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퀴디치 경기장으로 향하는 호그와트 성의 북쪽 문에는 마법으로 인해 밤낮 관계없이 따뜻한 기온을 이루는 온실이 이어진다. 기숙사 불문 한 학년의 학생들이 전부 들어가고도 넉넉할 법한 크기의 온실이 정확하게 열 개. 온실 사이의 틈새에서는 근본 없는 녹색 잔디 빼곡하게 방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약초학 교수인 포모나 스프라우트의 관할이지만, 기실 그 크기가 워낙 방대한지라 그녀가 직접 전부 돌보는 것은 아니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각 학년의 온실 일곱 개는 교수가 늘 관리하지만 그 외의 세 온실은 그녀의 총애를 받는 소수의 아이들, 이를 테면 약초학 성적이 늘 O(특출함)를 차지하는 고학년 혹은 후플푸프 학생들이 추가점수를 대가로 돌보곤 했다.


 개 중 모든 온실 중 가장 깜깜하고 삭은 온도를 자랑하는 9번 온실은 약초학 성적이 학년 내에서 제일 우수한 후플푸프의 반장이 관리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실제로 학생들이 섣불리 접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식물들이 대다수라는 교수의 판단 하에 온실의 한쪽에서 은밀히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사내가 불리기에 미숙한 소년은 크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자국 하나마다 짤랑거리는 금속의 마찰음이 망토 주머니에서 달랑거렸다.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나붓하게 흐트러진다. 호그와트 성에 설치된 거대한 시계탑이 댕댕 소리를 냈다. 4시를 가리키는 소리였다. 오후 수업이 30분 남았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치카라!”


 회랑을 지나자 뻥 뚫린 아치 무늬 칸칸이 망토의 끝자락이 박혔다. 예민하게 노란 안감을 포착한 소년이 쩌렁쩌렁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엔노시타 치카라는 걸음을 다소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 햇발 짠하게 내리쬐는 분수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소년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의 색은 명백하게 붉다.


 “유우.”


 엔노시타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 변신술 수업 듣는 거 아니었어?! 니시노야의 물음이 한산한 회랑 사이 정원을 온통 적셨다. 그만한 울림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그런l데 왜 벌써 나와? 엔노시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같음 호선임에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과제 제출일인데 내지도 않고 수업을 땡땡이 친 놈이 있어서.”


 맥고나걸 교수님의 특명이야. 잡아서 교무실로 대령하라셔. 니시노야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제 바로 위나 아래 학년과 달리 유난히 저희 동기들이 조용하다는 평을 듣곤 하지만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언제나 그리핀도르는 ‘고요’라는 단어의 예외로 적용이 되며, 저 말은 엄연히 비교급이다.) 그렇다고 사고치는 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능히 주인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대신 나 어둠의 마법 방어술 리포트 작성하는 거 조금만 도와,”

 “됐어.”


 그는 무심하게 잘랐다. 어디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유우. 너도 이제 6학년이잖아. 숙제는 스스로 해야지. 니시노야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네 걸 보고 베끼자는 게 절대 아니라…. 엔노시타는 제 친구를 향해 잔소리를 하는 대신 빙긋 웃는다. 소년의 입이 꾹 다물렸다. 명백한 패배였다. 승자는 저녁에 연회장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회장을 건너 익숙한 문으로 나오면 후덥지근한 온도와 함께 온실들이 있는 마당이 펼쳐졌다. 성 가장 가까이에 있는 2번 온실에서는 교수가 3학년 학생들과 함께 수업 중인지 말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이곳이 온실이 아니었다면 초상화나 유령들의 대화로 착각할 성 싶었다. 반투명한 흰색 유리 너머로 머리 낮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는 전부를 가로질러 9번 온실로 향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하자면, 엔노시타 치카라는 그 온실의 열쇠를 가진 유일한 학생이다. 문장에는 맹점이 있다. 말인즉슨, 9번 온실은 그 위험도와는 달리 굉장히 고전적인 출입문을 지니고 있으며 마법을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온실을 출입할 수 있었다. 증거로 막 당도한 온실의 문은 살짝 열려있다. 알로호모라는 1학년도 쓸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물론 올해 교수가 엄하게 출입을 제한한 장소에 함부로 발 딛을 1학년은 없지만. 이로써 예상은 확신으로 진화한다. 그는 한숨과 함께 완전히 문을 열었다. 지상에 있는 온실보다는 마치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나 더욱 어울릴 법한 환경이다. 빛 한 점 없는 온실의 양쪽으로 송곳니 제라늄들이 있었고 안쪽은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흑색이다. 아니, 검어야만 했는데.


 그러나 줄기가 얽히고 틈을 메워 넝쿨을 이루는 거대한 온실의 끄트머리에서는 흐릿한 눈부심이 보였다. 마치 머글 역사의 첫 문장 같았다. : 태초에 빛이 있었다. 칠 년 전 읽었고 일 년 전 목도한 것이다. 엔노시타는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검은 넝쿨들이 파동을 따르듯 꿀렁인다. 막대 끝에서 구석진 것과 전혀 다른 빛이 타올랐다.


 비로소 그는 제 기숙사 방만치나 익숙한 온실의 내부를 정확하게 보았다. 밝은 빛에 거대한 줄기들이 급하게 꾸물거리며 그의 주위를 피한다. 식물들이 움직이는 마찰음에 제라늄들이 입을 움직였고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따닥따닥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썩 위협적이었다. 지팡이로 바닥을 가리키자 악마의 덫들이 느릿하게 길을 만들어주었다. 자정의 금지된 숲을 고스란히 축소해 옮겨놓은 듯하다. 엔노시타는 익숙하게 그들이 도피하여 자아낸 길을 따라 걸었다. 팔뚝보다도 두꺼운 줄기들이 제 옆을 아슬하게 스친다.


 이윽고 그는 태초에 도착했다. 빛과 함께 소년이 있었다. 분명 필치가 순찰 중에나 사용하던, 비마법사식 전등을 제 위에 건 채 누워 있는. 삐딱하게 꼰 다리를 덮은 망토의 색은 기실 저보다 더욱 이 음습한 9번 온실에 어울렸다. 늪 마냥 늘어진 음울한 초록. 엔노시타는 소년이 눈을 뜨도록 종용했다.


 “후타쿠치.”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놀이 하지 마. 안 자는 거 알고 있어.”


 한 마디 덧붙여서야 소년이 눈을 떴다. 누런 전등 아래 갈색 눈동자가 주홍을 머금었다. 살풋 찡그린 얼굴마저 객관적으로 수려한 얼굴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그게 뭐야.”

 “머글 동화가 있어. 저주에 걸려 공주님이 영원히 잠에 들게 되는데, 왕자님의 키스로 깨어나지.”

 “그거 사랑고백으로 들어도 되는 부분?”

 “아니. 아직은.”


 그 단조로움이 애매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어 그는 얼굴을 구겼다. 후플푸프 주제에. 읊조리자 선한 눈매가 저를 쫓아왔다.


 아무리 동기이고, 일부 수업은 함께 듣는다 하더라도 두 사람에게서 접점이 생기기는 쉽지 않다. 순혈과 혼혈. 슬리데린과 후플푸프. 슬리데린은 그리핀도르와 대척점이지만 그렇다고 타 기숙사와 관계가 원만한 것도 아니었고, 특히 오소리들은 모조리 얼간이 취급하며 무시하곤 했다. 후타쿠치의 일탈이 완전히 엔노시타의 장소가 아니었더라면 이렇듯 편하게 말 섞을 일은 칠년 내내 없었을 것이다.


 “맥고나걸 교수님이 화가 나셨어. 슬리데린 10점 감점에 당장 널 교무실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시던데. 정확하게는 ‘오늘까지 마감이었던 리포트를 들고 온 후타쿠치 켄지’를 교무실에 두라고 하셨지만.”

 “제길.”


 들켰나. 소년이 낮게 욕설을 지껄였다. 애초에 6학년 이후로는 O.W.L.s에서 E(우수함) 이상을 받은 학생들만 수업에 참가할 권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과목당 수강생이 한 학년의 학생들을 죄 끌어 모아도 스무 명이 넘지 못했다.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쪽이 멍청이지.


 “그러게 땡땡이도 봐가면서 치지 그랬어?”

 “후플푸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놀라운데.”

 “성실은 후플푸프의 특성이지만, 후플푸프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지. 그것이 설사 같은 후플푸프라 해도 말이야.”


 엔노시타가 녹스, 말을 입 안으로 웅얼거리며 빛이 꺼진 지팡이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빛이 개체가 줄어들자 두 사람의 주변을 에우던 벽이 움직이지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머글식 전등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고, 이것이 있는 이상 악마의 덫은 두 사람 사이를 침범할 수 없다. 빈손을 앞으로 내민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성실은 강요하지 않는다며?”


