼익, 문소리와 함께 어둠 찬 체육관에 햇빛이 조금씩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이었다. 조명 스위치가 있는 쪽에 있던 이와이즈미 선배가 동시다발적으로 불을 켰고, 순식간에 환해지는 시야에 움찔할 틈도 없이 들고 있던 폭죽을 힘껏 잡아당기며 외쳤다.
“마츠카와 선배 생일 축,”
“야하바 생일 축하해!!”
아니, 외치려고 했다. 제가 말을 잇기도 전 먼저 터진 외침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을 터다. 야하바는 따가운 빛도 잊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생일 축하한다, 야하바!”
“이야, 우리 후배. 생일 축하해!”
오늘 생일이지? 서프라이즈 파티~! 팡팡, 터지는 폭죽에서 튀어나온 오색 종이들이 자신의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잠시만, 이제 무슨, 오늘 마츠카와 선배의 생일이 아니었던가? 물론 내 생일도 맞는데. 하지만 이건 마츠카와 선배의 파티라고….
어리벙벙한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 체육관 문 밖에서 들어온 마츠카와 선배는 초가 꽂힌 또 다른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초가 딱 자신의 나이만큼 꽂혀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야하바, 와 마츠카와의….”
어설픈 생일 축하노래가 체육관 안에 울려 퍼졌다. 야하바는, 그러니까 저는 박수를 치면서도 멍청하게 가까이 다가오는 케이크를 보고만 있었다. 이 사람들, 그러니까, ‘깜짝 파티’에서 ‘깜짝’ 놀라게 만들 주체는 마츠카와 선배가 아니라 나였던 거야?
“야, 빨리 초 불어!”
“마츠카와, 너도.”
어느새 노래가 끝났는지, 배구부 일원들은 저희 둘만 빤히 보며 재촉했다. 마츠카와 선배와 눈이 마주치자 어설픈 웃음이 튀어나왔다. 와타리도 그렇고 전부 알고 있으면서 아침부터 모른 척 했다는 거지. 소원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떠밀며 촛불을 후우, 불었다. 마츠카와 선배 역시 하나마키 선배가 들고 있던 케이크의 불을 껐다. 그래도 선배의 생일이 오늘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닌가보다.
“놀랐지?”
마츠카와 선배가 씩 웃으며 물었다. 야하바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 섭섭했다는 건 제 마음속의 영원한 비밀로 붙여두기로 했다.
“원래 이런 게 깜짝 파티의 묘미지.”
“혹시 선배는 이 파티, 알고 계셨어요?”
“내가 수업 끝난 후 빵집에 가서 케이크를 사오는 동안 진짜로 감독님과 면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진짜 그런 줄 알았다. 면목 없다. 세터 자리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침묵하는 제 머리를 엉클인 그가 축하를 건넸다. “생일 축하한다, 야하바.” 사실 가슴이 뭉클거렸다. 역시 배구부가 최고구나. 이곳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다짐할 무렵,
“자, 이건 네 생일 선물.”
유감스럽게도 마츠카와 선배가 줄곧 들고 있던 케이크가 정면으로 제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풉.”
거리가 코앞이었던 터라, 야하바는 피할 도리 없이 고스란히 정면으로 생크림 케이크를 안면에 얻어맞고 말았다. 사람들의 폭소가 우렁찼다. 크림과 빵이 제 얼굴에 뭉개지는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아, 진짜! 야하바는 급하게 케이크를 떼어내며 서둘러 눈만 닦아냈다.
“선배!”
원망스레 곧장 마츠카와를 찾자, 다행스럽게도 저를 대신해 그에게도 공격을 감행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마츠카와의 얼굴을 뭉갤 것이라며 케이크를 무려 두 개나 준비한 하나마키였다.
“야, 마츠카와. 너도 생일이잖아!”
달려드는 하나마키 선배에게서 위협을 느꼈는지, 서둘러 도망치려는 것을 오이카와 선배와 이와이즈미 선배가 붙잡아 억지로 끌고 들어왔다. 양 팔이 고스란히 붙잡힌 덕분에, 마츠카와 선배는 마치 세례 받는 것 마냥 지긋이 케이크에 얼굴을 박았다. 물론 선배는 당하지만은 않았다. 남은 생크림이라고 어떻게든 묻히려고 뛰어다니다가, 결국은 함께 먹으려고 따로 사 둔 케이크까지 들고 던지기 시작했다.
물론 저는 오늘은 특별히 마츠카와의 편이 되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함께 과자를 고르는 중에도 모른 척 잡아뗐던 얄미운 1학년 동료들을 노리고 투척한 것이다. “너무하네!” 비명들이 외쳤지만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솔직히 나도 너희들이 너무하다고 생각했거든. 체육관 바닥이 생크림 밭이 되고, 유다 선배가 그것을 미끄러져 넘어지고, 이윽고 들어온 감독과 코치가 “너희 지금 뭐하는 거야!!” 외칠 때까지 장난은 계속되었다.
