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남자인 친구와 영화를 보는 약속을 잡는 것은 특이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라이벌 학교의 에이스와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다.


 쿠니미는 귀찮은 기색 잔뜩 내보이면서도 옷장 문을 열었다.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의 주전 선수인 제가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의 에이스와 만난다는 것을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득달같이 이것저것 캐물으려 달려들 것이 분명해, 오늘의 만남은 당사자들을 제하곤 아무도 몰랐다. 작년 겨울 있었던 미야기현 1학년들의 단체 합숙을 말해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합숙에 참여했던 킨다이치마저 부럽다던가, 왜 저는 빼놓고 만났냐고 토라진다면 제 추측은 더욱 자명하다.


 데이트도 아니고, 얼굴 아는 남자와 영화를 볼 뿐인데 딱히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두툼한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었다. 꽃봉오리 삼킨 삼월의 끝은 아직 겨울 냄새를 품고 있다. 자고로 옷은 따뜻한 게 제일인 법이다. 소년은 옷을 입고, 가방조차 없이 양쪽 주머니에 각각 지갑과 핸드폰을 넣고 집을 나섰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도 왜 고시키 츠토무가 다른 동급생이나 배구부 동료들을 두고 하필 제게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건지 알지 못한다. 광견이라 불리는 제 부활동 선배처럼 모난 성격도 아니고, 최소한 친한 사람들에게는 썩 살가워 보였는데. 심지어 그조차 대회나 연습시합을 제외한, 즉 사석으로 상대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 메일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되질 못했다. 혼자서 영화 보는 것이 그리도 민망한가. 어차피 저도 보고 싶었던 액션 영화였기에 순순히 응해줬지만.


 영화관 앞 동상 근처에 도착하자 약속 시간 5분 전이다. 쿠니미는 약속을 잘 안 잡는 만큼 대개의 경우에서 그럭저럭 약속을 준수하는 편이었다. 홀로 고개를 주억이며 주위를 돌아보던 그는 낯익은 얼굴에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먼저 나와 있었다. 그것도 저런 몰골로.


 저런 몰골이라 함은, , 쿠니미는 차마 가까이 하기 민망하여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모른 척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잠깐 머릿속으로 갈등했다, 도저히 사내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갈 때 할 차림새가 아니라는 의미다.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지는 않았다. 형광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 썩 준수했다. 그래, 문제는 그 점에 있다.


 고시키의 옷차림이 남자 둘이서 영화를 보러간다 하기에는 지나치게 준수했다.


 빳빳하게 다린 흰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재킷까지. 누가 보면 소개팅이라도 하러 가는 줄 착각할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바지는 검정색 데님이라는 것 정도. 신발도 운동화다. 정말 다행이군. 쿠니미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앞머리를 필사적으로 다듬는 고시키를 상당히 먼발치에서 응시했다. 손이 시려 후드 주머니에 꽂은 찰나였다. 고시키의 고개가 휘더니 제 코앞에서 멈췄다.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년이 저를 발견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도망도 못 가겠네. 아니, 백 번 생각해도 저기 내가 아니라 예쁘게 입은 여자 아이가 가야할 것 같은데. 영화관이 아니라 조금 비싼 파스타라도 먹으러 가야할 것 같다고. 쿠니미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쿠니미! 고시키가 평온하게 빠른 걸음으로 제게 다가왔다.


 “왔어?”

 “.”

 “옷 후드티 입었네?”

 “그냥 영화 보러 나올 뿐인데 뭘.”


 굳이 신경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제 말에 고시키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 그래? 조금 서운한 것도 같지만 도저히 이해 불가의 영역이다. 옷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쿠니미 역시 예의상 한 마디 해주기로 했다.


 “오늘 차려입었네. 오후에 데이트라도 있어?”

 “?”

 “? 데이트 있냐고.”


 헌데 반응이 이상하다. 기껏 차려입었다고 말도 해줬더니 도리어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미간을 좁힌다. 넥타이까지 매고 올 정도면 아무리 생각해도 데이트 아니겠냐고. 혹은 가족행사 정도? 이런저런 짐작은 그의 외침으로 인해 끝이 났다.


 “나 여자 친구 없어!!”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주위를 지나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쿠니미는 급작스레 민망해졌다. 여자 친구 없는 게 자랑이냐고. 자존심 상했나, 왜 그렇게 소리 지르는 건지.


 “그럼 말고.”


 쿠니미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영화관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솔직히 좀 쪽팔렸다. 고시키가 그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며 재차 강조했다. 나 정말 여자 친구 없거든? 인기는 많지만! 그래도 관심 있는 여자도 없어! 그 재잘거림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얌전히 무시하려던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하고 알았다. 어차피 그가 누구와 사귀는지 제가 알 바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이래서 피곤한 타입은 질색이다. 영화는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치는 듯했다.


 아주 약간 다행스럽게도 고시키가 미리 표를 예매해 둔 덕에 팝콘과 콜라만 사서 들어가면 되었다. 영화 도중에 무언가를 많이 먹는 성격은 아니라, 팝콘도 콜라도 중간 사이즈로 하나만 샀다. 고시키도 제 말에 많이 먹지는 않는다고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입장해 적당히 가운데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 부활동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조명이 어두워지고 광고가 나올 즈음에는 입을 다물고 팝콘을 조금씩 집어 먹었다. 어차피 광고를 볼 때 아니면 뭘 더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팝콘을 집으려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듯이 부딪치고 난 후로 고시키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팝콘에 손을 뻗지 않았다.


 “더 안 먹어?”

 “, . 난 괜찮아.”


 황급히 손사래 치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여 다시 팝콘을 몇 개 집어먹는다. 어차피 팝콘도 제가 들고 있는데, 영화 도중에 어련히 알아서 먹겠지. 애도 아니고. 달달한 캐러멜 맛 팝콘을 다시 한 움큼 쥐려는데 티셔츠의 소매가 흘러내려와 손등을 반쯤 덮는다. 쿠니미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그냥 팝콘을 쥔 채로 빼냈다. 음식을 입 안에 털어 넣은 후 소매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부스러기가 묻지는 않았다. 소매를 살짝 걷고 다시 팝콘을 집는데, 줄곧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고시키가 말을 던졌다.


 “쿠니미, 너 그 옷 잘 어울린다.”

 “그래?”


 가끔 집 근처에 나갈 때 편하게 입던 옷이다. 자주 빨아서 후드 티가 늘어졌을 정도라,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 게 조금 이상했다. 조금 미심쩍게 대답하자 고시키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첨언한다.


 “진짜 귀여워 보여.”


 그러니까, 뭐가? 쿠니미가 고개를 슬 기울였다. 설마 제가 귀엽다는 뜻은 아니겠지? 다 늘어진 옷이 귀엽다는 것도 상당히 이상한데, 제가 귀엽다는 말은 그보다 열 배는 더 이상했다. 부모님이나 선배도 아닌 저와 동갑인 사내 아이가 말했다는 것도 그 이상함에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러나 뭐가?” 라고 물으려던 쿠니미의 말은 묻히고 말았다. 조명이 다시 한 번 어두워지며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영화 배급사 광고가 스크린에 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찝찝함을 가득 안고 제 앞으로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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