 후타쿠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가장 눈에 띄는 세 개의 손금을 응시했다. 아직은 깨끗했다.


 “지금은 내가 받은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 거고.”


 그래서 그는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키는 대신 제 위의 랜턴을 내려 녹이 슨 손잡이를 쥐어주었다. 작은 심술이다. 흔들리는 빛을 피해 멀찍이 물러나 있던 마법 식물이 다시 천장을 장악해온다. 명암이 기이하게 뒤섞여 줄기의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을 강조했다. 엔노시타는 묵묵하게 손전등을 든 채 동기를 내려다본다. 이제 눈동자로도 모자라 온 얼굴이 금싸라기 뒤덮은 몰골이다. 여전히 빛이었다.


 “정말 귀찮게 하네.”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그리고 시라부도 꽤 화가 난 모양이던데. 슬리데린의 반장을 들먹이자 후타쿠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금세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망토를 두 번 털고 두른다. 넥타이도 셔츠도 꼴이 엉망이었지만, 엔노시타는 손을 뻗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다듬기에 한손이 모자랐다. 대신 그는 등을 돌렸다. 숲의 길잡이, 어떤 사냥터지기처럼. 소년이 만든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등불이 깜박일 때면 식물들이 가까이 다가갔다 물러나길 반복했다.


 악마의 덫이 만들어낸 동굴 아래로 발소리만 타박타박 울렸다. 엔노시타는 불청객을 먼저 내보낸 후에야 전등의 불을 껐다. 유리벽과 바닥을 재차 기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마냥 스산했다. 그는 전등을 온실 안쪽의 문에 걸어 놓은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누차 말하지만, 여기는 허가 받은 학생 외에는 출입금지 구역이야.”

 “스프라우트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한 번 더 들어오면 이번에는 내가 감점 시킬 테니까.”


 아하, 이런 게 직권 남용이라는 거지? 후타쿠치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며 엔노시타의 망토에 붙어진 반장 배지를 응시했다. 소년은 어깨만 단번 으쓱이고는 온실 문을 열쇠로 잠갔다. 쇠 부딪치며 내부의 잠금쇠 걸리는 소리가 귓속을 후볐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멍청하기는.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제 속마음을 내뱉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그 전등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 놓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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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가 한낮이라 그림자가 가장 길었다. 그늘의 첫점에는 여느 때보다 화려하게 증축하고 쌓아올린 에도가 있었고 끄트머리에는 붉은 등과 화려한 화장으로 속내 죄 가린 일본 최대의 홍등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요시와라라 불렀다. 해와 달이 바뀐 곳을 들어서면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오롯이 저가 가진 재산만으로도 여자를 품고 하루를 호사할 수 있는 곳. 가난한 시정잡배는 뒷골목에서 선 채로 급하게 싸구려 창녀를 안았고 부유한 자는 금칠 된 방 안에서 우수한 게이샤들의 기예를 즐기며 술잔을 기울였다.


 요시와라에서는 유녀들 역시 능력과 나이, 외모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어졌는데, 오이카와 토오루라 함은 중간, 혹은 그 조금 위였다. 손님을 받기 위한 용도의 개인 응접실과 저가 머무는 개인침실이 따로 나뉜 정도. 어미 역시 기녀였으나 출중한 외모로 인해 어릴 적부터 유녀로 교육받고 남창이 되었다. 춤, 노래, 화술, 밤기술 무엇 할 것 없이 괜찮으나 남창이라는 사실만으로 요시와라에서는 다소 천대받은 축이었다. 한때 막부의 높은 개들이 제 가신이나 견습 무사를 코쇼(小性)로 삼아 비역질을 했다곤 했지만 오래 전 전국 시대의 일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들도 가슴 몽글하고 부드러운 여성을 선호했고, 물론 여전히 동성을 끌어안는 자도 있지만 사회적인 시선 탓에 함부로 성향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여 그는 당연히 28살이 되어서도 평생 요시와라에 남아 있겠거니, 생각했다.


 헌데 그 어마어마한 낙적료를 지불하고 저를 요시와라에서 빼내겠다, 라?


 아침이 되었고 이제야 잘 시간이 되었지만 오이카와는 좀처럼 잠이 들 수 없었다. 얼룩덜룩한 몸을 씻고 유카타를 걸쳤다. 남성용임에도 불구하고 천 자체는 유녀들과 다름없이 천박하고 화려했다. 가게 앞을 지키던 시중 하나가 안자냐고 질문하기에 가볍게 산책만 하고 들어겠노라 답하고 나왔다. 자신의 가게는 매출의 반까지는 아니지만 반의 반 정도는 차지하는 좋은 상품에게 꽤 너그러웠다.


 매일 축제와 행사가 열리던 큰길은 손님이 전부 빠져나가고 쓰레기로 황량하다. 까마득하게 높은 가게들이 나무문 닫은 채 암전해 있다. 걸음마다 다리 근처에 수놓아진 붉은 매화가 살랑거렸다. 햇살이 오이카와가 선 길을 짠하게 비춘다. 편편한 흙길이 유리밭처럼 반짝였다. 지금은 싸늘한 이 도로도 봄이 오면 벛꽃놀이로 만연할 것이다. 본디 나카노쵸의 벚꽃놀이는 유명했다. 봄에만 옮겨와 심었다가 꽃이 지기 시작하면 나무 째로 뿌리 뽑아 버린다는 점이 흠이지만.


 요시와라의 가장 큰 길을 주욱 거슬러 올라가면, 까마득하게 요시와라의 유일한 입출구가 보였다. 감히 보면서도 넘지 못하는 대문. 오이카와는 어귀에 선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2층짜리 단촐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그 앞에 선 한 사내가 오이카와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차림새는 화려한데 이제 막 태양이 핀 아침에 요시와라를 나가려는 간 큰 유녀는 누구도 없었다. 그렇다고 뒤늦게 나가는 손님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내는 쉬이 눈앞에 선 자의 정체를 추측해냈다.


 “오이카와.”


 퉁명스럽게 이름을 불러보자, 오이카와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이와쨩. 애초에 외출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소매가 덜렁거렸다.


 “문 앞에 번 안 서고 있어도 돼?”

 “유곽도 아니고, 여기에서 집회소 앞에서 왜 번을 서냐.”

 “흐흥. 그럼 계속 오이카와 씰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가? 설마. 이와이즈미는 마땅히 코웃음 쳤다. 기실 의도야 빤히 보이지만,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만 말았다. 만약에 여기서 확답을 바라고 캐묻는다면 도리어 왜 자야할 시간에 제 나와 있냐고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뭉툭한 신발에 쓰레기가 걸려 밀어낸다.


 “오늘은 왜 또 안자고 나왔냐.”

 “음, 새벽에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뭔데.”

 “요즘 자주 오던 손님 있지? 자기 집안이 쿄랑 무역을 한다고 자랑을 하던 새파란 애송이.”

 “그래.”

 “걔가, 저가 낙적료를 지불할 테니 함께 요시와라를 나가지 않겠냐고 하는 거야.”

 “…….”

 “나한테 단단히 빠진 것 같지?”


 여상히 웃었다. 햇빛이 오이카와의 얼굴에도 내렸다. 한잠 자지 못해 퀭해야 마땅할 텐데도 반짝인다. 이와이즈미는 잠시 침묵했다. 오이카와의 손을 잡아줄 수는 없었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제 왼팔이 비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잘됐네.”


 너, 요시와라 밖을 궁금해 했잖아. 그래서 돌아온 후로 계속 나한테 이야기 해달라 찾아왔던 게 아니었어? 오이카와는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와이즈미는 갓난아이 적 요시와라 외곽의 논에 버려진 것을 요시와라의 자경단인 시로베에 중 하나가 주워 이곳에 입성하게 되었다. 오이카와와 마찬가지로 붉은 홍등가가 고향이 되었으나 귀속된 처지는 아니었다. 그는 원한다면 충분히 자유롭게 요시와라를 빠져나갈 수 있었고, 실제로도 오년 전 검 하나 달랑 들고 빠져나갔었다. 당시 견습 유녀였던 오이카와는 가지 말아달라고 그의 옷깃을 붙잡고 울었더란다.


 “그건 핑계였고. 난 그냥 이와쨩이 보고 싶어서 찾아갔을 뿐이야.”


 그러나 결국 이와이즈미는 빠져나갔고, 이년 후 텅 빈 팔 한 짝과 함께 다시 요시와라로 돌아왔다. 왜 그가 돌아왔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시로베에가 되어 오른손에 창을 들고 순찰을 돌지만, 아직도 오이카와의 옷장 안에는 제 손과 함께 잘린 건조한 천자락이 남아 있다.