십 분 동안 잔소리를 듣고, 삼십 분 동안 뒷정리를 하고, 다시 이십 분을 기합 받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즐겁게 느껴졌다. 뒤늦게 코트에 들어서는 발걸음은 날아갈 것 같고, 와타리가 선물로 건네준 서포터는 제 무릎에 착 들어맞았다. 잠에 들 때까지 이 들뜬 기분 영영 떠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남자인 친구와 영화를 보는 약속을 잡는 것은 특이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라이벌 학교의 에이스와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다.
쿠니미는 귀찮은 기색 잔뜩 내보이면서도 옷장 문을 열었다.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의 주전 선수인 제가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의 에이스와 만난다는 것을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득달같이 이것저것 캐물으려 달려들 것이 분명해, 오늘의 만남은 당사자들을 제하곤 아무도 몰랐다. 작년 겨울 있었던 미야기현 1학년들의 단체 합숙을 말해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합숙에 참여했던 킨다이치마저 부럽다던가, 왜 저는 빼놓고 만났냐고 토라진다면 제 추측은 더욱 자명하다.
데이트도 아니고, 얼굴 아는 남자와 영화를 볼 뿐인데 딱히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두툼한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었다. 꽃봉오리 삼킨 삼월의 끝은 아직 겨울 냄새를 품고 있다. 자고로 옷은 따뜻한 게 제일인 법이다. 소년은 옷을 입고, 가방조차 없이 양쪽 주머니에 각각 지갑과 핸드폰을 넣고 집을 나섰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도 왜 고시키 츠토무가 다른 동급생이나 배구부 동료들을 두고 하필 제게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건지 알지 못한다. 광견이라 불리는 제 부활동 선배처럼 모난 성격도 아니고, 최소한 친한 사람들에게는 썩 살가워 보였는데. 심지어 그조차 대회나 연습시합을 제외한, 즉 사석으로 상대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 메일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되질 못했다. 혼자서 영화 보는 것이 그리도 민망한가. 어차피 저도 보고 싶었던 액션 영화였기에 순순히 응해줬지만….
영화관 앞 동상 근처에 도착하자 약속 시간 5분 전이다. 쿠니미는 약속을 잘 안 잡는 만큼 대개의 경우에서 그럭저럭 약속을 준수하는 편이었다. 홀로 고개를 주억이며 주위를 돌아보던 그는 낯익은 얼굴에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먼저 나와 있었다. 그것도 저런 몰골로.
저런 몰골이라 함은, 아, 쿠니미는 차마 가까이 하기 민망하여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모른 척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잠깐 머릿속으로 갈등했다, 도저히 사내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갈 때 할 차림새가 아니라는 의미다.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지는 않았다. 형광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 썩 준수했다. 그래, 문제는 그 점에 있다.
고시키의 옷차림이 남자 둘이서 영화를 보러간다 하기에는 지나치게 준수했다.
빳빳하게 다린 흰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재킷까지. 누가 보면 소개팅이라도 하러 가는 줄 착각할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바지는 검정색 데님이라는 것 정도. 신발도 운동화다. 정말 다행이군. 쿠니미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앞머리를 필사적으로 다듬는 고시키를 상당히 먼발치에서 응시했다. 손이 시려 후드 주머니에 꽂은 찰나였다. 고시키의 고개가 휘더니 제 코앞에서 멈췄다.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년이 저를 발견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도망도 못 가겠네. 아니, 백 번 생각해도 저기 내가 아니라 예쁘게 입은 여자 아이가 가야할 것 같은데. 영화관이 아니라 조금 비싼 파스타라도 먹으러 가야할 것 같다고. 쿠니미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쿠니미! 고시키가 평온하게 빠른 걸음으로 제게 다가왔다.
“왔어?”
“응.”
“옷 후드티 입었네?”
“그냥 영화 보러 나올 뿐인데 뭘.”
굳이 신경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제 말에 고시키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아…. 그래? 조금 서운한 것도 같지만 도저히 이해 불가의 영역이다. 옷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쿠니미 역시 예의상 한 마디 해주기로 했다.
“오늘 차려입었네. 오후에 데이트라도 있어?”
“뭐?”
“? 데이트 있냐고.”
헌데 반응이 이상하다. 기껏 차려입었다고 말도 해줬더니 도리어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미간을 좁힌다. 넥타이까지 매고 올 정도면 아무리 생각해도 데이트 아니겠냐고. 혹은 가족행사 정도? 이런저런 짐작은 그의 외침으로 인해 끝이 났다.
“나 여자 친구 없어!!”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주위를 지나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쿠니미는 급작스레 민망해졌다. 여자 친구 없는 게 자랑이냐고. 자존심 상했나, 왜 그렇게 소리 지르는 건지.
“그럼 말고.”
쿠니미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영화관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솔직히 좀 쪽팔렸다. 고시키가 그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며 재차 강조했다. 나 정말 여자 친구 없거든? 인기는 많지만! 그래도 관심 있는 여자도 없어! 그 재잘거림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얌전히 무시하려던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하고 알았다. 어차피 그가 누구와 사귀는지 제가 알 바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이래서 피곤한 타입은 질색이다. 영화는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치는 듯했다.
