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주(@boogi___)님 달성보상 글
그 날은 빗줄기가 길었다.
쿠로오 테츠로의 친가는 미야기 현 센다이 시 외각의 한적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는데, 번화가로부터는 버스로 사십분 걸리는 곳이었고 바로 뒤에는 산이 깊어 센다이라 해도 도리어 시골에 가까웠다. 그는 매번 여름 방학을 그곳에서 났다. 홀로 사는 할머니가 꽤 편찮았기 때문에, 짧은 여름만이라도 짬을 내어 돌보러 가는 것이다.
소학교 5학년부터 그는 세 번의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쿠로오는 늘 장마의 중간에 미야기에 도착했다. 비구름이 먼 여행을 떠날 때면 할머니의 집 뒤쪽에는 해바라기 밭이 만발했다. 그 집에는 담이 없어 소년은 마루에 앉으면 곧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이를 발견하곤 했다. 가끔은 챙 넓은 모자를 썼고, 반바지 아래로 드러나는 흰 다리에 풀잎들이 쓸려 생채기를 만들었다. 아이는 뛰는 일이 잘 없었고, 걷다가도 종종 걸음을 멈췄다. 드물게는 그의 뒤에는 가쿠란을 입은 다른 사내가 있었다. 쿠로오보다 커 보이는 남자는 아이와 친인척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해바라기 밭 사이에 숨을 때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주위를 살피며 능청스레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케이가 어디 있을까? 주변이 온통 노란색이라 잘 안 보이네.’
그랬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부서지는 금싸라기였고, 쉬이 샛노란 해바라기 사이에 묻혔다. 썩 밝은 성정의 아이는 그럴 때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 숨죽이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쿠로오의 시야에서는 케이의 표정도, 그의 뒤에 선 소년의 표정도 전부 볼 수 있었다.
케이.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온전히 아이의 입을 소개 들은 것은 팔월의 중앙이었다. 그 날 아이는 혼자였고 품에는 배구공을 안고 있었다. 쿠로오 역시 배구를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던 차였다. 지난 한 달, 홀로 훔쳐보던 소년이 저와 같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마루 위에 엎어져 있던 이를 일으키게 하기 충분했다.
“너도 배구 해?”
“누구세요?”
“나, 저기 파란 지붕에서 사는데.”
“저기엔 할머니 한 분 밖에 안 계시는 걸로 아는데요.”
“그러니까, 그 할머니 손자야.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케이는 어린 아이 주제에 흐음, 비음을 뱉으며 쿠로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녀석, 제 형제에게는 썩 밝아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전부 착각이었나. 나이 치고 썩 당돌한 낯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무감각하고 퉁명스러운 소꿉친구를 가지고 있는 쿠로오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도리어 씩, 웃음 지으며,
“사실 나도 배구해. 아, 난 테츠라고 불러.”
선언한 것이다. 아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삼초 후에야 겨우 내밀어지는 손을 붙잡았더란다.
케이의 정확한 이름은 츠키시마 케이였다. 달과 반딧불. 반딧불의 蛍를 쓰고 케이라고 읽었는데, 쿠로오는 그것이 썩 아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금발은 환한 낯이면 유독 반짝거려서, 그는 종종 어째서 해바라기가 소년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통성명 이후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렸다. 배구라는 공통점 덕분이다. 아이는 늘 배구교실이 끝나면 이 길로 왔다. 둘은 해바라기 밭의 한 중앙에서 만나 파란 지붕까지 느리게 걸었다. 나직하게 트인 뒤뜰에서 두 사람은 공을 올리며 놀았다. 케이. 그 아이는 처음에는 경계도 하고, 낯도 가렸으나 어느 정도 소년에게 익숙해지자 곧잘 이런저런 말들을 토로하곤 했다. 형은 중학교 배구부에서 제일가는 에이스라는 자랑이나, 그런 형을 따라 배구를 시작했으나 쉽게 형을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불평들. 이제 갓 배구를 시작한 아이라서, 쿠로오는 미숙하게나마 자세들을 봐주고 아이를 향해 올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빛 쨍한 여름의 끝, 두 사람은 다음 해 여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뭐야. 내가 테츠 씨를 기다릴 것 같아요?”
