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오이카와 토오루 씨, 정신이 들었습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아마도 의사인가 보다. 시선은 확실하게 저를 향하고 있다. 까만 동공 너머로 제 얼굴이 보인다. 서서히 차오르는 현실감은 확실히 정신이 든 모양 같다. “.” 나는 대답하며 가장 먼저 머릿속에 든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혹시 오이카와 토오루가 제 이름인가요?”

…….”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역시 본인의 이름을 도리어 되묻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상대가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이상한 쪽은 본인이었다. 객관적으로 소년은 자신의 상태가 다소 어딘가 어긋났다고 판단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이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병실 내부에서 숨소리만이 잘근잘근 떠돌았다. 몇 번 순진한 낯으로 눈을 깜박인다. 그 불규칙적인 숨소리들을 들고서야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뿔싸, 이 방에 있는 건 자신과 의사선생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 코앞에 선 의사로부터 벗어나 시야를 넓게 하자, 비로소 몇 명의 사람들이 더 비쳤다. 입을 쩍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기억에는 없지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얼굴이 아까 전, 힐끔 의사 선생님의 동공 너머로 흐리게 비쳤던 제 것과 닮았으니까. 단순한 머리색이라던가, 눈매 같은 것들.


의사가 그 중 한 가운데 선 여성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오이카와 씨, 혹시 이 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나,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므로 고개를 저었다. 토오루. 그러자 여자의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느낌에 심장이 덜컹,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제 심정은 아랑곳 않고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지극히 단순한 내용이었다. 본인이 몇 살인지 알고 있느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위를 기억하고 있느냐 따위의 시시한 물음들. 보통 사람이라면 망설임 없이 줄줄 흘러나왔을 답변이나, 정작 제가 말하려니 머릿속이 안개 낀 듯 서러워져 직전과 같은 문장 밖에 말하질 못했다.


역시 현재 환자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기어코 의사는 선고했다. 일시적인 증상일지, 영구적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고 자세한 영역은 정밀 검사를 해보아야 하겠지만 본인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없는 이 상황은 한 가지 결론밖에 도출해내지 않는다고. 침통한 의사의 말에 어머니, 로 추정되는 사람은 더욱 소리 높여 울지 시작했다. 아버지인 것 같은 사람이 어머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닮은, 그러나 30대 중반의 남자가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그 외의 외상이나 내상이라던가, 검사 예약에 대한 말을 늘어놓았다. 모든 것이 나 아닌 남의 이야기 같았다. 병실이 절망과 비탄의 장으로 물들었다. 생경했다.


그런데 찰나였다. 소수의 조촐한 인파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돌연 중얼거렸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고개가 돌려졌다. 그곳에는 민트색의 체육복을 입고 있던 한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여자의 울음을 달래주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호감 가는 외모의 청년은 의사선생님과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지금 저 소년을 보고 있는 것은 저 뿐이었다. 가장 구석진 곳에 서서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도, 나지막한 목소리도 저만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무언가 신기했다. 홀로 묵음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던 소년이, 기어코 한 마디를 뱉었다.


망할카와가.”


제 성을 닮은 욕 비슷한 말이었다. 푸하하.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그 울림이 너무 익숙한 탓일까? 정말 신비로운 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진짜 오이카와 토오루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나이도 취미도 특기도 가족도 친구도 전부 기억나지 않는데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모든 부재가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모르는 어떤 오이카와 토오루가 탄생한 날이었다.

 

*               *


나는 학교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왜 떨어졌는지는 모른다. 부모님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들도 모르고 있다고 짐작된다.


몇 번의 지루한 정밀 검사를 치룬 결과, 의사는 기억 상실이 확실하다고 진단했다. 옆에는 아버지와 친형(깨어났던 날 의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남자였다.)이 있었다. 기질-역행성 기억상실이라고, 꾸준히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을 수는 있는 건가요? 형이 물었다. 흐렸다. 나는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낯설었다.


완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운이 좋아 기억을 조금씩 되찾는다고 해도,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릴 겁니다.”