아주 약간 다행스럽게도 고시키가 미리 표를 예매해 둔 덕에 팝콘과 콜라만 사서 들어가면 되었다. 영화 도중에 무언가를 많이 먹는 성격은 아니라, 팝콘도 콜라도 중간 사이즈로 하나만 샀다. 고시키도 제 말에 많이 먹지는 않는다고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입장해 적당히 가운데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 부활동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조명이 어두워지고 광고가 나올 즈음에는 입을 다물고 팝콘을 조금씩 집어 먹었다. 어차피 광고를 볼 때 아니면 뭘 더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팝콘을 집으려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듯이 부딪치고 난 후로 고시키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팝콘에 손을 뻗지 않았다.
“더 안 먹어?”
“아, 어. 난 괜찮아.”
황급히 손사래 치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여 다시 팝콘을 몇 개 집어먹는다. 어차피 팝콘도 제가 들고 있는데, 영화 도중에 어련히 알아서 먹겠지. 애도 아니고. 달달한 캐러멜 맛 팝콘을 다시 한 움큼 쥐려는데 티셔츠의 소매가 흘러내려와 손등을 반쯤 덮는다. 쿠니미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그냥 팝콘을 쥔 채로 빼냈다. 음식을 입 안에 털어 넣은 후 소매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부스러기가 묻지는 않았다. 소매를 살짝 걷고 다시 팝콘을 집는데, 줄곧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고시키가 말을 던졌다.
“쿠니미, 너 그 옷 잘 어울린다.”
“그래?”
가끔 집 근처에 나갈 때 편하게 입던 옷이다. 자주 빨아서 후드 티가 늘어졌을 정도라,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 게 조금 이상했다. 조금 미심쩍게 대답하자 고시키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첨언한다.
“진짜 귀여워 보여.”
그러니까, 뭐가? 쿠니미가 고개를 슬 기울였다. 설마 제가 귀엽다는 뜻은 아니겠지? 다 늘어진 옷이 귀엽다는 것도 상당히 이상한데, 제가 귀엽다는 말은 그보다 열 배는 더 이상했다. 부모님이나 선배도 아닌 저와 동갑인 사내 아이가 말했다는 것도 그 이상함에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러나 “뭐가?” 라고 물으려던 쿠니미의 말은 묻히고 말았다. 조명이 다시 한 번 어두워지며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영화 배급사 광고가 스크린에 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찝찝함을 가득 안고 제 앞으로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쿠니미 아키라. 첫인상은 남자치고 꽤 예쁘장한 애. 서늘한 인상. 여름의 인터하이 지역예선에서 부딪친 적 있었다. 시합에서의 감상은, 역시 내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 특별히 눈에 띈 점은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초입에 다시 마주친 사내애는 무려 선택된 1학년들만 모이는 강화합숙에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낯이었다. 그 때 코트 위에서 본 것처럼.
언제나 에이스에 대한 의지로 충만한 고시키 츠토무는, 어째서 그가 이런 곳에 왔는지 다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키가 압도적인 편도 아니었다. 실제 이번 합숙의 참가자 중에는 2m에 달하는 거구도 있다. 파워로 말할 것 같으면, 백 번 생각해도 저가 더 강하지 않나? 머리는 꽤 좋은 것 같았다. 포즈도 깔끔하고, 굳이 스파이크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꽤 하는 것 같고. 하지만 그게 전부. 같은 포지션인 저가 단언컨대 어딜 봐도 제가 더 우수했다. 배구를 하고자하는 열정마저도.
“킨다이치! 쿠니미 어디 갔는지 알아?”
“윽. 모르겠는데요.”
“도대체 이 자식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일정대로라면 워밍업이었을 테니까…. 잠시 쉬러 간 게 아닐까요.”
코가네가와와 함께 합을 이루고 있던 킨다이치가 찔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점심시간 직후, 원래 예정대로라면 워밍업 겸 자율 연습 시간이었을 지금은 코치의 급작스런 소집으로 인해 무용이 되고 말았다. 다른 체육관에서 연습 중인 시라토리자와 2학년 선배들과의 연습 시합이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워밍업 시간에 워밍업을 해야지, 자리를 내빼는 게 말이 돼?! 코치의 우렁찬 외침에 1학년들 몇몇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코치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체육관 구석에 앉아서 쉬고 있던 츠키시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고시키! 가서 쿠니미 좀 찾아와라.”
“네?! 왜 제가 가요?!”
“네가 우리 학원 내부를 잘 알고 있잖냐.”
하지만 그런 거라면 다른 애들도 있는데! 황급히 시선을 돌려 볼보이나 다른 멤버들을 찾아보면, 녀석들은 어느새 코트 정리를 하는데 분주하다. 분하다!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거지! 찾으러 가지 싫은 거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필사적으로 거부감을 표출하던 고시키는, 쿠니미가 없으면 연습 시합을 진행하지 않을 거란 코치의 으름장에 어쩔 수 없이 체육관을 나서야만 했다.