 “네가 없는 곳이면 요시와라 안이든 밖이든 하등 차이 없어. 어차피 섹스 없이 돈을 벌 방법도 잘 모르고.”


 오이카와는 말했다. 고백인 것조차 인식 못하고 깜박 넘어갈 정도로 무던한 투였다.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찡그렸으나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싸구려 검은 무명과 윤기가 흐르는 매화가 종종 부딪쳤다 떨어진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거절하든 말든 돈을 주고 날 빼낼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를 테면 원래는 평범한 남창이었다가 이제는 전용 남창이 되는 거지. 꽃잎은 없다.


 “사실 어차피 박히는 거, 한명에게 박히든 여럿에게 박히든 상관은 없는데 나가면 다시는 이와쨩을 못 보잖아.”

 “…….”

 “그건 싫어.”

 “…….”

 “그래서 그런데, 이와쨩. 이와쨩은 요시와라 밖을 이미 알잖아. 어쩌면 내가 몸 팔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지도 모르고.”


 남자는 고운 눈으로 조심스레 오랜 소꿉친구이자 짝사랑을 흘겨보았다. 단단한 표정. 괜히 침을 꼴깍 삼키고, 아무렇지 않게.


 “우리 같이 나갈까?”


 제안했다. 이 말을 듣는 당사자가 자경단의 일원이라는 것도, 그리고 자경단의 가장 큰 임무가 바로 요시와라에서 도망치려는 기녀를 처리하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 오이카와로서도 이 말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흘 내로 온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일 밤이야. 오오히케(大引け)[각주:1]가 부딪칠 때. 나도 남자니까, 평범한 옷을 입으면 조금 반(番) 같아 보일 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오년 전,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때. 이와이즈미는 오 분 동안 침묵했으니까. 그리고 이년을 돌아, 제게 요시와라 밖이 그리도 활기차고 좋더라 투박하게 설명해주면서도 너는 다시 내가 있는 거리로 돌아와 주었으니까. 그는 5분의 침묵을 믿었다.


 “뭐, 같이 안 가주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도망이 들키면 죽어야 하니까, 이왕이면 네가 날 죽여주었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네게 죽든, 너와 도망을 가든 오이카와 씨에게는 전부 썩 괜찮은 최후일 테니까. 오이카와는 빙긋 웃으며 가볍게 발을 디뎠다. 부러 그늘을 피해 땅따먹기 하듯 폴짝폴짝 뛴다. 그렇게 성큼 이와이즈미를 앞서가, 다시 돌아온 자신의 가게 앞에서 몸을 틀었다. 여기까지 다시 5분.


 “기다릴게.”


 낮이 가까워지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오이카와의 머리칼이 이와이즈미의 발등을 덮는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침묵했다.






  1. 나무토막. 부딪쳐서 울리는 소리로 요시와라 하루의 끝을 전한다. 새벽 2시에 울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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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되어야 피는 꽃이 있다. 요시와라에 사는 꽃들이 그랬다. 계집 혹은 계집 빼닮은 사내 놈들이 거주하는 그 골목은 낮이면 어둑했고 밤이면 진정 붉은 등을 걸었다. 운명처럼 벌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변두리 골목에서는 요타카[각주:1]가 주정꾼들을 향해 다리를 벌렸고 조금 더 밝은 빛 붉은 빛을 이끌려 홍등 따라가면 여느 성 못잖게 화려한 고급 유곽이 있다. 평민들은 감히 보기조차 어렵고 귀족들마저 쉬이 하룻밤 보내기 어려운 타유나 코우시 따위가 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그 유곽 몇 층 위 창가에서 흰 다리가 달랑거린다. 타유들은 그 고운 얼굴 한 번 내비치는 것조차 꺼려하거늘 이상한 일이었다. 익숙한 요시와라의 주민들은 무시하거나 혹은 저 아래 바닥에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토오루 씨, 또 그러시는 거예요? 그럼 다리의 주인은 화장하여 붉은 눈가를 살풋 접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토오루(徹). 유녀에게 붙이기엔 어색한 이름이나 계집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키, 그리고 판판한 가슴을 보면 납득했다. 요시와라에는 남창도 극소수지만 더러 있었다. 검은 바탕에 꽃이 화려하게 수놓인 여성용 유카타를 헐렁하게 차려입고 담뱃대를 흔들거리는 꼴이 퍽 요사스러웠다. 분명 저 바닥에서는 살랑거리는 다리 안쪽까지 은근히 비치리라.


 사내는 제게 인사하는 카무로[각주:2]가 막 한 남자에게 붙잡히는 것을 보았다.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는 모양이, 아마 저와 자려면 얼마가 필요하느냐 묻는 것 같아보였다. 저 아이는 얼마냐고 말했을까? 잘은 몰라도, 그가 우울한 기생으로 뒤 도는 꼴을 보아하니 중년 치의 재산을 한참 웃도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가느다랗게 웃으며 창틀에 여유롭게 걸터앉아 담배를 태웠다. 힐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지만 저를 찾으러 오는 손님은 보이질 않는다. 아, 가게를 들어오는 미부의 다이묘와 눈이 마주쳤다. 토오루는 경박스럽게 손을 크게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맛층! 저 아래에서 다이묘의 헛웃음이 눈에 훤하다. 그는 소매에 넣고 있던 손 하나를 빼어내어 작게 흔들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어느 괜찮은 계집 하나를 물고 하룻밤을 즐기겠지. 토오루는 그리 생각하며 멋대로 콧노래를 불렀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요시와라의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손님이라 칭할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실내에 있어 호객꾼들도 슬슬 자리를 뜨고 거리는 고요해진다. 본디 요시와라의 모든 가게는 자정에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이 유곽의 유일한 고급 남창의 방은 아직 고요하다. 음, 슬슬 이와쨩이 잔소리를 하러 들어올 시간인데. 제 집 앞마당의 모습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다. 오늘은 오질 않는가? 하며 다시 한 번 살피는데 때마침 익숙한 하카마 자락이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그 머리통도. 오이카와는 입술 가늘게 벌린 채 담배 연기를 흘렸다. 눈이 마주친다.


 ‘위험하다.’


 라고 사내는 입을 벙긋거렸다. 시력 뛰어난 오이카와는 능숙하게 그 말뜻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 역시 입을 뻐끔거렸다. 그럼 내려줘. 회색이 음절마다 섞였다. 그는 저를 빤 응시하던 사내가 이내 유곽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오늘은 독수공방이 아니겠구나. 천진한 어린 아이마냥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등에서 낭랑한 계집아이의 말소리가 울린다. 토오루,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그래. 술상은…. 필요 없어. 오늘 손님껜 과분한 대접이잖아? 문소리, 발소리, 네 목소리.


 “위험하다고 말했었다.”

 “내려달라고 했잖아.”


 토오루는 저보다 큰 팔이 저를 감싸는 것을 보았다. 내 몸값이 얼만지 알면서, 이렇게 만져도 돼? 농담 삼아 지껄이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아무리 곱게 만들어졌다 한들 결국 장성한 사내를 안아 올린다.


 “항상 늦네, 와카사마(若さま)[각주:3]는.”

 “기다렸나?”

 “이 토오루 씨가? 설마.”


 그는 화사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1인용으로 깔린 침구 위로 꽃음절이 포개어진다. 사내는 입맞춤에 다시 한 번 잔웃음들을 터트렸다. 기다렸다는 말이랑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중간 쯤 되는 유녀들이나 아무렇지 않게 손님께 아양을 떨며 비위를 맞추나, 그 정도 되는 자면 달랐다. 타유를 하룻밤 가지는데 드는 비용은 수만, 수억을 호가했다. 심지어 그녀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멋대로 손님을 거절하기도 했다.


 “근래 나 말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나?”

 “토오루 씨야 원래 인기가 많지.”


 그는 농조 섞은 채 말했다. 기실 진실이라, 맞은 편 사내는 얼굴을 슬쩍 찡그렸다. 내가 아는 얼굴이 있었나? 글쎄…. 느긋하게 말을 흘리며 토오루는 다리를 올려 사내의 어깨에 발을 걸쳤다. 자연적으로 검은 천이 흘러올라갔다.


 “확인해 볼래?”


 자뭇 순진한 척 눈을 깜박였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대단한 사내라도 결국 제 다리 사이에서 짐승처럼 허덕일 것을 알았다. 예상대로 우시지마는 단단한 손으로 뼈 움푹 튀어나온 발목을 우악스레 잡아 벌렸다.