의사는 말했지만, 기질 저는 아무렴 어떤가, 라는 심정이었다. 숨을 쉬는 데에도 이상이 없고, 제대로 자아를 가지고 생각을 하고 있다. 머리를 약간 다친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 지금 당장은 건망증세가 자주 나타날 거라 말했지만 최소한 삶에 이상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신체 회복력이 다소 빨랐던 것을 생각하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보호자분들께서 잘 챙겨주세요.”


그의 당부대로 가족들은 어떻게든지 옆에 붙어서 저를 도왔다. 아니,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자신의 이름에서 토오루가 관통하다는 의미의 토오루()라는 것도 알았고, 18살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생일은 7, , 7월의 어느 날이라고 한다. 막둥이로 태어났는데, 어릴 적에는 발육이 다소 느려서 굉장히 가족들이 걱정을 했다고. 그런데 지금 제 키랑 몸을 보면 절대로 발육이 느린 편은 아닌 것 같은데. , 모르겠다.


가족의 이름도 배웠다. 어머니, 아버지, . , 형은 결혼도 했고 애도 있다고 했다. 조카 이름이, , 무슨 루로 끝났는데. 주말에 함께 다 함께 병문안을 온다니 그 때 다시 물어봐야 겠네.


잠에서 깨어난 일주일은 몹시 지루하고도 바빴다. 가족들은 끊임없이 제게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했다. 나는 모르는 나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말해도 기억이라곤 전혀 나질 않는데. 그들은 어떤 작은 기적에 몹시 매달리는 눈치였다. 그래도 가족이고, 저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꽤 슬플 것 같으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제가 토오루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던 금요일이었다. 전날 병원에서 하루 종일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한 나머지, “엄마, 내가 자주 보던 책이나, 좋아하던 음악 같은 건 뭐에요? 병원에 계속 있으려니 지루해서.” 라는 질문에, “토오루, 너는 책이라면 늘 배구 잡지만 품에 안고 살았지. , 그러고 보니 배구는 기억나니?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잖니.”라고 대답하며 약 반 년 치의 배구 잡지를 들고 오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다소 너덜거리는 잡지의 가장 최근호를 꺼냈다. 월간 배구. 표지 상단에 큼직하게 박힌 단어가 인상 깊었다. 의미 없이 팔과 다리가 간질거렸다. 굉장히 그리운 울림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러니까, 내가 아닌 이전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배구를 많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느릿하게 한 장 한 장 넘겼다. 서브, 리베로, 봄고 예선 등 생소하지만 기시감이 드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또 손끝이 움찔 떨린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지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깜한 지식들을 끼워 맞춰보려고 노력하며 열심히 기사들을 탐독하던 중이었다.


난데없이 문이 덜컥 열렸다. 마땅히 검진을 온 의사 선생님, 혹은 퇴근 후 잠깐 제게 들린 가족으로 짐작한 채 고개를 돌린 저는 낯선 얼굴에 눈을 댕그랗게 떠버렸다.


.”


아니다.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처음 제가 깨어난 날에 보았다. 분명 망할카와가.’ 따위의 말도 했었지. 기억이 났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위의 상황에 정신없이 휩쓸렸기 때문에 통성명은 하지 못했다.


우리 첫날에 봤었지?”


그러니까 이름이, 그때와 다름없이 남자 아이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못생긴 얼굴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와이즈미.”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양 대답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해.”


이런 나라도, 앞으로 잘 부탁해. 이미 제 이름은 알겠지만, 저에게는 이 통성명이 처음이므로 손을 내밀었다. 가습기의 연기가 구름처럼 퐁퐁 솟아나왔고 까만 창문 너머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났다. 이와이즈미는 한참을 제 손만 빤 노려보다가, 겨우 손을 맞잡는다.


오냐.”


겨우내 나온 대답이 어쩐지 그답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약간 나왔다.





'HQ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오이] Aparecium 1996 : Coward  (0) 2018.05.11
[이와오이] Aparecium 1970 : Sugawara  (0) 2017.05.13
[마츠오이] 범상(凡常)  (0) 2017.03.26
[세이죠] Happy Birthday  (0) 2017.03.01
[고시쿠니] T  (0) 2016.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