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첫날 하루, 감독 우시지마는 차분하게 학생들의 실력을 지켜보았다. 큼직한 체구에 위명까지 더해져 압박을 느낄 법 한데도, 학생들은 피하기는커녕 새로운 감독에게 달려들었다. 미야비는 이러한 풍경에 팬미팅라는 단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우시지마는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었다. 아이들을 싫어하고 냉정한 인상인 줄로 알았는데. 가끔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그가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했다. 미야비 역시 앞으로의 1년을 기대하며 3학년 첫 부활동을 끝냈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다 떨어졌던 계란을 사고, 할인 중인 품목 몇 개를 사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습관인 인사는 허공만 한 바퀴 머물다 돌아온다. 깜깜한 집 안은 누구도 오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익숙한 일이라, 그녀는 능숙하게 불을 켜고 짐을 놓은 후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밥솥의 뚜껑을 열 때다. 미야비의 예상을 깨고 현관의 문이 덜컹 열렸다.


?”

? 미야비쨩, 언제 온 거야?”


누가 할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떨떠름한 낯으로 제 핏줄을 마중했다.


그러는 토오루야 말로 언제 온 거야?”

아까 저녁에.”


냉장고가 비어있어서 방금 밖에서 사 먹고 왔어. 한 사내가 그리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제 자식 내버려두고 홀로 끼니를 때웠다는 말은 지나치게 매정했으나 고작 저런 사소한 문장으로 서운해지기엔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랜 세월을 보냈다. 애초에 미야비 역시 그가 오늘 집에 도착한 줄도 몰랐으니 셈을 따지면 피장파장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마저 제 몫의 식사를 차렸다.


이제 먹는 거야?”

부활동하고 왔으니까.”

. 벌써 개학할 때가 됐나?”

지난주에 했어.”


미간을 잠깐 찌푸리던 남자는, 이내 경쾌한 어조로 시간 빠르네.” 덧붙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무정은 도처에 있었다. 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일별한 미야비는 덧붙이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몇 분 간 식탁 위 정갈한 찬을 보던 남자가 물었다.


혹시 이와쨩이 다녀갔어?”

, 어제. 주말이라서 아빠가 밥 사줬거든.”

아깝다! 하루만 더 빨리 올 걸. 그럼 오이카와 씨도 이와쨩에게 밥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밥을 얻어먹기 전에 토오루 얼굴에 멍이 들지 않을까.”


너무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여전히 발랄하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말투도 행동도 심지어 얼굴도 30대 중반처럼 보이지 않는다. 잘생긴 얼굴은 본인이 신경 써서 관리하는 탓에 끽해야 20대의 외관이다. 누구도 이 사람이 제 부모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미야비의 가장 가까운 혈연의 이름이다. 정작 미야비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가 아닌 그의 오랜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남자지만,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미야비의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닌 이와이즈미 하지메니까.


오늘도 그렇다. 하나 뿐인 딸의 개학 날짜도 모르고 저녁 9시가 넘어갈 때까지 그녀가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 데도 걱정의 말 한 마디 없다. 직업상 자주 출장을 가는 치이라 일주일 만에 얼굴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야비는 전부 알았다. 그가 자신과 오래 있는 것을 못견뎌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직업을 골랐다는 것을. 어릴 적에는 자주 상처받았고, 아빠의 품에 안겨 울기도 했지만 이제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안다. 전부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하나 뿐인 가족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새학기면 반도 바뀐 거야? 친구는 사귀었어?”

새 친구는 모르겠지만, 같은 부의 친구가 있어서 괜찮아.”

미야비 부활동이, 저번에 들었던 그건가?”

.”


이와이즈미 이모가 만들어준 소고기감자조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엌 전등만 켜둔 탓인지 토오루의 뒤가 어두컴컴하게 보였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짧게 침묵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옅은 쓴웃음이 입술 아래 그림자를 만든다.


미야비쨩도 가만히 보면 되게 배구 좋아한단 말이야.”

누구 닮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게.”


대체 누굴 닮은 걸까. 오이카와가 한숨 쉬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미야비는 의아하여 눈만 한 번 깜박였다. 왜 제 젓가락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 경우에는 젓가락을 든 손이 문제인가. 그녀는 제 말이 토오루의 어딘가를 자극했음을 인정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에도 제대로 잠 못 든 채 술이나 퍼겠지. 미안. 가볍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들던 차였다. 오이카와가 먼저 여상스러운 체 하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조심해. 그래도 남자는 다 늑대들이고, 미야비쨩은 날 닮아 엄청 예쁘니까.”

모욕적이야.”

뭐어?”

토오루보다는 아빠를 닮고 싶었는데.”

아니, 그거 우선 유전적으로 무리잖아.”


그리고 이와쨩은 못생겨서 안 돼. 왜 토오루 주제에 우리 아빠를 욕하는 거야? 미야비쨩 정말 누구 딸이야? 아빠 딸. 그거 내가 아니라 이와쨩 말하는 거지? 너무해!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끝냈다. 미야비는 설거지를 하고, 어쩐 일로 제가 빨래를 하겠다는 토오루에게 기꺼이 제 몫의 빨래더미를 넘겼다. 텔레비전을 켜지 않아 두 사람의 말소리를 제하면 집은 조용했다. 불은 켜져 있지만 빛에 온기는 없다.


침실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때때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답장하며 베란다를 응시했다. 세탁기 옆에서 오이카와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자가 아주 오랜 어느 날을 회상하고 있음을 알았다. 저 하늘 위를 수놓은 별들처럼, 아마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마냥 반짝이고 찬란할 것만 같던 청춘의 어드매를. 자신이 망가뜨린 꿈을.


배구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늘 저런 모습이었다. 배우 마냥 유연하게 움직이던 얼굴 근육도 일시에 방향을 잃곤 했다늘 손끝에 아슬아슬하니 걸리던 날을 그리워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도리 없이 배구와 오이카와 미야비의 태생에서만 솔직했다. 내가 배구를 좋아하는 게 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야비?"


살짝 열린 베란다 문 너머로 오이카와가 말을 건넸다. 담배 냄새가 난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자. 나도 빨래 널 줄 아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오루 기다린 적은 없지만. 정말 매정하네. 갈수록 이와쨩만 닮아가. 유전적으로 무리라며? 나한테 이러는 부분이 말이야. 그건 토오루가 토오루니까 어쩔 수 없잖아. 누구도 진심 없는 우스갯소리로 균열을 덮는다. 오늘 밤,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미야비는 조용히 침실로 들어갔다. 자신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오히려 그를 괴롭게 할 테니까. 내가 그에게서 배구를 빼앗았으니까.


오이카와 미야비(及川 雅).

나는 토오루의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 태어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