어쩌면 기약이란 쿠로오에게만 통용한 된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가을에 스무네 번, 겨울에 열두 번, 봄에는 가물가물해졌다가, 여름방학식에 돌연 아이를 떠올렸다. 냉정한 계절 두 번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미야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자동차의 와이퍼가 매초마다 움직였다. 천둥까지 치던 때에 쿠로오는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케이는 할머니 댁에 도착한 후 나흘이 지나 모습을 보였다. 여전히 장마철이었다. 아직 다 못 핀 해바라기들 사이로 노오란 우비가 유독 이질적이었다. 성큼성큼 딛는 걸음은 지난해보다 조금 더 넓다. 쿠로오는 아이의 종아리까지 올라온 샛노란 장화를 보았다. 반은 진흙이었다.
“케이.”
나직한 부름은 빗소리에 묻혔다. 저까지 닿을 리가 없었다. 결국 쿠로오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장화를 신고, 아버지가 곧잘 쓰는 커다란 검정 장우산까지 펼쳤다. 집의 둘레를 따라 피어난 낮은 패랭이꽃들을 훌쩍 넘으면 그는 해바라기밭에 도착했다. 비가 얼마나 강한지, 케이는 우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의 안면은 온통 축축했다. 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라리 우산을 들고 오지 그랬어.”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위로 아이 세 명으로도 충분할 우산을 씌어주었다. 케이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았다. 불퉁해 보이기 십상이었으나 뜻밖에도 반가움을 띄고 있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저 시선을 몹시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예언자도 아닌데, 이렇게나 비가 올 줄 알았나요.”
아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와 나란히 섰다.
그는 파란 지붕 아래에서 잠시간 비를 피했다. 우비를 벗고, 그 안까지 스며든 빗물을 탈탈 벗어내고 쿠로오와 함께 마루 위에 누워서 장마 소리를 조용히 감상했다. 일 년 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 이요. 주로 아이는 대답했다. 내 생각은 얼마나 했어? 대체로 안 했어요. 진짜 너무하네! 딱히 테츠 씨도 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쿠로오는 두 개의 계절을 떠올렸다. 변명할 것이 없어 침묵만 흘렀다. 한참 후에야 아이는 다시 말했다.
“…나중에 블로킹 관련으로 물어볼 게 있는데, 가르쳐줘요.”
쿠로오는 냉큼 알았노라 덧붙였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비가 그쳤고, 아직 축축한 마당에서 두 아이는 공을 들었다. 케이는 최근에야 제대로 된 블로킹을 배웠는데, 쉬이 뚫려버려 불만이라 대답했다. 박는다는 건 단순히 손을 올린다는 것만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니까. 쿠로오는 그렇게 설명하며 몇 번 시범을 보여주었다. 팔에 힘이 없으면 공에 맞아도 블로킹보다 리바운딩 되기 쉬워. 배구에 리바운드가 어디 있어요? 고등학교의 실력 있는 학교들만 해도 자주 리바운드를 시도한다던데. 공이 지면에 박히기 보다는 그저 ‘튕긴다’는 것에 가깝다는 거지.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를 몇 번 따라했다. 팔은 위로 뻗지만 말고, 조금은 아래로 내리고. 소년은 그의 자세를 교정해준다는 핑계로 손끝을 잡아 내려주었다. 케이의 손가락은 보드라웠고 따뜻했다. 아이의 피부는 도쿄에 산다는 쿠로오보다 더 희었다.
“…테츠 씨. 언제까지 손잡고 있을 거예요?”
“케이. 너 손 정말 애기 같다.”
“난 이제 3학년이거든요?”
“아, 아직 아기네.”
케이는 불만어린 표정으로 그를 빤 바라보다가, 손을 뿌리치며 됐다고 말하고선 문을 빠져나갔다. 어, 케이, 삐졌어? 급하게 뒤따라갔지만 아이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케이의 머리 위로 해바라기 수십 송이가 해님마냥 떴다. 그 나이면 아직 아기 맞으면서. 쿠로오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에 여전히 그 연약한 꽃잎이 문신처럼 남았다.
화를 풀어주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으나, 이후로는 다시 옛날처럼 지냈다. 배구공을 올려주고, 지친 날이면 마루에 나란히 앉아 부모님이 잘라준 수박을 먹었다. 그 날 이후로 쿠로오는 종종 홀로 손바닥을 만져보곤 했으나 그 때와 같은 느낌은 결코 나지 않았다. 케이는 어떻게 배구를 하는데도 그렇게 손이 보드라울 수 있을까. 대신 마주 앉아 그의 손을 곁눈질 하는 날이 늘었다. 뭐야, 뭐 묻었어요? 남의 시선에 기민한 아이는 금세 그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쿠로오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온기에 이어 소꿉친구와 다소 흡사한 퉁명스러운 말투가, 눈동자가 소년의 마음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 내일 도쿄에 돌아가.”
“그래요? 잘 됐네요.”
