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1.

2 체육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새학기가 시작된 후 처음 가는 부활동이었다. 그거 알아? 1월에 이노우에 감독님 은퇴하셨잖아. 바로 옆에서 은근히 운을 떼어오는 것에 그랬지, 하고 여상하게 대꾸했다. 저도 그도 모를 리가 없다. 그 탓에 현민대회가 있었던 3월까지는 오로지 고문 선생님과 코치, 그리고 주장 선배의 의논 아래 프로그램을 짜지 않았었나. 전 감독이 지휘하던 당시의 연습 내용을 상당 부분 땄지만 그래도 꽤 어설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새로운 감독님 오신대. 굉장히 유명한가봐. 고문 선생님이 진짜 기뻐하시더라.”


토라가 씩 웃으며 말했다. 코우센의 배구부의 주전 선수인 그는 감독의 부재에 가장 크게 실감하고 있는 이 중 하나였다. 코치님이 애쓴 보람이 있나봐. 감독님의 은퇴가 확정될 무렵부터 자신이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배구부 감독을 수소문하고 다녔던 나가마츠 코치를 떠올렸다.


그럼 올해에도 전국 우승을 목표로 삼아야 겠네.”

당연하지! 이번에는 이타치야마도 꺾어버릴 테니까!”


조금 들떴. 지난 번 인터미들에서 중등배구 유구한 강자인 이타치야마에게 패배해 2회전에서 떨어진 것은 시합에 나가지 않는 저에게도 상당히 아쉬웠던 일이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부실동으로 향하는 토라와 갈라지고, 먼저 체육관에 들어섰다. 한 달 만에 신는 배구화다. 삐걱이는 코트의 마찰음이 반갑다. 오이카와 선배! 고작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라도 반가운지, 코트를 정비하고 있던 사내 녀석들이 우루루 몰려온다. 저는 마냥 익숙하지만 남이 본다면 돈이라도 뜯어내려 하는 줄 알 것이다.


방학 잘 보냈어?”

그냥 그랬지.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신입 부원들이랑 인사 정도만 하고 빨리 끝날 것 같은데.”


그럼 드링크는 생략할까? 스코어보드는? 으음. 스코어보드는 부탁할게. 연습게임이라도 할 셈인가보다. 오이카와는 지나친 환대를 흘리듯 받으며 서둘러 체육관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코어보드와 함께 개인적으로 일일이 득점을 기입해두는 공책을 함께 꺼내 체육관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못 보던 얼굴도 더러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어수룩한 행동, 혹은 긴장으로 빳빳한 몸이 누가 봐도 신입생인 것이 티가 났다. 나도 작년에는 저랬을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훑곤 의자도 꺼내둔다. 곧 고문 선생님과 코치가 올 것이다. 시계를 한 번 보고 체육관 정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때마침 토라가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대박 소식!”


일동 시선이 그에게 몰린다. 이제 자신이 누군가의 선배가 된다는 자각은 있는 걸까? 한숨이 푹 나온다. 옷 갈아입으러 간다더니 왜 저렇게 달려오는 거야. , 라고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언젠가 핀치에 몰려 의기소침해진 팀의 사기를 끌어올릴 적의 그 성량으로 토라가 쩌렁쩌렁 외쳤다.


이번에 새로 온다는 우리 감독, 우시와카야!”


그대로 입술이 짜부라든다. 눈이 홉 뜨였다. 설마 그 우시와카요? 거짓말! 진짜야! 내가 직접 뒷모습 봤다니까! 고작 뒷모습이잖아! 순식간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정식 입부하게 된 신입생들을 놀릴 생각에 묵직한 척 하고 있던 3학년들은 물론이고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신입생들 가릴 것 없이 흥분과 불신으로 말문을 텄다.


우시와카라는 이름의 파급력이 그러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불과 대학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된 배구 선수. 대학을 졸업하고선 파르마에 입단하여 이탈리아에서 귀화를 권유할 정도로 활약한 그는 일본 배구계에서는 역대 최고의 윙스파이커라 한다면 단연 한 손 안에 드는 우수한 선수였다. 얼마 전에 선수 은퇴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다른 구단의 감독도 아니고 고작 미야기 소재의 중학교 감독이라니. 대체 뭐가 부족해서? 센다이가 그의 고향이라고 하니, 본가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던 걸까? 그 전에 나가마츠 코치님은 도대체 무슨 인맥을 동원했기에 그 우시와카를 감독으로 데려온 걸까. 어쩐지 얼떨떨했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설렘 탓이겠지.


왜 그렇게 떨떠름한 반응이야, 미야비. 너 우시와카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그랬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아했다. 어릴 적에. 그런데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 괴상하리만치 그 남자를 싫어했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친한 이는 왜 저가 아니라 그런 놈을 응원하냐며 서운한 기색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우시지마 선수의, 다른 코트의 선수들을 죄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이 놀랍고도 좋다고 말했을 때에는 그마저 잠시간 얼굴을 굳혔더란다. 그 때의 침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모든 유기된 것들이 숨을 죽이고 서리를 맞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 분위기가 두렵기보다 서러웠다. 그래서 팬을 자청하기를 포기했다. 소학교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받아보는 배구 잡지에는 그의 소식이 꼭 한 면쯤 실려 있어 오이카와 미야비는 어쩔 수 없이 우시지마의 근황을 전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그 기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유년의 동경심은 멀리 떠나지 않아, 내심 그가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이 제 일인 양 뿌듯하기도 했다. 작년 갑작스레 선수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을 땐 적잖이 충격도 받았다. 일주일 내내 시무룩하여 토라가 먹고 기운 내라며 하이라이스를 사주었던 기억이 있다. 이를 생각하면 저는 감추고만 있을 뿐, 여전히 우시지마 선수의 팬인 것 같다.