 자아낸 교성이 결국 애원 섞인 흐느낌으로 변모했다. 긴 밤이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사내가 알려준 것은 와카토시라는 이름이 다였지만 토오루는 그의 정체를 완벽하게 알았다. 천황마저 힘을 잃게 된 지금 일본을 발아래에 둔 남자. 우시지마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작 11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쇼군이 되었다.[각주:4] 꽤 선정(善政)을 펼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정도 되는 기녀라면 단순히 밤기술 뿐만이 아니라 기예, 문학, 정치 모든 방면에서 우수할 줄 알아야 한다. 토오루의 경우에는 이래뵈도 사내인 탓에 검까지 다뤘다. 그래서 더욱 우시지마의 이름을 빈번하게 들었다. 그 사내, 어린 나이부터 그토록 뛰어난 것도 모자라 무예까지 대단하더라고. 소꿉친구, 그러나 결국 유곽의 불침번에 불과한 이와이즈미와 함께 검을 배우면서 생각했다. 그러면 내 검이 더 나을까, 그의 검이 더 나을까? 이런 식으로 검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토오루.”


 실오라기 하나 없이 드러난 나신 위를 흰 천이 덮는다. 우시지마가 걸치곤 온 하카마였다. 토오루의 방에는 같은 하카마가 오십육 개나 있었다. 그와 정사를 치르기 시작한 날부터 우시지마는 매번 사정 후 그의 몸을 가려주기라도 하려는 양 제 하카마를 덮어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배려가 아닌, 소유욕의 일환일지도 모른다고 토오루는 종종 생각했다. 아니, 혹은 다른 놈들에게는 맨 몸 드러내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일지도.


 “왜?”


 그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최근에는 성장에 따라 몸이 단단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역질은 피곤했다. 특히 저 사내는 퍽 집요한 구석이 있어 토오루가 지쳐서 울음을 터트릴 때까지 몰아붙이곤 했다. 그러면서 정작 끝에는 이렇게 다정한 척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나와 함께 가자.”


 고백하고.


 “하아?”

 “행복하게 해 주겠다.”

 “또 이러네.”


 그는 웃음을 흘렸다. 나 담배. 말하며 손을 내미는 것에 우시지마는 몸에 좋지 않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재촉하는 까딱거리는 손짓을 외면하곤 그는 여상스레 말을 이었다.


 “말은 않았지만, 너도 내가 누구인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알지.”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니 함께 가자.”


 으음. 토오루는 베개 위에 완전히 묻고 있던 얼굴을 조금 비틀었다. 눈덩이 위에 바른 붉은 가루가 엉망스로 흐트러져 뺨까지 내려왔지만, 그도 상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늘게 한쪽 눈만 떴다. 남자의 허벅지와, 그가 깔고 앉은 제 옷을 보았다.


 몇 달 전에 제게 함께 가자기에 달라고 했던 비단이었다. 다이묘나 지어 입을 법한 귀한 천을 받아 저 옷을 지었더란다. 얼마 전에는 검을 달라고 했다. 우시지마는 제 직속 장인을 닦달해 누구보다 화려한 검을 주었다, 장식용에 불과해 대련으로는 전혀 쓸 수 없는 게 유감이었지만. 바로 직전에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를 주었다. 그럼 이번에는….


 “성(城)을 주면 함께 갈게.”

 “성?”

 “이번에는 진짜야. 사실 내 고향은 아오바였거든.”


 희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라고 그는 지껄였다. 우시지마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은 변치 않는다. 오이카와는 그가 보일 반응이 궁금하여 고개를 조금 더 사내를 향해 튼다. 창문 너머 어디선가 제 동지들의 신음과 샤미센 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안색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는 삼 초 뒤 그래,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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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견습유녀 [본문으로]
  3. 도련님 혹은 서방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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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와오이 요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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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그런 문장이 있다.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을 예상하게 되는 언어. 실제로 들은 적은 몇 번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 전부터 제 곁에 도사리고 있던 것 같은 말. 앞뒤를 논하기 전에 발작적으로 거절하게 되는 그런 것.


 “시라토리자와로 와라.”

 “싫은데?”


 이를 테면 지금 우시지마가 지껄이는 말이 그랬다. 오이카와는 사실 그의 가늘게 찢어진 입술 사이로 옅은 바람을 내보낼 적부터 제게 무슨 말을 할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껏 5번은 들었나? 우시지마의 얼굴을 볼 적마다 자연스레 저 제의가 연상되리만큼 질린 문장임에도 막상 헤아려보면 그 수가 생각보다 적다. 얼마나 제게 충격적이었으면 습관으로 받을까. 그는 척수반사로 말을 뱉었다. 우시지마는 마땅한 수순으로 미간을 좁힌다. 그러나 그 간극이 손톱만도 못했다.


 “네 실력은 썩히기에 아깝다. 분명 그곳에서는 평생 전국에 가지도 못할 터인데.”

 “시끄러워. 이번 봄고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거든? 너도 시라토리자와도 쳐부수고 보란 듯이 도쿄에 가줄 테니까.”

 “재미있는 농담이군.”


 아악! 오이카와는 제 선전포고가 단숨에 농담으로 치부 당하자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떻게든 얼굴을 구겨도 제 안에서 불나는 것을 고스란히 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지만! 않았다면! 좋을 텐데! 아니, 사실은 평생 만나지 않는다면! 오이카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덩달아 포장된 서포터 비닐이 엉망으로 구겨진다.


 물론 센다이는 미야기 현에서 가장 대표되는 도시였고, 그만큼 스포츠샵도 다양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리 센다이 일지라도 ‘가장 유명한 스포츠용품점’은 하나라는 것이다. 아, 여기서 여름 세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어제 연습 때 쓰던 서포터 한 짝이 너무 닳아 흘러내리지만 않았더라면 오늘 이곳에 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오이카와는 반쯤 짜증스레 외쳤다.


 “왜 너는 그렇게나 날 못 들여서 안달인데?!”

 “? 그야 당연히 네가 올려줬던 토스가 가장 훌륭했기 때문이다.”


 우시지마는 담담하게 찬사했다. 와중에도 제 질문이 이상하다는 양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모습이 짜증났다. 이미 그 되도 않은 찬사에 감사하기엔 오이카와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시라토리자와도, 국가대표도 어지간히 세터 가뭄인가 봐? 오이카와 씨의 토스가 가장 훌륭했다는 것을 보면. 빈정거리려는 찰나,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입이 움직이려는 것에 아랑곳 않고 먼저 물었다.


 “그러는 넌 왜 나를 거절하지 못해 안달인가?”

 “…….”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답 않았다. 처음 듣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사내의 성정을 생각하면 저가 먼저 비슷한 질문을 던졌기에 그 역시 깊이 마음 두지 않고 되물은 것이 분명했다. 당연하게 그의 의도를 추측하다가, 이번에는 어째서 자신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 한탄했다. 그는 한숨처럼, 그러나 그마저 끊을 듯 단호하게 말했다.


 “패배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네 방식이 끔찍해.”

 “패배에 가치가 없는 건 당연하지 않나?”

 “단순히 이득을 논하는 게 아니라 너는 그것에 아무런 의미도 붙이지 않잖아.”


 목소리가 다소 서늘했다. 멀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다. 코트 위로 번쩍이는 수 개의 조명들이 눈부셨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던 땀 혹은 눈물. 우시지마가 선 자리만이 깨끗했더란다.


 우시지마는 또 한 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한 말이군. 나도 지면 슬퍼하고, 분해한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닌가?”

 “아니, 넌 안 그랬어.”


 단언하고선 뒤돌아섰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던 탓이다. 애초에 이런 것 외에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고. 오이카와는 계산대에 서서 다시 우시지마가 있던 방향을 보았다. 그는 멀뚱히 눈을 깜박이다가, 담백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제 확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실망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퐁퐁 샘솟는다. 기억도 못하면서 내가 올려준 토스가 훌륭했다니 뭐니 지껄인 거야? 제 안의 무언가가 와삭하고 부서졌다. 자존심은 아닌, 오히려 유대에 가까운 어떤 것. 오이카와는 보란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서포터와 더불어 새로 산 리스트밴드가 든 봉투를 흔들며 가게를 빠져나간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같은 코트에 선 적이 있었다. 중학교 3년 적의 일이다. 제 인생 중에선 가장 소중했던 대회 중 하나라 필연적으로 가슴에 담을 밖에 없다. 그는 햇살 내린 자리만을 골라 디디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딱 지금과 반대되는 계절이었다.



 “도도부현 대항 중학교 배구대회(都道府県対抗中学バレーボール大会)?”

 “응.”


 이와이즈미의 되물음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배구를 하는 중3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었다. 매년 겨울, 지역별로 재능이 있는 중학교 3학년들을 대상으로 지역팀을 꾸려 참가하는 대회였다. 모든 도도부현이 한 개의 팀을 꾸리고, 개최지의 경우에는 개최지 특전으로 한 개의 팀을 더 꾸려 총 48개의 팀이 출전한다.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중학생만을 선발해 시합시키는 이 대회는 장래의 국가대표들을 미리 눈도장 찍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잘 됐네.”