내부에서 벗어나자마자 금세 냉랭한 바람이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춥다. 고시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스스로 팔짱을 꼈다. 으, 다른 놈들이 나가기 싫다며 뻗댈 만도 하다. 그 녀석은 이런 날씨에 어디에 있는 거람. 카라스노의 꼬맹이는 합숙에 참가하고 싶어도 참가하지를 못해서 볼보이를 자처하는데, 누구는 영광스럽게 강화 합숙에 참가하고서도 짧은 틈은 못 이기고 농땡이라니. 같은 학교의 킨다이치라는 녀석은 자율 연습에도 곧장 열심히 하던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그는 속으로 한껏 투덜거리며 쿠니미가 있을 법한 장소를 추려내 보았다. 애초에 학원이 낯선 소년이 갈 법한 장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행동반경을 감안하면 고작해야 식당이나 기숙사. 개중에서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좋아하는 녀석이라면 다소 거리가 있는 기숙사 보다는 식당 건물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선택지가 좁아 고시키조차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소년은 식당 건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발가락이 곱아든다. 이 추운 날 사람을 고생시키다니. 이래서 의지가 없는 놈들 안 된다. 소년은 그를 만나면 어떤 식으로 화를 내고, 잘난 척을 할지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그려보았다. 특별히 ‘열심히 한다’는 말을 질색하는 것 같으니 일부러 그 단어만 사용해 골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고시키는 호쾌한 에이스를 표방했지만 뒤끝이 길었다. 최소한 한 시간 유지될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저를 고생시킨 장본인은 심술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찾아간 식당 내부는 사람이 텅 비고 없다. 잘못 짚은 걸까. 다른 출구인 개수대로 나가도 마찬가지로 인적은 드물다. 애초에 교사(僑舍)는 문이 잠겨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기숙사인가? 고시키는 인상을 찡그리며 같은 건물의 연결된 화장실로 향했다. 텅 비어 물소리 없다. 아, 정말. 합숙이 싫어서 도망이라도 갔냐고….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틀려는 찰나였다. 고시키는 불현 듯 건너편 계단에서 회색 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늬를 발견했다. 창고와 주방으로 이어지는, 학생들은 내려갈 일도 없는 곳이었다.
“설마.”
말하면서도 고시키는 건너편 계단으로 향했다. 큰 보폭씩 가까워질수록 하늘색 천이 눈에 띈다. 또한 그 위에 둥글게 얹어진 머리통도. 아, 그 녀석이다. 고시키는 직감했다. 입매가 삐뚜름하게 갈라졌다. 보아하니 계단에 쭈그려 앉아 벽에 기대고 있는 것 같은데 게임이라도 하는 건가? 그는 들으라는 듯이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
“야.”
그의 앞에 제 얼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놀란 기색은 보이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색하게도 쿠니미는 손끝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
쌕쌕거리는 숨이 소년이 바로 입술에서 번졌다. 감은 눈. 여태껏 보아온 어떤 것보다 평화로운 낯이 깃들고 있었다, 그에게. 고시키는 삼 초 있다가 돌연 몸을 뒤로 뺐다. 자세가 엉켜 넘어질 뻔 한 것을 벽을 붙잡아 가까스로 면한다. 허억, 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기도 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미동 없다.
아니, 잠시만. 방금 내가 왜 그랬던 거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제 행동이 수상쩍어 양 뺨을 톡톡 두드린다. 도대체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라, 고시키 츠토무. 너는 시라토리자와의 에이스가 될 남자잖아! 괜히 심호흡도 하고. 급작스레 술렁거렸던 마음도 다잡는다. 혹시 또 넘어질 뻔 할까, 제대로 계단에 내려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쿠니미보다 낮은 자리에 서자 비로소 소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무릎을 모아 앉은 채 벽에 기댄 얼굴이 얌전하다. 함께 연습 하자느니, 스파이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말을 할 때 늘 보이던 표정과 전혀 상반된다. 까만 머리카락에 흰 얼굴은 꼭 흑백 영화 같았다. 일정한 박자로 옅게 움직이는 어깨. 호흡하는 소리. 소년은 저도 모르게 그 고요한 박자에 말려들었다. 덩달아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나처럼 잘생겨야지. 얇게 생겨봤자…. 속으로 투덜거려도 시선은 떼지 못했다.
아무리 실내라도 바람만 차단되었을 뿐, 낮은 온도는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쿠니미는 잘도 잤다. 기울어진 머리 탓에 단정하게 반으로 나뉜 앞머리마저 흘러내린다. 고시키는 썩 고아한 움직임으로 소년의 속눈썹에 걸쳐진 앞머리를 바라보았다. 감은 눈이 설핏 찡그려지는 것도 같다. 역시 간지러운 걸까. 깨워야 하는데. 분명 돌아오면 코치가 한 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이 녀석 때문에 내가 추위까지 무릅쓰고 찾아왔는데.