“안 아쉬워?”
그러다가,
“내년에 또 올 거 아녜요?”
“맞는데….”
“그럼 됐죠, 뭘.”
“케이는 오늘도 매정하네.”
도쿄로 돌아온 어느 날, 쿠로오는 자신의 방 창문을 투과해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무심코 제 미야기의 해바라기 밭과, 가운데를 가로지르던 어린 아이를 떠올리고 말았다. 셋 모두 따뜻한 색이었다. 아침 8시 6분에는 햇빛이 침대 근처까지 뻗어와 소년의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는 매일 아침 8시 6분 마다 소년을 떠올리게 되었다.
조금 더 지나서는 햇빛을 따라 등교하는 아침 8시 42분에도, 그리고 태양 아래서 뛰노는 매주 화요일 2교시에도 아이를 떠올렸다. 배구 실력은 얼마나 늘었을까? 꽃이 전부 진 뒤의 해바라기밭은 어떤 풍경일까. 미야기에는 컴퓨터도 또래 친구도 없어 쉽게 심심해졌지만, 케이는 그의 지루함을 곧잘 달래주던 유일한 아이였다. 이번 일 년 동안에는 또 얼마나 키가 자랄까? 블로킹은 많이 발전 했을까. 가능하다면 같은 팀이 되어 배구도 해보고 싶었다. 이번 가을에는 그는 매일 아침 소년을 생각했고, 겨울에는 약간의 훈풍만 돌아도 돌연 미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할머니의 마루. 손끝. 쿠로오는 손바닥 안을 문지르는 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 있었다. 소년을 만진 자리를 고스란히 더듬으며 감각을 회고했다.
그리하여 또 여름이 왔다.
케이는 보이지 않았다.
쿠로오는 비오는 날부터 시작해 줄곧 마루 위에 앉아 해바라기 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보름이 지나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해바라기 밭은 배구 교실이 끝난 케이가 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는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쿠로오는 멀거니 눈만 깜박였다. 저 모르는 사이 아이의 키가 반쪽이 되어 노오란 파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다만 그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향일화들이 일제히 서쪽을 바라보는 날만 몇 번이 흘렀다. 그는 미야기 이토록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케이가 없으니 쿠로오는 놀랍게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선생님이 내어준 방학숙제만 한참을 질질 끌다가 낮잠에 빠져들기만 열댓 번을 넘겼다. 찌를 듯한 더위에 가만히 있어도 전신이 축축해지길 한 달.
그 날은 빗줄기가 길었다. 도쿄로 돌아가기 이틀 전이었다. 짐을 다시 싸는 것조차 아쉬워 한참을 밍기적거리다가, 도망치듯 마루로 나왔다. 실들이 직선으로 뚝 뚝. 내리꽂듯 했다. 마루의 가장자리에는 웅덩이가 고였다. 태양이 없어 해바라기가 묵념했고 드물게 걸어놓은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비와 섞여 뎅그랑 울렸다. 파란 우산이 해바라기의 모가지를 찌르며 제게로 다가왔다. 쿠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혹시나 싶어 물안개에 희미한 인영을 바라보았는데, 우산 안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쿠로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섬광처럼 깨달았다. 키가 조금 더 자랐구나. 혹시라도 달아나버릴까, 그는 우산조차 쓰지 않고 슬리퍼를 찰박거리며 밭으로 뛰어들었다.
“케이!”
어둑한 낮에도 아이에게서는 햇볕 마른 냄새가 났다. 우산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일 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의 키는 3cm는 족히 자랐으나 그 낯은 민둥했다.
“왜 여태까지 안 왔어? 무슨 일 있었어?”
“배구를….”
“난 이사라도 간 줄 알았잖아.”
“그만둘까, 생각했어요.”
뭐? 쿠로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케이의 입술은 파랬다. 그는 아이의 곱슬머리 끝을 매만져 보았다. 눅눅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인상을 살풋 찡그렸으나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다는 소꿉친구를 억지로 끌고 밖에 나가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사연이 뚝뚝 떨어지는 낯으로 말하는 아이에게는 무력했다.
“배구를 그만둬도 일상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진학을 고려하면 나은 선택이고.”
“그럴 수도 있지.”
쿠로오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렇게만 말했다. 아이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제가 말을 꺼내니까.
“형아가, 미안하다고 말하더라고요.”
내가 하기 싫어졌을 뿐인데, 형아가 나한테 사과를 해서…. 도통 이해 외의 발언이었다. 케이가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꽤 조리 있게 말 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정신도 없거나, 혹은 정리할 생각이 없던 탓일 테다. 쿠로오는 가만히 아이의 눈동자를 보다가 되물었다.