 그리고 리베로와 후보까지 도합 12명의 엔트리 중, 오이카와에게 그 영광의 한 자리가 돌아간 것이다. 더군다나 설명에 따르면 미야기 현 측에서는 오이카와를 정세터로 고려중이라고 했다. 얼마 전 미야기현 체육대회에서 베스트 세터 상을 탄 것이 호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출전 제의를 받은 당사자는 생각보다 떨떠름한 기색이라,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모으며 제 소꿉친구를 보았다.


 “근데 왜 그런 표정이야?” 

 “어?”

 “설마 너, 출전 안 하겠다고 말한 건 아니지?”

 “아니, 그건 아닌데….”

 “확답 안한 거냐?”


 윽. 오이카와가 장난스럽게 한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와이즈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곡을 찔렀다는 의미였다. 그가 확답 하지 않는 이유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더 찔렀다.


 “우시와카 때문이냐?”

 “…이와쨩, 배려 없어.”

 “네놈에게 베풀어 줄 배려 따윈 없어.”


 매정한 말에 과장스럽게 눈 끝자락을 축 늘어뜨렸다. 그도 그럴게 이번 대항전, 우시와카도 나갈 것이 틀림없잖아. 오이카와가 삐죽하니 토로했다. 도도부현 중학전에서는 원칙적으로 180cm 이상의 선수는 무조건 3명 이상 엔트리에 포함시켜야만 했다. 오이카와의 키는 아직 180cm이 못 미치지만, 우시지마는 넘었다. 지난 대회에서 만났을 적의 눈높이로 어림짐작해보면 분명했다. 더군다나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이미 작년에 본 대회에 미야기 팀의 선수로 선발된 전적이 있던 것이다. 대체로 참가하는 것은 3학년 선수뿐이지만, 재능이 뛰어난 1, 2학년이라면 충분히 선수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이름을 올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회 규칙상 엔트리에 등록된 선수는 필수적으로 전일본 중학교 강화 합숙에 참가하고, 시합에서 최소 1회 이상 출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 번 참가했으니 당연히 두 번도 참가할 것이다. 미야기 현 배구 협회가 그에게 제의를 하지 않을 리 없다.


 “참가해라.”


 이와이즈미는 퉁명스레 내뱉었다. 명령조에 가까운 투. 겨우 그런 놈 때문에 전국의 내노라하는 놈들과 겨룰 기회를 놓칠 거냐? 그럼 넌 정말로 멍청이가 되는 거다, 이 멍청아.


 “이미 멍청이라고 부르잖아!”

 “지금도 멍청한 생각이나 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만약 나가게 되면 우시와카 따위랑 같이 합숙하고, 연습하고, 심지어 같은 코트에 서서 토스를 올려줘야 할 텐데?”


 더군다나 현재 미야기의 모든 중학교 3학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우시지마다. 그가 이번에 새로 꾸릴 팀의 에이스가 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오이카와는 영락없이 그를 제 에이스 삼아야 했다.


 “그래도 해.”

 “이와쨩은, 오이카와 씨의 에이스 자리를 빼앗겨도 좋은 거예요?”

 “그딴 거 줘도 안 가지거든?”

 “너무한다!”


 빽 외치면서도 오이카와는 처음보다 조금 안색이 풀렸다. 어느 정도 결심이 선 모양이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에 안도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누가 멋대로 빼앗긴대?”

 “어?”

 “‘오이카와의 에이스’라는 자리, 빼앗기는 게 아니라 잠깐 빌려주는 것뿐이니까.”


 넌 걱정 말고 전국을 부수고 와.


 “…….”


 오이카와는 저보다 뻔뻔한 옆모습을 응시했다. 마음이 놓였다. 우시와카와 있을 마찰이라던가, 대회 기간 즈음 맞을 학기말 시험 같은 건 제 앞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년은 빙긋 웃었다.


 “응. 그럼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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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랑, 하고 문소리가 울렸다. 가방에 든 짐이 무섭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틸 바로 맞은편 소파가 위치한 자리가 비었다. 이와이즈미는 혹시라도 늘 앉던 자리가 빼앗길까봐 서둘러 그곳에 제 짐부터 내려두었다. 노트북을 꺼내두고 콘센트를 미리 연결해 두는 둥 과제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야 그는 제 지갑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 입구는 몇 명의 여학생들이 알바생을 가리며 잔뜩 둘러싸고 있었다. 한참을 걸려 무슨 시럽이니 초콜릿 휘핑이니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잔득 추가한 후에야 그녀들을 물러났다. 으아, 자리 빼앗겼어.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빈 자리였는데! 제 등 뒤로 울상 짓는 목소리에 내심 뿌듯해졌다.


 “안녕하세요, 스타벅스 입니…, 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스몰. 얼음 많이 넣어서.”

 “이와쨩, 스몰이 아니라 톨사이즈. 나 말고 다른 파트너가 들으면 숏사이즈인 줄 알잖아.”

 “알게 뭐냐.”


 퉁명스러운 말에 계산대에 서 있던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스타벅스는 다른 카페랑 단어가 다르니까. 여기가 이상한 거지. 진짜 이와쨩 바보같아. 명랑한 웃음이 터졌다. 까만 셔츠에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맨 오이카와는 기기를 몇 번 누르더니 여상히 손님 대하는 말투로 말했다.


 “소비세 포함 360엔입니다~”


 동전이 짤랑거렸다. 네, 360엔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제 손 위로 떨어지는 숫자에 오이카와가 또 한 번 웃음을 남발했다. 그런데 이와쨩, 요즘 여기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냐?


 “요새 과제 시즌이라서 그래.”

 “원래 카페에서 과제하는 타입은 아니잖아.”

 “아, 시끄러워. 네 놈이 얼마나 일 잘 하는지 감시하려고 와주는 거니까.”


 오이카와 씨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한 대 맞고 닥칠래, 그냥 닥칠래. 한 번 으름장을 놓은 뒤에야 오이카와는 쫑알거리던 입을 닫았다.


 “기다리고 있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만들어줄게.”

 “너 커피 만들 순 있냐?”


 그냥 얼굴 담당 아니었어? 오이카와는 잔뜩 억울한 낯으로 외쳤다. 이제까지 이와쨩이 마셨던 것들 죄다 오이카와 씨가 만들어준 거거든! 그리고는 제 옆에 있던 스타벅스 앞치마를 맨 다른 한 명에게 잠깐 양해를 구한 뒤 뒤쪽의 커피 머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어깨만 으쓱이곤 주문을 받는 곳에서 기다렸다. 아직까지 저희들 음료를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들이 저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 사람, 오이카와 씨랑 친한가봐. 오이카와 씨가 직접 음료도 만들어주고, 부럽다.


 아니, 도대체 이놈은 돈 벌러 와서 여자가 꼬시고 있는 건가. 가게에 들릴 적마다 한 번씩은 꼭 듣는 소리에 두통이 도졌다. 이와이즈미는 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자 아이들의 무슨 프라푸치노니 뭐니 하는 음료보다 제 음료가 먼저 나왔다. 작은 사이즈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꽤 커다란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가 나왔다. 진실로 한 사발 같았다.


 “땡큐.”

 “오이카와 씨 보지 말고 정말 과제해야해?”

 “쓸데없이 네놈 얼굴 볼 일이 뭐가 있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와이즈미는 빨대와 냅킨 몇 장을 뽑은 후 제 자리로 돌아갔다. 확실히 푹신한 벽 측에 앉으니 편했다. 몇 여자 동기들이 안쪽 자리를 선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컵을 내려두고 무료 와이파이에 연결하자, 인터넷으로 접속한 라인에 알람이 징징 울렸다. 조별과제를 위해 만든 단체방의 것이었다. 그는 창을 켜 잠깐 사이 쌓인 내용을 정독하고 제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는 개인 과제를 하던 창을 킨다.


 시간이 노도였다. 기실 오이카와를 감시할 틈도 없었다. 한참을 집중하다가, 이따금 한숨을 돌리려 할 때면 커피를 마시는 대신 고개를 똑바로 올렸다. 그럴 때면 항상 오이카와가 보였다. 조금 떨어진 틸에 서있던가, 음료를 만드는 뒷모습을 잠깐 응시하다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감시라기보단 감상에 가까운 행위였다. 얼음이 자꾸 녹아 양은 도리어 많아졌고 커피는 한 없이 밍밍해져만 갔다.


 겨우 두 시간 걸쳐 개인 과제 하나를 끝내니 이번에는 제 메일함에 메일이 두어 개 쌓였다. PPT를 맡아버린 터라 자료 수집을 끝낸 조원들이 제 파트를 보낸 것이다. 교양 교수가 전부 짠 조원 명단에는 신입생들도 몇 섞여 있던 터라 그는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자료를 점검했다.


