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타주의
쿠니미 아키라. 첫인상은 남자치고 꽤 예쁘장한 애. 서늘한 인상. 여름의 인터하이 지역예선에서 부딪친 적 있었다. 시합에서의 감상은, 역시 내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 특별히 눈에 띈 점은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초입에 다시 마주친 사내애는 무려 선택된 1학년들만 모이는 강화합숙에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낯이었다. 그 때 코트 위에서 본 것처럼.
언제나 에이스에 대한 의지로 충만한 고시키 츠토무는, 어째서 그가 이런 곳에 왔는지 다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키가 압도적인 편도 아니었다. 실제 이번 합숙의 참가자 중에는 2m에 달하는 거구도 있다. 파워로 말할 것 같으면, 백 번 생각해도 저가 더 강하지 않나? 머리는 꽤 좋은 것 같았다. 포즈도 깔끔하고, 굳이 스파이크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꽤 하는 것 같고. 하지만 그게 전부. 같은 포지션인 저가 단언컨대 어딜 봐도 제가 더 우수했다. 배구를 하고자하는 열정마저도.
“킨다이치! 쿠니미 어디 갔는지 알아?”
“윽. 모르겠는데요.”
“도대체 이 자식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일정대로라면 워밍업이었을 테니까…. 잠시 쉬러 간 게 아닐까요.”
코가네가와와 함께 합을 이루고 있던 킨다이치가 찔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점심시간 직후, 원래 예정대로라면 워밍업 겸 자율 연습 시간이었을 지금은 코치의 급작스런 소집으로 인해 무용이 되고 말았다. 다른 체육관에서 연습 중인 시라토리자와 2학년 선배들과의 연습 시합이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워밍업 시간에 워밍업을 해야지, 자리를 내빼는 게 말이 돼?! 코치의 우렁찬 외침에 1학년들 몇몇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코치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체육관 구석에 앉아서 쉬고 있던 츠키시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고시키! 가서 쿠니미 좀 찾아와라.”
“네?! 왜 제가 가요?!”
“네가 우리 학원 내부를 잘 알고 있잖냐.”
하지만 그런 거라면 다른 애들도 있는데! 황급히 시선을 돌려 볼보이나 다른 멤버들을 찾아보면, 녀석들은 어느새 코트 정리를 하는데 분주하다. 분하다!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거지! 찾으러 가지 싫은 거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필사적으로 거부감을 표출하던 고시키는, 쿠니미가 없으면 연습 시합을 진행하지 않을 거란 코치의 으름장에 어쩔 수 없이 체육관을 나서야만 했다.
내부에서 벗어나자마자 금세 냉랭한 바람이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춥다. 고시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스스로 팔짱을 꼈다. 으, 다른 놈들이 나가기 싫다며 뻗댈 만도 하다. 그 녀석은 이런 날씨에 어디에 있는 거람. 카라스노의 꼬맹이는 합숙에 참가하고 싶어도 참가하지를 못해서 볼보이를 자처하는데, 누구는 영광스럽게 강화 합숙에 참가하고서도 짧은 틈은 못 이기고 농땡이라니. 같은 학교의 킨다이치라는 녀석은 자율 연습에도 곧장 열심히 하던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그는 속으로 한껏 투덜거리며 쿠니미가 있을 법한 장소를 추려내 보았다. 애초에 학원이 낯선 소년이 갈 법한 장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행동반경을 감안하면 고작해야 식당이나 기숙사. 개중에서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좋아하는 녀석이라면 다소 거리가 있는 기숙사 보다는 식당 건물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선택지가 좁아 고시키조차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소년은 식당 건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발가락이 곱아든다. 이 추운 날 사람을 고생시키다니. 이래서 의지가 없는 놈들 안 된다. 소년은 그를 만나면 어떤 식으로 화를 내고, 잘난 척을 할지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그려보았다. 특별히 ‘열심히 한다’는 말을 질색하는 것 같으니 일부러 그 단어만 사용해 골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고시키는 호쾌한 에이스를 표방했지만 뒤끝이 길었다. 최소한 한 시간 유지될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저를 고생시킨 장본인은 심술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찾아간 식당 내부는 사람이 텅 비고 없다. 잘못 짚은 걸까. 다른 출구인 개수대로 나가도 마찬가지로 인적은 드물다. 애초에 교사(僑舍)는 문이 잠겨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기숙사인가? 고시키는 인상을 찡그리며 같은 건물의 연결된 화장실로 향했다. 텅 비어 물소리 없다. 아, 정말. 합숙이 싫어서 도망이라도 갔냐고….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틀려는 찰나였다. 고시키는 불현 듯 건너편 계단에서 회색 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늬를 발견했다. 창고와 주방으로 이어지는, 학생들은 내려갈 일도 없는 곳이었다.
“설마.”