고시키는 최대한 제 손길 신경 쓰이지 않게끔 속눈썹에 걸린 앞머리를 잡아 조심스레 넘겨주고 말았다. 손끝이 실수로 이마를 건들이고, 아, 얌전히 소년의 귀 너머로 넘겨준다. 고시키의 손끝이 머리칼을 타고 내려가, 둥근 귓바퀴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
주름진 눈이 다시 온화해지는가 싶더니, 기어코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열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고시키는 그를 깨울 목적으로 온 주제에 열리는 눈에 몸이 굳고 말았다. 자세는 여전히 그의 머리칼을 넘겨주려던 찰나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여직 몽롱한 눈빛은 흑색이다. 힐끔 올려다본 눈초리가 낯설다. 비슷한 신장, 정확하게는 쿠니미 쪽이 저보다 큰 편이라 (아주 조금이다!) 이런 위치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인 것이다. 고시키는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이대로 깨우려고 했던 것처럼 귀를 잡아당겨버릴까? 하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온 몸이 빳빳해지고, 그가 내뱉는 날숨의 모양을 따라 저도 모르게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어버려서.
“…뭐야?”
아직 잠에 취해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도, 고시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 자리가 몹시 더웠다. 가까워진 겨울에, 보이지 않는 태양이 드러내지 않은 부분을 내리쬔다.
우습게도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단순하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코치님이, 얼른 소, 소집하라고!”
“? 그런데 말을 더듬어.”
“더, 더워서 그런다! 왜!”
“추운 게 아니라?”
입이 말썽이네! 하하하! 춥다고, 그래! 고시키가 급하게 손을 떼 물러서며 어설프게 웃었다. 미쳤다. 미쳤냐, 고시키 츠토무! 이 녀석은 나보다 배구도 못하고, 시종일관 재미없는 얼굴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남자인데! 정신 차리라고!
에이스가 될 남자가 마음속으로 어떤 고뇌를 하던 쿠니미는 몇 번 더 눈을 깜박여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벌건 얼굴을 한 채 멍청한 행동을 하는 고시키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 후 먼저 자리에서 벗어났다. 고시키는 그가 자리를 뜰 때까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제 속을 부정했다.
나는 놀랐을 뿐이다! 그냥 갑자기 잠이 깬 얼굴에 놀란 것 뿐이다! 절대 반한 게 아니다!
쿠로오 테츠로의 친가는 미야기 현 센다이 시 외각의 한적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는데, 번화가로부터는 버스로 사십분 걸리는 곳이었고 바로 뒤에는 산이 깊어 센다이라 해도 도리어 시골에 가까웠다. 그는 매번 여름 방학을 그곳에서 났다. 홀로 사는 할머니가 꽤 편찮았기 때문에, 짧은 여름만이라도 짬을 내어 돌보러 가는 것이다.
소학교 5학년부터 그는 세 번의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쿠로오는 늘 장마의 중간에 미야기에 도착했다. 비구름이 먼 여행을 떠날 때면 할머니의 집 뒤쪽에는 해바라기 밭이 만발했다. 그 집에는 담이 없어 소년은 마루에 앉으면 곧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이를 발견하곤 했다. 가끔은 챙 넓은 모자를 썼고, 반바지 아래로 드러나는 흰 다리에 풀잎들이 쓸려 생채기를 만들었다. 아이는 뛰는 일이 잘 없었고, 걷다가도 종종 걸음을 멈췄다. 드물게는 그의 뒤에는 가쿠란을 입은 다른 사내가 있었다. 쿠로오보다 커 보이는 남자는 아이와 친인척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해바라기 밭 사이에 숨을 때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주위를 살피며 능청스레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케이가 어디 있을까? 주변이 온통 노란색이라 잘 안 보이네.’
그랬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부서지는 금싸라기였고, 쉬이 샛노란 해바라기 사이에 묻혔다. 썩 밝은 성정의 아이는 그럴 때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 숨죽이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쿠로오의 시야에서는 케이의 표정도, 그의 뒤에 선 소년의 표정도 전부 볼 수 있었다.
케이.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온전히 아이의 입을 소개 들은 것은 팔월의 중앙이었다. 그 날 아이는 혼자였고 품에는 배구공을 안고 있었다. 쿠로오 역시 배구를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던 차였다. 지난 한 달, 홀로 훔쳐보던 소년이 저와 같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마루 위에 엎어져 있던 이를 일으키게 하기 충분했다.
“너도 배구 해?”
“누구세요?”
“나, 저기 파란 지붕에서 사는데.”
“저기엔 할머니 한 분 밖에 안 계시는 걸로 아는데요.”
“그러니까, 그 할머니 손자야.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케이는 어린 아이 주제에 흐음, 비음을 뱉으며 쿠로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녀석, 제 형제에게는 썩 밝아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전부 착각이었나. 나이 치고 썩 당돌한 낯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무감각하고 퉁명스러운 소꿉친구를 가지고 있는 쿠로오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도리어 씩, 웃음 지으며,
“사실 나도 배구해. 아, 난 테츠라고 불러.”
선언한 것이다. 아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삼초 후에야 겨우 내밀어지는 손을 붙잡았더란다.