 “허.”


 아니나 다를까, 출처 표시도 없고 대충 웹사이트에서 검색해 긁어온 것이 분명한 자료만 가득하다. 장장 10페이지가 넘어가는 자료는 저가 생각하기엔 뿌듯할지 몰라도 저걸 죄 정리해야 할 입장이 되는 이와이즈미로선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망했네. 그는 작게 읊조리며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다시 한 번 이제는 보리차가 되어버린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고개를 올리니 어김없이 오이카와가 보였다.


 직선상에 보이는 낯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커플로 보이는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모습이 꽤 피곤해보였다. 하긴, 4시간이 넘게 서서 저러고 있으니 지칠 만도 하겠지. 아무리 운동하는 사람이라 쳐도 체력과 사람을 대함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별개의 것이므로.


 이와이즈미는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간 정도만 더 지나면 퇴근일 것이다. 저도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자료를 솎아내고, PPT 순서를 정리하고 시안을 잡으면 그 즈음 될 것이다.


 홀로 할 일을 정리하고 고개를 주억이자 손님이 음료를 픽업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가 반달처럼 휘었다. 좋아하기는. 이와이즈미는 과장스럽게 코웃음 치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시선을 내렸다. 시야로 다시 신입생이 보내준 10pt짜리 빽빽한 자료들이 들어왔지만 아직까지도 저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자판 위에 올려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딸랑거리는 유리문 앞 종소리에 따가운 화살이 빗겨간다. 그제야 노트북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와쨩. 많이 기다렸어?”


 가까스로 받은 자료를 정리하고 PPT 초안을 잡아두자, 맞은편에서 기척이 들렸다. 탁자를 빼는 소리와 더불어 제 테이블 위로 무언가 탁, 하고 내려두는 소리. 이와이즈미는 눈만 데굴 굴렸다. 제가 주문한 것 보다 조금 더 작은 컵에 담긴 음료가 보였다. 맞은편에는 앞치마도, 녹색 모자도 검정색 셔츠도 전부 벗은 오이카와가 있다.


 “자, 이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주는 서비스.”

 “뭐냐.”

 “녹차크림 프라푸치노. 이와쨩은 커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항상 아메리카노만 주문하잖아.”

 “그런 건 이름도 길고 복잡하잖아.”


 뭣보다 비싸. 이와이즈미가 그리 말하며 제가 한 파일을 저장한 후 탁 소리 나게 노트북을 닫았다. 오이카와는 짐을 꾸리는 그를 지켜보며 남긴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으, 맛 없어.


 “그렇다고 커피를 다 먹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그란테 사이즈로 줬다니까. 심지어 눈앞에 있는 치는 저가 남몰래 사이즈를 올려준 것도 모르는 눈치건만. 속으로 꿍얼거리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제가 만든 음료를 쥐어주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들였다. 딸랑, 시원한 에어컨 바람 가득했던 실내를 나서자 뜨거운 뙤약볕이 내렸다.


 “그런데 이와쨩, 오이카와 씨 감시하러 왔다면서 왜 감시는 안 해?”

 “뭐?”

 “진짜 계속, 계에속 노트북만 하던데. 중간에 눈 한 번 마주칠 때 말고는 한 번도 안 보고. 야동이라도 본 거야?”


 무슨 헛소리야? 이와이즈미는 퉁명스레 답했다. 오이카와를 본 적 없다는 말과 끝에 이어진 농담 양측 모두에 대한 질문이었다. 저가 몰래 훔쳐본 얼굴만 몇 갠데.


 “오이카와 씨, 은근히 실망했어. 여자 애들이 말 걸어주면 이와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려주기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이야.”

 “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계속 노닥거렸냐?”

 “당연히 그건 아니지!”


 이미 저를 계속 지켜봤다는 것부터 틀려먹은 것 같은데.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말하지 않았다. 남말 할 터지도 아니었거니와, 나쁜 기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아까 전 눈이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했을 뿐. 그는 대답 대신 오이카와가 만들어준 음료를 빨아들였다. 이를 딱딱 부딪칠 적마다 잘게 간 얼음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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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사(幻師)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환수(幻獸)와의 계약을 통해 그들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지구에서 자아 있는 생명체란 일부 짐승과 인간, 마지막으로 환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환수는 특정 기원에서 태어나 그 기원과 관련된 힘을 지닌 자들이었다. 자연,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비물질을 자아있는 객체로 구현한 듯한 유기체. 그들은 주로 생물의 형태를 지녔다. 때로는 짐승이었고 때로는 요정 같았으며 때로는 인간과 동일했다. 불씨에서 태어난 환수는 불을 다스릴 수 있으며 꽃잎의 한 자락에서 태어난 환수는 꽃을 피울 수 있다. 형태도, 힘도, 수명도 제각각이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힘을 가진 생명체들을 환수라고 부르고, 그들을 다룰 수 있는 인간들을 환사라고 칭했다.


 환수를 ‘의식’ 하고, 환수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인간은 성별과 나이, 직위를 막론하고 그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뭣도 모르는 꼬마들이 길가에 널린, 가장 조그맣고 흔한 환수들과 계약 맺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일부러 자신의 직종과 관련하며 도움이 되는 환수와 계약을 맺으려 애쓰는 사람들 역시 많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환사들 중에서도 국가에 속한 이들을 호레이샤(Horatia)라 명명했다. 호레이쇼(Horatio)[각주:1], 환수나 환사에 의해 발생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조직. 드물게 공채 시험을 치루고, 대부분은 추천이나 천거 따위의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들어오기에 호레이샤들은 대부분 소위 말하는 ‘빽’이 든든하던가, 혹은 ‘빽’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의 호레이쇼는 몇 개의 분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아오바죠사이는 일본에서 일어나는 재난을 담당하는 전위 분대, 2번대의 명칭이었다. 상징은 월계관. 그리고 대장은,


 “백년만의 오프에 왜 오이카와 씨가 회의실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

 “왜긴 왜야. 내가 불렀으니까, 지.”


 오이카와 토오루. 화려한 미색으로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구사하는 이였다. 이와쨩, 진짜 너무 한 거 아냐?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그리 말하며 소파에 아무렇게나 몸을 뉘였다. 멍청아, 일이 생겨서 불렀는데 대장이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를 타박하며 부대장,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그의 뒤통수를 향해 서류철 하나를 던졌다. 철썩, 하고 흡사 뺨 맞는 것 마냥 매선 소리가 울렸다. 오이카와는 울상을 지으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날 밖에 없었다.


 서류철을 빠르게 훑는 사이 아오바죠사이 회의실(이라 쓰고 로비 혹은 거실이라고 읽는다) 위층에 자리한 각자의 방에서 한 명씩 사람들이 내려왔다.


 “모모치 해변에서 사고사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고. 이거 환수가 한 짓이 맞는 건 틀림없어?”

 “네코마에서 말해줬어. 확실하대.”

 “계약자는?”

 “없는 것 같다던데.”


 끙, 오이카와가 가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조사반인 네코마에서 말해준 사실이라면 확실할 터다. 네코마는 주로 일본 내에서 일어나는, 환수의 힘이 개입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건에 대한 사전 조사를 전담하는 호레이쇼 4번대였다. 조장은 쿠로오 테츠로. 하지만 사건을 확정지은 건 사이코 메트리와 다름없는, 물체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코즈메 켄마일 것이다.


 “바다도 물이니까 그냥 맛층이 가면 안 될까?”

 “대충 정하지마.”

 “맛키도 같이 보내줄게.”


 그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멀찍이 부엌에서 늦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하나마키가 고개를 냉큼 내밀고 외쳤다. 야, 갑자기 내 이름이 왜 나오는데!


 “2인1조가 원칙이니까. 대장 명령입니다. 맛층, 출동해!”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하는 농담, 그러나 진심이 틀림없을 말에 마츠카와가 아래로 축 늘어진 눈썹을 찡긋거렸다. 아무리 내가 수(水)계여도 산성비랑 소금물이라는 엄연히 다르거든? 그렇지? 동의를 구하듯 그가 앉은 1인용 소파의 등받이서부터 제 어깨까지 길게 타고 내려온 검푸른 뱀의 이마를 톡톡 두드려본다. 1미터는 족히 넘는 거대한 뱀이 눈을 깜박거리며 마츠카와의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었다. 물론 진짜 뱀이 아니기에 당연히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저것 봐. 네가 고작 산성비라 해서 즈이도 화났잖아.”