마침 체육관 입구에서부터 인영이 셋 보인다. 체육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죄 그로 쏠렸다. 부담스러우리만치 반짝이는 눈들은 배구를 하는 중학생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동경이다. 한명은 틀림없이 고문인 이케다 선생님, 다른 한명은 나가마츠 코치, 가운데 있는 한명은 유난히 몸집이 다부지고 크다.


.”


누군가가 얼빠진 감탄을 냈다. 진짜로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코치의 인맥에 감탄을 보내야 할 때였다. 코우센에 오길 잘했어. 신입생들의 중얼거림에 재학생 역시 공감했다. 시라토리자와 출신의 우시자마가 코우센에 감독으로 부임하는 날이 오다니.


현대에야 일본 배구가 더 이상 흔히 말하는 몰빵 배구에서 장점을 찾지 못하고 콤비네이션 중심의 배구 혹은 스피드 배구 물결을 따라감에 따라 학생 배구에서도 그러한 스타일의 팀이 늘어가고 있었고, 미야기 현 소재의 대다수의 배구부는 학생 배구에서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스피드 배구의 장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몰빵 배구를 하는 팀과의 시합에서 더 강점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었고, 한 때 미야기 현의 왕자王者는 꾸준히 몰빵 배구를 하는 시라토리자와 학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우시지마가 에이스로 있었던 시라토리자와 고등부와 당시 미야기 현에서 가장 먼저 스피드 배구를 도입했던, 우시지마와 마찬가지로 미야기의 자랑이자 일본이 낳은 천재 세터라고 불리는 국대 카게야마 토비오가 소속되어 있던 카라스노 고교와의 시합 이후 미야기 현의 많은 학교들이 대 시라토리자와를 목적으로 스피드 배구 팀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결과 미야비가 15살인 현재 시라토리자와 고교는 상당히 약체화되었다.


그러니 시라토리자와의 과거의 영광이며 원맨팀의 주축, 최고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시라토리자와 중등부가 아닌 스피드 배구를 하고 있는 코센에 온다는 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 그로선 단순히 현재 미야기 현 중학 배구 2대 강호라고 불리는 팀을 선택했을 지도 모르지만.


크흠.”


기대 한껏 모은 등장에 배구부 아이들이 자연스레 고문과 코치의 앞에 옹기종기 몰려들었다. 당장 신입생들의 소개보다 더 설렌 등장이다. 미야비 역시 3학년 매니저라는 권력을 발휘해 누구보다 선두에 섰다. 이케다 선생님은 저가 더 뿌듯한 낯으로 우시지마를 소개했다.


오늘부터 우리 배구부에 감독으로 부임하게 될 우시지마 와카토시 감독님이시다. 이상하게 부르지 말고 감독님이라고 불러.”

, 감독님!”


주장인 유라도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는데, 넉살 좋은 토라는 제일 먼저 감격하여 외쳤다. , 너 바로 일 분 전에 우시와카라고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잖아. 3학년 동료들이 찬 눈으로 흘겨도 그는 꿋꿋하게 마저 외쳤다.


신다 토라가! 3학년 리베로 입니다!”

우시지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시지마는 그의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허억, 감독님이 대답해주셨어! 당연하지, 감독님도 사람인데. 가벼운 핀잔에도 토라는 감격의 홍수에 빠져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야비는 그는 가벼이 무시하기로 했다. 작년부터 히마의 스파이크를 받아내는 것도 버거운데, 우시와카의 스파이크는 얼마나 대단할까? 라며 눈을 빛내던 녀석이었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놀랍게도 우시지마 역시 가볍게 그를 무시하고 인사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잘 부탁한다.”

!”


코치는 주장과 부주장을 가리켜 먼저 감독님께 소개했다. 주전 선수들은 일반 부원들과 똑같이 찬밥신세였다. 아마도 감독의 부임 첫날부터 자칫 선수들이 차별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어 그는 배구부의 유일한 여성인 미야비 역시 지목했다.


, 이쪽은 우리 부 매니저에요. 선배.”


엇비슷한 색의 눈이 마주쳤다. 제 가족 때문에 눈치만 빨라진 그녀는 남자가 얼핏 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시합 때에도 생각했지만 되게 읽기 힘든 얼굴이네. 미야비는 생각을 내색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3학년의 오이카와 미야비라고 합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제 남자는 누가 봐도 놀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왼손을 내밀었고, 미야비 역시 자연스레 왼손을 내밀어 손을 맞잡았다. 토오루보다 크고 단단한 손이다. 수천수만 번을 바로 이 왼손으로 스파이크를 내려쳤겠지. 손바닥 안 갈라진 세월의 계곡이 느껴진다. 어쩐지 알 수 없는 기분에 가슴 언저리가 술렁인. 미야비는 이 기분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그래, 오이카와.”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내뱉는 말이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