케이의 정확한 이름은 츠키시마 케이였다. 달과 반딧불. 반딧불의 蛍를 쓰고 케이라고 읽었는데, 쿠로오는 그것이 썩 아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금발은 환한 낯이면 유독 반짝거려서, 그는 종종 어째서 해바라기가 소년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통성명 이후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렸다. 배구라는 공통점 덕분이다. 아이는 늘 배구교실이 끝나면 이 길로 왔다. 둘은 해바라기 밭의 한 중앙에서 만나 파란 지붕까지 느리게 걸었다. 나직하게 트인 뒤뜰에서 두 사람은 공을 올리며 놀았다. 케이. 그 아이는 처음에는 경계도 하고, 낯도 가렸으나 어느 정도 소년에게 익숙해지자 곧잘 이런저런 말들을 토로하곤 했다. 형은 중학교 배구부에서 제일가는 에이스라는 자랑이나, 그런 형을 따라 배구를 시작했으나 쉽게 형을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불평들. 이제 갓 배구를 시작한 아이라서, 쿠로오는 미숙하게나마 자세들을 봐주고 아이를 향해 올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빛 쨍한 여름의 끝, 두 사람은 다음 해 여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뭐야. 내가 테츠 씨를 기다릴 것 같아요?”
어쩌면 기약이란 쿠로오에게만 통용한 된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가을에 스무네 번, 겨울에 열두 번, 봄에는 가물가물해졌다가, 여름방학식에 돌연 아이를 떠올렸다. 냉정한 계절 두 번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미야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자동차의 와이퍼가 매초마다 움직였다. 천둥까지 치던 때에 쿠로오는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케이는 할머니 댁에 도착한 후 나흘이 지나 모습을 보였다. 여전히 장마철이었다. 아직 다 못 핀 해바라기들 사이로 노오란 우비가 유독 이질적이었다. 성큼성큼 딛는 걸음은 지난해보다 조금 더 넓다. 쿠로오는 아이의 종아리까지 올라온 샛노란 장화를 보았다. 반은 진흙이었다.
“케이.”
나직한 부름은 빗소리에 묻혔다. 저까지 닿을 리가 없었다. 결국 쿠로오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장화를 신고, 아버지가 곧잘 쓰는 커다란 검정 장우산까지 펼쳤다. 집의 둘레를 따라 피어난 낮은 패랭이꽃들을 훌쩍 넘으면 그는 해바라기밭에 도착했다. 비가 얼마나 강한지, 케이는 우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의 안면은 온통 축축했다. 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라리 우산을 들고 오지 그랬어.”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위로 아이 세 명으로도 충분할 우산을 씌어주었다. 케이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았다. 불퉁해 보이기 십상이었으나 뜻밖에도 반가움을 띄고 있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저 시선을 몹시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예언자도 아닌데, 이렇게나 비가 올 줄 알았나요.”
아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와 나란히 섰다.
그는 파란 지붕 아래에서 잠시간 비를 피했다. 우비를 벗고, 그 안까지 스며든 빗물을 탈탈 벗어내고 쿠로오와 함께 마루 위에 누워서 장마 소리를 조용히 감상했다. 일 년 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 이요. 주로 아이는 대답했다. 내 생각은 얼마나 했어? 대체로 안 했어요. 진짜 너무하네! 딱히 테츠 씨도 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쿠로오는 두 개의 계절을 떠올렸다. 변명할 것이 없어 침묵만 흘렀다. 한참 후에야 아이는 다시 말했다.
“…나중에 블로킹 관련으로 물어볼 게 있는데, 가르쳐줘요.”
쿠로오는 냉큼 알았노라 덧붙였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비가 그쳤고, 아직 축축한 마당에서 두 아이는 공을 들었다. 케이는 최근에야 제대로 된 블로킹을 배웠는데, 쉬이 뚫려버려 불만이라 대답했다. 박는다는 건 단순히 손을 올린다는 것만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니까. 쿠로오는 그렇게 설명하며 몇 번 시범을 보여주었다. 팔에 힘이 없으면 공에 맞아도 블로킹보다 리바운딩 되기 쉬워. 배구에 리바운드가 어디 있어요? 고등학교의 실력 있는 학교들만 해도 자주 리바운드를 시도한다던데. 공이 지면에 박히기 보다는 그저 ‘튕긴다’는 것에 가깝다는 거지.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를 몇 번 따라했다. 팔은 위로 뻗지만 말고, 조금은 아래로 내리고. 소년은 그의 자세를 교정해준다는 핑계로 손끝을 잡아 내려주었다. 케이의 손가락은 보드라웠고 따뜻했다. 아이의 피부는 도쿄에 산다는 쿠로오보다 더 희었다.
“…테츠 씨. 언제까지 손잡고 있을 거예요?”
“케이. 너 손 정말 애기 같다.”
“난 이제 3학년이거든요?”
“아, 아직 아기네.”
케이는 불만어린 표정으로 그를 빤 바라보다가, 손을 뿌리치며 됐다고 말하고선 문을 빠져나갔다. 어, 케이, 삐졌어? 급하게 뒤따라갔지만 아이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케이의 머리 위로 해바라기 수십 송이가 해님마냥 떴다. 그 나이면 아직 아기 맞으면서. 쿠로오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에 여전히 그 연약한 꽃잎이 문신처럼 남았다.