 오이카와가 낄낄 거리며 말했다. 홍수(洪水)라는 뜻의 코우즈이에서 딴 애칭이었다. 환수의 실제 이름을 아는 것은 오직 그의 계약자뿐이므로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임의로 지은 애칭이나 세계 환사 연맹에서 공식으로 분류해놓은 특정 학명으로 환수를 지칭하곤 했다. 즈이의 경우, 홍수로 인해 범람한 강의 울렁이는 수위로부터 태어났기에 모두가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지금 쿠니미쨩이랑 킨다이치는 다른 사건을 맡고 있는걸. 사왓치랑 유닷치는 교토에 갔고, 광견쨩은 다테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와 그쪽에 백업 갔고. 오늘 오이카와 씬 오프니까 지금 이와쨩이랑, 야하바랑, 와탓치랑, 시도랑, 너랑, 맛키랑 있는데 와탓치는 곧 킨다이치 쪽에 합류하고, 이와쨩은 내가 쉬니까 대신 대장 대리로 있어야 한단 말이야.”


 오이카와가 일일이 손가락을 접으며 남은 이들을 열거했다. 결국 남은 건 넷뿐이잖아. 그 투정을 이와이즈미가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어이, 오이카와. 그냥 네가 일하면 다 해결될 일이잖아. 그냥 네놈이 가.”

 “지금 대장보고 후쿠오카까지 내려가라고? 도쿄를 비우란 소리야?”

 “누가 들으면 네가 호레이쇼 국장인 줄 알겠네.”


 이와쨩은 또 나 혼자 보낼 거잖아. 안가. 절대로 안 가. 오이카와가 단호하게 말했다. 호레이쇼에서도 1번대와 2번대는 전투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인 만큼 어느 곳보다도 최소 2인 1조 원칙을 지키고 있었는데, 개 중 유이한 예외가 1번대 시라토리자와의 대장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2번대 아오바죠사이의 대장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일본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공격력 때문이라면, 오이카와 토오루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방어력 때문이었다.


 오이카와의 능력은 쉴드(Shield)였다. 그의 환수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스스로 한 말에 따르면 오래 전 치열한 전장에서 탄생한 환수라고 들었다. 천지를 울리는 방패와 방패 사이의 번뜩이는 마찰로부터 기원하였기에 그것과 계약한 오이카와는 그가 지닌 보호의 능력을 빌려 쓸 수 있었다. 때로는 무형으로, 때로는 굳건한 철벽같은 유형으로 나타나는, 수백명까지도 거뜬히 지킬 수 있는 방패는 일본 호레이쇼의 자랑이기도 했다.


 “적당히 바닷가 놀러간다 생각하고 다녀와.”

 “웃기지마! 아무리 봐도 혼자서 개고생하고 오란 소리 같거든!”


 아니, 하지만 오이카와. 이와이즈미가 미간을 문질렀다. 그건 단순히 오이카와의 말투나 행동이 짜증나서 그렇다기보단 어쩐지 곤란하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단순히 미계약한 환수가 불러일으킨 재난이라기에는 조금 미심쩍어. 쿠로오는 적어도 코즈메의 시야에 계약자로 추정되는 인간은 없었다고 들어서 우리 측으로 넘어왔지만…. 그러니까 다른 놈 보내지 말고 그냥 네가 보고 와.”


 그거 그냥 날 사지로 보내겠단 소리 아냐? 오이카와가 입을 쩍 벌렸다. 어쩐지 영락없이 오이카와 혼자 가게 될 것 같은 느낌에 마츠카와가 낄낄 웃었다. 하나마키가 토스트 하나를 입에 문 채 즈이를 피해 그의 자리와 멀찍하게 떨어진 의자에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진짜 우리 간대? 아니, 대장님이 몸소 가신단다. 그런데 네 환수는? 몰라. 또 어디 돌아다니겠지.


 “이와쨩 지인짜 너무해….”


 오이카와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옆으로 스러졌다. 풀썩, 제 어깨로 내려앉는 것에 이와이즈미는 시끄러워, 일갈했다. 시도나 야하바라도 딸려 보내주지…. 대장 주제에 부대장에게 동행을 구걸하는 꼴을 보며 하나마키가 혀를 끌끌 찬다. 신입인 쿠니미와 킨다이치가 외근 중이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못 볼 꼴 보여줄 뻔 했다. 사실 이미 보여줄 대로 보여줬지만.


 계속되는 징징거림에 이와이즈미는 기어코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같이 가면 되잖아.”

 “헉. 진짜?”

 “잠깐만, 이와이즈미. 네가 같이 간다고?”


 그 구경거리를 관전하던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마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즈이가 힐끔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가 마츠카와의 목을 감았다. 물론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가 훌륭한 페어라는 점은 호레이쇼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소꿉친구였고, 동시에 입단했으니까. 평소 활동 시에도 붙어서 행동하는 경우가 잦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쿄도 내에서의 이야기였다. 후쿠오카까지 내려가 조사한다면 최소 사흘은 걸릴 것이 분명한데 대장과 부대장이 함께 장기간 본부를 비우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깐만, 이와이즈미. 진짜 괜찮은 거야?”

 “시도 있잖아. 부대장 대리는 시도에게 맡겨.”


 잔정이 있어 냉정하지는 못해도 사리분별은 제대로 하는 녀석이니 믿을 수 있었다. 시도라면 뭐…. 본디 그가 아오바죠사이의 회계를 맡고 있기도 했고, 모두가 그의 성정을 알기에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찝찝한 낯을 지우지 못해도 그럭저럭 납득했다.


 “그래도 대장이랑 부대장이랑 같이 도쿄에 없어도 괜찮아? 심지어 관동도 아니잖아.”

 “저 녀석 혼자 보내면 분명 내 핸드폰 하루 종일 울릴걸. 잠도 못 잘 바에는 서둘러 처리하고 돌아오는 게 나아.”


 잠도 잘 안자는 주제에. 오이카와가 삐죽였지만 그럼 가지 말까? 라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금세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죄송합니다!


 “뭐, 며칠 비워도 무슨 일 있겠냐. 괜찮을 거야.”


 그도 그랬다. 설마 며칠 사이 대장과 부대장의 부재를 통렬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까. 정 사람이 없으면 다른 곳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될 일이었다. 시라토리자와나 후쿠로우다니도 있고, 뭐, 미숙하지만 카라스노도 전투력만 따지자면 꽤 괜찮으니까. 하나마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우물거린다. 어느새 즈이가 마츠카와의 몸을 타고 내려가 바닥을 매끄럽게 기어간다. 하나마키는 제 발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즈이의 모습에 기겁하며 냉큼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렸다.


 “야, 마츠카와! 즈이 빨리 너한테 돌아가라고 그래! 아, 즈이. 좀!”

 “오년인데 그냥 좀 익숙해져라.”

 “얘는 왜 오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너랑 계속 함께 있는 거야?!”


 마츠카와가 혀를 찼다. 오이카와는 그 꼴을 구경하며 폭소를 터트리다가, 얼른 준비해서 떠나자는 이와이즈미의 재촉에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그 날 아침 바로 준비해 조금 늦은 낮에 후쿠오카로 떠나는 가장 빠른 신칸센에 올라탔다.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서류를 다시 한 번 점검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는 이와이즈미가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 모두 동행한 환수는 없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든 환수와 환사가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단순히 계약만 한 후 완전히 개인으로 행동 하는 관계도 잦았다. 심지어 오이카와는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사와우치의 환수를 본 적이 없었다. 환수는 인간을 사랑스럽게 여기기에 제 본명을 알려주고 계약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순히 제 숨을 더 부지하기 위해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일이 다반사였다. 본디 환사가 환수의 힘을 얼마나 빌릴 수 있는가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두 존재의 유대에 달린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여상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왜 그래, 이와쨩?”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미계약 상태의 환수가 사람‘만’을 노린다는 점이?”

 “그래.”


 오이카와는 목적어 없는 이와이즈미의 말을 대신 건네주었다. 이와이즈미는 금세 수긍했다. 오이카와는 마치 대단한 조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노래 읊조리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중얼거렸다. 


 “호레이쇼, 이 천지간에는 인간의 철학으로는 꿈도 못 꿀 일들이 많다네.[각주:2]


 환수는 짐승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영리했고, 일부는 인간을 넘어서는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언가에 기원(基源)에서 태어난 존재였으나 기원(祈願) 그 자체였기에 악의도 호의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고의로 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제 힘이 맞물려, 혹은 그들 스스로도 제 힘을 감당할 수 없어 사고나 재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아오바죠사이는 본디 그런 것들을 전담했다.


 “괜찮아.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지금 따라가 주고 있는 거잖아, 망할카와.”


 그 말에 오이카와는 빙긋 웃었다.


 “응. 믿고 있으니까, 하지메.”


 참으로 간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오이카와는 늘 모두가 사라지고 단 둘이 되어서야 그 이름을 부르곤 했다. 이와이즈미는 괜히 고개를 돌려 창밖만 응시했다.