말하면서도 고시키는 건너편 계단으로 향했다. 큰 보폭씩 가까워질수록 하늘색 천이 눈에 띈다. 또한 그 위에 둥글게 얹어진 머리통도. 아, 그 녀석이다. 고시키는 직감했다. 입매가 삐뚜름하게 갈라졌다. 보아하니 계단에 쭈그려 앉아 벽에 기대고 있는 것 같은데 게임이라도 하는 건가? 그는 들으라는 듯이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
“야.”
그의 앞에 제 얼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놀란 기색은 보이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색하게도 쿠니미는 손끝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
쌕쌕거리는 숨이 소년이 바로 입술에서 번졌다. 감은 눈. 여태껏 보아온 어떤 것보다 평화로운 낯이 깃들고 있었다, 그에게. 고시키는 삼 초 있다가 돌연 몸을 뒤로 뺐다. 자세가 엉켜 넘어질 뻔 한 것을 벽을 붙잡아 가까스로 면한다. 허억, 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기도 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미동 없다.
아니, 잠시만. 방금 내가 왜 그랬던 거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제 행동이 수상쩍어 양 뺨을 톡톡 두드린다. 도대체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라, 고시키 츠토무. 너는 시라토리자와의 에이스가 될 남자잖아! 괜히 심호흡도 하고. 급작스레 술렁거렸던 마음도 다잡는다. 혹시 또 넘어질 뻔 할까, 제대로 계단에 내려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쿠니미보다 낮은 자리에 서자 비로소 소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무릎을 모아 앉은 채 벽에 기댄 얼굴이 얌전하다. 함께 연습 하자느니, 스파이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말을 할 때 늘 보이던 표정과 전혀 상반된다. 까만 머리카락에 흰 얼굴은 꼭 흑백 영화 같았다. 일정한 박자로 옅게 움직이는 어깨. 호흡하는 소리. 소년은 저도 모르게 그 고요한 박자에 말려들었다. 덩달아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나처럼 잘생겨야지. 얇게 생겨봤자…. 속으로 투덜거려도 시선은 떼지 못했다.
아무리 실내라도 바람만 차단되었을 뿐, 낮은 온도는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쿠니미는 잘도 잤다. 기울어진 머리 탓에 단정하게 반으로 나뉜 앞머리마저 흘러내린다. 고시키는 썩 고아한 움직임으로 소년의 속눈썹에 걸쳐진 앞머리를 바라보았다. 감은 눈이 설핏 찡그려지는 것도 같다. 역시 간지러운 걸까. 깨워야 하는데. 분명 돌아오면 코치가 한 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이 녀석 때문에 내가 추위까지 무릅쓰고 찾아왔는데.
고시키는 최대한 제 손길 신경 쓰이지 않게끔 속눈썹에 걸린 앞머리를 잡아 조심스레 넘겨주고 말았다. 손끝이 실수로 이마를 건들이고, 아, 얌전히 소년의 귀 너머로 넘겨준다. 고시키의 손끝이 머리칼을 타고 내려가, 둥근 귓바퀴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
주름진 눈이 다시 온화해지는가 싶더니, 기어코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열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고시키는 그를 깨울 목적으로 온 주제에 열리는 눈에 몸이 굳고 말았다. 자세는 여전히 그의 머리칼을 넘겨주려던 찰나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여직 몽롱한 눈빛은 흑색이다. 힐끔 올려다본 눈초리가 낯설다. 비슷한 신장, 정확하게는 쿠니미 쪽이 저보다 큰 편이라 (아주 조금이다!) 이런 위치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인 것이다. 고시키는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이대로 깨우려고 했던 것처럼 귀를 잡아당겨버릴까? 하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온 몸이 빳빳해지고, 그가 내뱉는 날숨의 모양을 따라 저도 모르게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어버려서.
“…뭐야?”
아직 잠에 취해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도, 고시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 자리가 몹시 더웠다. 가까워진 겨울에, 보이지 않는 태양이 드러내지 않은 부분을 내리쬔다.
우습게도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단순하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코치님이, 얼른 소, 소집하라고!”
“? 그런데 말을 더듬어.”
“더, 더워서 그런다! 왜!”
“추운 게 아니라?”
입이 말썽이네! 하하하! 춥다고, 그래! 고시키가 급하게 손을 떼 물러서며 어설프게 웃었다. 미쳤다. 미쳤냐, 고시키 츠토무! 이 녀석은 나보다 배구도 못하고, 시종일관 재미없는 얼굴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남자인데! 정신 차리라고!
에이스가 될 남자가 마음속으로 어떤 고뇌를 하던 쿠니미는 몇 번 더 눈을 깜박여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벌건 얼굴을 한 채 멍청한 행동을 하는 고시키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 후 먼저 자리에서 벗어났다. 고시키는 그가 자리를 뜰 때까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제 속을 부정했다.
나는 놀랐을 뿐이다! 그냥 갑자기 잠이 깬 얼굴에 놀란 것 뿐이다! 절대 반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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