화를 풀어주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으나, 이후로는 다시 옛날처럼 지냈다. 배구공을 올려주고, 지친 날이면 마루에 나란히 앉아 부모님이 잘라준 수박을 먹었다. 그 날 이후로 쿠로오는 종종 홀로 손바닥을 만져보곤 했으나 그 때와 같은 느낌은 결코 나지 않았다. 케이는 어떻게 배구를 하는데도 그렇게 손이 보드라울 수 있을까. 대신 마주 앉아 그의 손을 곁눈질 하는 날이 늘었다. 뭐야, 뭐 묻었어요? 남의 시선에 기민한 아이는 금세 그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쿠로오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온기에 이어 소꿉친구와 다소 흡사한 퉁명스러운 말투가, 눈동자가 소년의 마음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 내일 도쿄에 돌아가.”
“그래요? 잘 됐네요.”
“안 아쉬워?”
그러다가,
“내년에 또 올 거 아녜요?”
“맞는데….”
“그럼 됐죠, 뭘.”
“케이는 오늘도 매정하네.”
도쿄로 돌아온 어느 날, 쿠로오는 자신의 방 창문을 투과해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무심코 제 미야기의 해바라기 밭과, 가운데를 가로지르던 어린 아이를 떠올리고 말았다. 셋 모두 따뜻한 색이었다. 아침 8시 6분에는 햇빛이 침대 근처까지 뻗어와 소년의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는 매일 아침 8시 6분 마다 소년을 떠올리게 되었다.
조금 더 지나서는 햇빛을 따라 등교하는 아침 8시 42분에도, 그리고 태양 아래서 뛰노는 매주 화요일 2교시에도 아이를 떠올렸다. 배구 실력은 얼마나 늘었을까? 꽃이 전부 진 뒤의 해바라기밭은 어떤 풍경일까. 미야기에는 컴퓨터도 또래 친구도 없어 쉽게 심심해졌지만, 케이는 그의 지루함을 곧잘 달래주던 유일한 아이였다. 이번 일 년 동안에는 또 얼마나 키가 자랄까? 블로킹은 많이 발전 했을까. 가능하다면 같은 팀이 되어 배구도 해보고 싶었다. 이번 가을에는 그는 매일 아침 소년을 생각했고, 겨울에는 약간의 훈풍만 돌아도 돌연 미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할머니의 마루. 손끝. 쿠로오는 손바닥 안을 문지르는 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 있었다. 소년을 만진 자리를 고스란히 더듬으며 감각을 회고했다.
그리하여 또 여름이 왔다.
케이는 보이지 않았다.
쿠로오는 비오는 날부터 시작해 줄곧 마루 위에 앉아 해바라기 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보름이 지나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해바라기 밭은 배구 교실이 끝난 케이가 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는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쿠로오는 멀거니 눈만 깜박였다. 저 모르는 사이 아이의 키가 반쪽이 되어 노오란 파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다만 그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향일화들이 일제히 서쪽을 바라보는 날만 몇 번이 흘렀다. 그는 미야기 이토록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케이가 없으니 쿠로오는 놀랍게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선생님이 내어준 방학숙제만 한참을 질질 끌다가 낮잠에 빠져들기만 열댓 번을 넘겼다. 찌를 듯한 더위에 가만히 있어도 전신이 축축해지길 한 달.
그 날은 빗줄기가 길었다. 도쿄로 돌아가기 이틀 전이었다. 짐을 다시 싸는 것조차 아쉬워 한참을 밍기적거리다가, 도망치듯 마루로 나왔다. 실들이 직선으로 뚝 뚝. 내리꽂듯 했다. 마루의 가장자리에는 웅덩이가 고였다. 태양이 없어 해바라기가 묵념했고 드물게 걸어놓은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비와 섞여 뎅그랑 울렸다. 파란 우산이 해바라기의 모가지를 찌르며 제게로 다가왔다. 쿠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혹시나 싶어 물안개에 희미한 인영을 바라보았는데, 우산 안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쿠로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섬광처럼 깨달았다. 키가 조금 더 자랐구나. 혹시라도 달아나버릴까, 그는 우산조차 쓰지 않고 슬리퍼를 찰박거리며 밭으로 뛰어들었다.
“케이!”
어둑한 낮에도 아이에게서는 햇볕 마른 냄새가 났다. 우산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일 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의 키는 3cm는 족히 자랐으나 그 낯은 민둥했다.
“왜 여태까지 안 왔어? 무슨 일 있었어?”
“배구를….”
“난 이사라도 간 줄 알았잖아.”
“그만둘까, 생각했어요.”
뭐? 쿠로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케이의 입술은 파랬다. 그는 아이의 곱슬머리 끝을 매만져 보았다. 눅눅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인상을 살풋 찡그렸으나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다는 소꿉친구를 억지로 끌고 밖에 나가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사연이 뚝뚝 떨어지는 낯으로 말하는 아이에게는 무력했다.