 “…시끄러워.”


  느리게 일갈한다. 그는 제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주먹이 녹 슨 쇳빛을 띄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수 없이 전장에서 부딪치던 그 색이었다.




  1. 고유명사 [본문으로]
  2. William Shakespeare, Hamlet 1막 5장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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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이카와TS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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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퍼런 수마(水魔)에 홀로 부유하는 외딴 섬이 있다. 그곳은 인간의 배조차 드문 대양의 끄트머리였고, 짐승마저 살지 않는 이름 없는 천국이었다. 오이카와는 그곳에 있었다. 파도가 처얼썩 그의 몸을 한 번씩 후려쳤고 손바닥으로 짚은 모래들이 수번 미끄러졌다.


 그가 들어설 수 없는 섬 안쪽에는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존재했다.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엮어 만든, 지금은 언젠가 내린 호우에 반파된 처소와 그을린 자국. 누군가 먹다 버린 과실의 꼭지, 생선의 뼈 따위가. 오이카와는 종종 몹시 그리운 얼굴로 저는 딛지 못하는 섬의 안쪽을 바라보고 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기실 이곳은 오이카와가 자주 기분전환을 하러 오는 곳이었다. 종종 생경한 질소들과 눈부신 빛이 그리울 때, 자신의 고향을 경계 밖에서 바라보고 싶을 때, 조류를 헤치고 저 어디에서 일렁이는 빛을 쫓으면 새파란 수평선이 나왔다. 그는 자신만의 섬에서 휴식을 취하며 햇빛에 몸을 말리곤 했던 것이다.


 제 영역에 우시지마라는 인간 하나를 들이게 된 것은 우연한 충동이었다. 그 날도 평소와 다른 것은 없었다. 바다에서 노는 것이 질려 조금 먼 곳까지 다갈 즈음 낯선 조각들이 제 위로 부서져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따금 땅 위에서 내리는 비 같았다. 나무조각이었고, 종종 진주처럼 반짝이는 생경한 돌들도 있었다. 아마 인간이 모는 배 하나가 암초를 만나 난파당한 것 같았다. 물론 오이카와의 입장에서는 관심 외의 이야기였다. 그는 평소처럼 그들을 지나쳤다. 아니, 앞을 가로막는 것만 아니었다면 지나쳤을 것이다.


 한 남자가 오이카와의 코앞에서 가라앉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입과 코에서 기포가 파르르 올라왔다. 짧은 머리칼이 수초처럼 흔들린다. 언젠가, 우연히 지나가는 배 위에 있던 인간 남자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남자가 자신의 꼬리 아래까지 하강하는 것을 보았다. 저 심해 가장 밑바닥에는 누구도 찾지 않고 버려진 것들이 많았다. 물고기의 사체, 오래 전 부식된 유물…. 이제 남자도 그것들처럼 될 것이다. 빛 바라고 영점으로 돌아가겠지. 그리 생각하자 오이카와는 무심코 생을 갈구하듯 위로 뻗은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운 이 섬으로 끌어올려 주었다. 다시 숨을 하사했다.


 그 남자가 우시지마 와카토시였다.


 오이카와는 한 명만의 인간이 거주하는 자신의 섬에 매일 아침 올라왔다. 기묘한 공존이었다. 오이카와가 파도 사이로 얼굴을 빠꼼 내밀 적마다 우시지마는 이 무인도에 차근차근 적응했다. 임시로 처소를 만들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았다. 해시계가 전부인 이곳에서 그가 시간을 보낼만한 일은 전무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해변에 앉아 오이카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인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자신이 먹는 음식도 드물게 권해주었다. 오이카와는 멀리서 구경만 했던 붉은 열매의 이름이 사과라는 것도, 그것이 단맛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두 사람은 자주 아득한 수평을 마주한 채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가만히 제 자리에 앉아 파도의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다. 일몰할 때면 햇빛에 반사되어 잘게 부서지는 표면을 가만히 응시하기도 했다. 아름답지? 오이카와가 물을 때면 우시지마는 항상 말했다. 이것보다 네 비늘이 더 보석 같더라고. 오이카와 네가 인간이 가장 아름답고 값지게 여기는 것을 닮았다고. 그럴 때면 입술을 겹쳤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둥근 어깨를 끌어안았다. 혀에서는 사과 냄새가 났다. 달았다.


 우시지마가, 어느 별 하나를 가리키며 저것이 독수리자리라고 했을 때에도 두 사람은 숨을 섞었다. 가장 환하게 빛나는 알타이르라는 이름이 예뻐서. 그 날, 우시지마는 입술을 떼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밤이었다. 오이카와는 대답 않고 되물었다.


 “사랑이 뭔데?”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다.”


 굉장히 쉬운 정의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비늘은 은백색이었다.


 “그럼 오이카와 씨도 우시와카쨩을 사랑하는 건가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살결에서 소금맛이 나는 것을 그 밤에 처음 알았다.


 두 사람은 행복했지만 오이카와는 항상 불안해하곤 했다. 우시지마는 문명 세계에서 살던 인간이었다. 이 소박한 무인도보다 화려한 도시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이곳은 우시지마의 고향이 아니기에 그의 무덤이 될 수 없었다. 애초에 뱃길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발견할 확률은 낮았지만, 만약 발견한다면 우시지마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신 되돌아올 수 없겠지. 오이카와는 인간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변덕이 잦았으며,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었다. 그들이 영원한 젊음과 불멸을 꾀하느라 죽고 잡혀간 동족의 수가 몇이던가. 사실 따지자면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저를 먹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에 감읍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따금 되도 않는 실랑이를 했다. 우시와카쨩은 날 떠날 거야? 떠나지 않는다. 지금은 여기 갇혀서 그런 속 좋은 소리가 할 수 있는 거지. 떠나지 않아, 오이카와. 네게 돌아올 것이다. 우시와카쨩은 왜 나를 먹지 않아? 네가 없는 불멸을 바라지 않으니까. 그 입 바른 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그렇게 일 년, 불현듯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부웅, 부웅…. 거대한 고래같은 쇳덩이가 제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인간들의 소리였다. 섬 주변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였다. 오이카와는 얼른 수면 아래로 몸을 담갔다. 부웅, 부웅…. 그림자는 한참을 머물렀다. 그는 제가 잡힐 것보다도 우시지마가 떠날까봐 겁이 났다. 부웅, 부웅…. 배가 떠났다. 오이카와는 그들이 저를 발견 못하리라 확신할 즈음에야 서둘러 뭍에 올랐다. 자신의, 아니, 두 사람의 섬으로 향했다. 그는 우시지마가 제 자리에 있길 빌었다.


 돌아온 섬은 고요했다. 본디 고요했지만, 그 사소한 인적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했다. 수 쌍의 발자국이 보였다. 신발자국이었다. 오이카와는 섬을 한 바퀴 다 돌았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축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우시지마는 그렇게 갔다.


 오이카와는 아주 조금 울었다.


 뒤늦게야 소식을 들은 이와이즈미는 애초에 인간에게 정을 준 네 탓이라 그랬다. 오이카와는 긍정했다. 인간을 믿는 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욕심이 많았고, 거짓말에 능숙했다. 오이카와도 그 점을 알았다. 그래서 우시지마가 언젠가 자신을 떠나도 놀랍지 않다고 늘 생각했다. 이건, 그저 오이카와의 예상 범위에 있는 일이었다. 이제 그는 동족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여인을 만나 결혼을 올리리라.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자손을 번식하겠지. 저를 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가 저를 잡으러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했다. 인간에게 사랑을 바치고 죽음으로 보답 받은 인어는 많았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했고, 이제 우시지마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 외로워진 섬으로 올라오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처음에는 화를 내고, 말리다가, 종국에는 너 좋을 대로 하라며 포기했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라는 이름에 대해 입도 뻥긋 않았지만 그를 그리워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삼 년을 못가 오이카와는 본심을 토로했다. 미안, 이와쨩. 나도 우시와카쨩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는데….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우시지마를 기다리는 일이 그랬다.


 오이카와는 꼬리를 흔들었다. 찰박찰박 물이 얼굴까지 튀었다. 단단한 비늘이 푸르게 빛난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낮이다. 오이카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섬을 한 바퀴 돌고, 만질 수 없는 흔적을 바라만 보다가 우시지마와 나란히 앉곤 했던 자리에 누워 햇볕에 몸을 말렸다. 사 년을 넘겨 이제는 타성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문득,


 몹시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재빨리 상체를 일으켰다. 두려움에서 기인한 행동이 아니었다. 물이 찰박찰박 튀어 애써 말린 것이 무용이 된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평선 너머 아득한 어딘가로부터 기적(汽笛)이 울리고 있었다. 아, 오이카와는 탄성으로 확신한다.

 

 기적(奇跡)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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