“그래서 다시 할 거야?”
“뭘요?”
“배구.”
“…….”
후두둑 파란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머리만 겨우 케이의 우산 안에 집어넣고 있던 터라, 몸은 이미 젖어 으슬으슬하게 떨리던 차였다.
“네.”
아이는 몇 번의 달싹임 끝에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는… 형아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게 싫어요.”
“잘됐네. 나는 네가 계속 배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작은 머리가 요리조리 굴러갔다. 왜요? 중학생으로 보일만한 신장임에도 쿠로오에게는 아쉽게 못 미친다. 빼꼼 올려다보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 그는 씨익 웃었다.
“굳이 여름이 아니더라도, 계속 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칠 수 있잖아.”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는 과장스럽게 표정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우와, 섭섭한데. 이제 가랑비만도 못한 수준이 되어 촉촉하게 하늘에서 물기가 떨어진다. 쿠로오는 축 가라앉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나는 꽤 좋다고 생각하니까.”
“뭐가요?”
“네가.”
그는 돌연 내뱉고는 반 박자 뒤에 덧붙였다.
“해바라기 사이로 걸어오는 거.”
“…별게 다.”
“그러니까 내년 여름에는 올 거지?”
“벌써 내년, 인가요.”
“우리 귀엽지 못한 케이가 한 달 넘게 홀라당 배구교실을 빠져서 벌써 여름방학이 지나버렸거든.”
“그건 테츠 씨가 집 안에서 빈둥거리기만 해서 시간이 지나버린 거죠.”
“진짜 너무하네.”
투덜거리며 쿠로오는 그제사 우산에서 머리를 뺐다. 회색 구름 사이로 햇빛이 슬쩍 모습을 모였다 다시 숨길 반복했다. 해바라기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의 움직임을 가만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그럼 내년에 봐요.”
“그래.”
소년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손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우산을 꼭 쥐던 아이의 손을 덮고.
“내년에 보자.”
대답했다.
그런 여름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고하자면, 약속이 무색하게 저는 더 이상 미야기로 올라가지 못했다. 늦가을에 할머니가 세상을 뜬 탓이다. 먼 지방까지 올라갈 이유를 잃었으니 의미가 없음도 자명하다. 심지어 늙은 노인 홀로 지키던 집까지 처분한 이상에야, 마땅하다. 그는 일 년 정도 매일 8시 6분에서 아이를 떠올리다가, 미야기 없는 여름 이후로는 비오는 날에도 약속을 떠올렸다가, 삼 년이 지날 무렵 아이를 잊었다. 줄곧 품기엔 어린 이야기였고, 미야기와 도쿄에 거주하는, 연락처조차 모르고 두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아이 둘이 다시 만날 확률은 객관적으로 희박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몹시 놀랍게도, 5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 쿠로오 테츠로는 급작스레 그것을 떠올렸다. 익숙지 못한 우연이었다. 심지어 그 아이는 일전 봄에 연습 시합을 이유로 만난 적이 있었다. 헌데 왜 지금에서야 세 번의 여름이 기억났냐 물으면, 글쎄. 기실 그조차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땀이 비처럼 쏟아질 만큼 더워서? 혹은 저희 학교, 네코마가 합숙에 새로 초대했던 미야기 소재의 카라스노의 주전 중에 그 아이와 엇비슷한 노란 빛이 그곳에 있어서? 하필이면, 우연인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의 이름마저 케이이기 때문에?
“쿠로오 씨, 뭘 봅니까.”
“그러니까, 츳키.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 있던가?”
“하?”
뭐야, 쿠로오. 너 지금 카라스노의 1학년에게 작업이라도 거는 거야? 보쿠토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제 어깨에 턱하니 팔을 걸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심지어 츳키 표정 좀 봐. 네가 얼마나 가찮으면…. 가찮다니! 야, 츳키! 날 그렇게 생각했어?! 아뇨. 그것보다 딱 1.5배 정도 심하게 생각했죠. 헉, 돌직구….
그는 상처받은 양 상체를 굽으며 제 가슴을 붙잡았다. 옆에서 보쿠토는 엉뚱한 후배에게 80년대 아저씨처럼 들이대더니 꼴좋다며 낄낄 웃었다. 저희의 장난을 한심하게 응시하다가 이내 아이가, 아니, 츠키시마가, 아니, 케이가 뒤돌아섰다. 쿠로오는 느리게 몸을 다시 곧게 펴며 그가 볼카트를 향해 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아, 여전히 해바라기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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