“배구를 그만둬도 일상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진학을 고려하면 나은 선택이고.”
“그럴 수도 있지.”
쿠로오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렇게만 말했다. 아이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제가 말을 꺼내니까.
“형아가, 미안하다고 말하더라고요.”
내가 하기 싫어졌을 뿐인데, 형아가 나한테 사과를 해서…. 도통 이해 외의 발언이었다. 케이가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꽤 조리 있게 말 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정신도 없거나, 혹은 정리할 생각이 없던 탓일 테다. 쿠로오는 가만히 아이의 눈동자를 보다가 되물었다.
“그래서 다시 할 거야?”
“뭘요?”
“배구.”
“…….”
후두둑 파란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머리만 겨우 케이의 우산 안에 집어넣고 있던 터라, 몸은 이미 젖어 으슬으슬하게 떨리던 차였다.
“네.”
아이는 몇 번의 달싹임 끝에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는… 형아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게 싫어요.”
“잘됐네. 나는 네가 계속 배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작은 머리가 요리조리 굴러갔다. 왜요? 중학생으로 보일만한 신장임에도 쿠로오에게는 아쉽게 못 미친다. 빼꼼 올려다보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 그는 씨익 웃었다.
“굳이 여름이 아니더라도, 계속 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칠 수 있잖아.”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는 과장스럽게 표정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우와, 섭섭한데. 이제 가랑비만도 못한 수준이 되어 촉촉하게 하늘에서 물기가 떨어진다. 쿠로오는 축 가라앉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나는 꽤 좋다고 생각하니까.”
“뭐가요?”
“네가.”
그는 돌연 내뱉고는 반 박자 뒤에 덧붙였다.
“해바라기 사이로 걸어오는 거.”
“…별게 다.”
“그러니까 내년 여름에는 올 거지?”
“벌써 내년, 인가요.”
“우리 귀엽지 못한 케이가 한 달 넘게 홀라당 배구교실을 빠져서 벌써 여름방학이 지나버렸거든.”
“그건 테츠 씨가 집 안에서 빈둥거리기만 해서 시간이 지나버린 거죠.”
“진짜 너무하네.”
투덜거리며 쿠로오는 그제사 우산에서 머리를 뺐다. 회색 구름 사이로 햇빛이 슬쩍 모습을 모였다 다시 숨길 반복했다. 해바라기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의 움직임을 가만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그럼 내년에 봐요.”
“그래.”
소년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손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우산을 꼭 쥐던 아이의 손을 덮고.
“내년에 보자.”
대답했다.
그런 여름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고하자면, 약속이 무색하게 저는 더 이상 미야기로 올라가지 못했다. 늦가을에 할머니가 세상을 뜬 탓이다. 먼 지방까지 올라갈 이유를 잃었으니 의미가 없음도 자명하다. 심지어 늙은 노인 홀로 지키던 집까지 처분한 이상에야, 마땅하다. 그는 일 년 정도 매일 8시 6분에서 아이를 떠올리다가, 미야기 없는 여름 이후로는 비오는 날에도 약속을 떠올렸다가, 삼 년이 지날 무렵 아이를 잊었다. 줄곧 품기엔 어린 이야기였고, 미야기와 도쿄에 거주하는, 연락처조차 모르고 두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아이 둘이 다시 만날 확률은 객관적으로 희박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몹시 놀랍게도, 5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 쿠로오 테츠로는 급작스레 그것을 떠올렸다. 익숙지 못한 우연이었다. 심지어 그 아이는 일전 봄에 연습 시합을 이유로 만난 적이 있었다. 헌데 왜 지금에서야 세 번의 여름이 기억났냐 물으면, 글쎄. 기실 그조차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땀이 비처럼 쏟아질 만큼 더워서? 혹은 저희 학교, 네코마가 합숙에 새로 초대했던 미야기 소재의 카라스노의 주전 중에 그 아이와 엇비슷한 노란 빛이 그곳에 있어서? 하필이면, 우연인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의 이름마저 케이이기 때문에?
“쿠로오 씨, 뭘 봅니까.”
“그러니까, 츳키.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 있던가?”
“하?”
뭐야, 쿠로오. 너 지금 카라스노의 1학년에게 작업이라도 거는 거야? 보쿠토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제 어깨에 턱하니 팔을 걸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심지어 츳키 표정 좀 봐. 네가 얼마나 가찮으면…. 가찮다니! 야, 츳키! 날 그렇게 생각했어?! 아뇨. 그것보다 딱 1.5배 정도 심하게 생각했죠. 헉, 돌직구….
그는 상처받은 양 상체를 굽으며 제 가슴을 붙잡았다. 옆에서 보쿠토는 엉뚱한 후배에게 80년대 아저씨처럼 들이대더니 꼴좋다며 낄낄 웃었다. 저희의 장난을 한심하게 응시하다가 이내 아이가, 아니, 츠키시마가, 아니, 케이가 뒤돌아섰다. 쿠로오는 느리게 몸을 다시 곧게 펴며 그가 볼카트를 향해 가는 등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