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가 내재된 푸른 독 살점을 썩히고




 “그럼 간단하게 이번에 맡은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단정하게 생긴 리포터가 웃음 지으며 마이크를 넘긴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촬영장 한 켠에 겨우 마련한 인터뷰 공간은 상당히 빈약했다. 중계 카메라 너머로는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남자는 일련의 시선을 거두며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음지었다.


 “저희 감독님의 저를 너어무 예뻐해 주셔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도 우리 예쁜 윳쨩, 그러니까 유카리쨩을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소꿉친구 역할을 맡게 되었답니다!”

 “어머, 윳쨩은 애칭인가요?”

 “네. 유카리는 윳쨩, 그리고 제가 맡고 있는 이노우에는 이놋치라고 부르고 있어요. 제가 애칭으로 부르는 걸 좋아하거든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황금시간대의 수목 드라마 주조연 자리를 꿰찬 것은 반 즈음 운이었다. 오이카와는 발랄한 어투로 리포터의 질문에 대답하며 머릿속으로 과거를 흘린.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며 울었다. 데뷔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라면 자신이 추태를 부린 장소였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제 소속사 대표님과 친분이 있는 감독의 생일 파티였다. 물론 그가 감독과의 친분은커녕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였으나, 상당히 인지도 있는 유명인이기에 신인인 저를 소속사에서 강제로 보낸 것이다.


 함께 간 소속사의 식구들이 감독에게 선물을 건네고, 그의 눈에 들어보려 갖은 애를 쓰는 사이 오이카와는 홀로 멀리 떨어져 자작했다. 비록 신인이었지만 저렇게 친분을 쌓아서 어떻게든 편의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그의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이 남자는 연예계의 생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게 실력만을 주장하고 있었다. 오래 전 배구를 했던 것에 대한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그는 술을 마셨고 결과적으로 취했다. 공교롭게도 그 때 누군가 다가와 오이카와의 옆자리에 앉았더란다. 그는 제 옆의 여자에게 술주정을 부렸다. 저기요, 이와쨩 좀 불러주세요. 매니저 아닌데요. 소꿉친구에요. 아니, 소꿉친구도 아닌데. 맞나? 이제는 모르겠어. 친구도 아닐 거야, 아마. 전화 해볼까? 번호 바뀌었으면 어쩌지. 익숙한 번호를 습관처럼 눌렀다가 그냥 닫아버렸다. 오이카와 씨, 못하겠어. 응? 아니야. 애인은 무슨. 여자도 아닌데? 걔 못 생겼어. 키도 작고. 사실 성격도 무지 나빠. 응. 아니. 그런데… 아니야. 이건 말 안 할래.


 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여자는 웃는 듯 술잔을 홀짝였고 오이카와는 제 잔 아래에서 생기는 희미한 소용돌이를 보며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 씨랑 그 녀석, 부모님이 되게 친했어. 어머니끼리 고등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대. 집도 가까워서 자주 교류했는데, 친구가 임신 시기마저 겹쳤으니 매일 붙어 다닐 만도 했겠지. 소꿉친구가 나보다 한 달 정도 더 일찍 태어났어. 그러니까, 응. 오이카와 씨는 이와쨩이 없이 살았던 때가 없구나. 징그럽다고? 에에, 전부 나보고 그런 말 하더라. 그럼 오이카와 씨가 더 징그러운 말 하나 알려줄까? 알렉산더 대왕 알지? 응, 그 대왕님의 생일이 오이카와 씨의 생일이고 대왕님의 사망일이 이와쨩의 생일이다? 어쩌면 우린 운명일지도.’


 일순간도 이와이즈미 없는 세상에서 숨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진부하지만 사실이었다. 함께, 라는 부사가 저희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들은 없으리라. 같이 배구를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파트너가 되면서 결속력은 강해졌다.


 ‘배구, 그래. 배구라는 단어도 빼 놓을 수밖에 없지. 있잖아. 오이카와 씨 원래는 배구 했었거든? 배구 없는 삶을 생각도 못 해봤을 정도로 열심히 했단 말이야. 어느 정도였냐면, 이와쨩이. 그러니까 소꿉친구가 옛날에 나한테 그랬었어. 넌 배구 없이는 못 살 놈이라고. 죽을 때까지 공만 쫓을 운명이라고. 음, 원래 운명은 이와쨩이 아니라 배구였던 걸까? 실은 둘 다 아니었지만.’


 정말로 좋아했다. 천재는 아니었지만 실력은 뛰어났다. 천재에게 뒤지기만 했지만 오이카와는 충분히 꽃피었다. 고등학교까지 이와이즈미와 함께 배구를 했다. 대학은 갈라졌지만, 여전히 배구를 손에서 뗄 순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비록 이와이즈미가 아닌 다른 에이스였지만 그는 최초로 우승했다. 대학 리그였다. 그 공의 반이 오이카와의 몫이었다는 건 팀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관객석에 있었다. 그는 마치 제가 우승한 것처럼 오이카와의 우승을 축하해주었다. 뭐야, 오이카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라면 가능할 줄 알았어. 오이카와는 삐걱이는 무릎마저 잊고 마주 웃었더란다.


 ‘데드 플러그였던 셈이지. 사실은 대회 기간 중에도 가끔 무릎이 쿡쿡 쑤셨거든. 그런데 그야, 옛날부터 오버워크 할 때면 경험하곤 했고. 당연히 그 때에도 그러려니 했는데, 우승 이후 연습 중에 말이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무릎이 아픈 거야. 그만 붙잡고 주저앉았어. 그 날 병원 갔는데, 뭐라고 했더라. 더 이상 배구는 무리일 것 같다고. 응.’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눈가가 처연하게 내려앉는다. 마땅한 부상이었다. 처음 배구를 시작할 적부터 스파이크 서브만을 연습했다. TV너머로 3연속 서비스 에이스를 얻어내던 한 선수의 모습이 너무 멋져서. 몸이 굳어지기 전부터 점프 서브만을 연습한 것으로도 모자라 꾸준히 있어오던 신호마저 무시해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선수로서의 종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꼭 배구를 하고 싶다고 이 악물고 부탁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의사는 말했다. 독일에 유능한 정형의가 하나 있는데, 비용도 시간도 확률도 장담할 수 없다고. 다만 그 확률에 기대고 싶을 정도로 진심이라면, 연결시켜줄 수 있다고. 그래서 독일로 갔다.


 ‘사실 친구들에게 연락 안하고 그냥 확 가버렸거든, 나. 그도 그럴게, 수술하고 재활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잖아? 그럼, 짜잔! 모두의 아이돌, 오이카와 씨 부활! 보고 싶었지? 라며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단 말이야. 이와쨩은, 뭐. 한 대 때릴지도 모르지만. 정말 독일로 가면 나을 거란 생각 밖에 없어서, 부상이라며 괜히 투정부리고 슬픈 척 할 가치도 못 느꼈거든.’


 그러나 생각은 그저 꿈으로 남고, 오이카와는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어느 정도 뛰는 것은 가능했지만 배구선수를 직업 삼기에는 무리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아, 그 무력감. 2년이 공중으로 날아간다. 오이카와는 외국어가 쏟아지는 거리 가운데에서 망연히 서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배구에 대한 상실감이 지나치게 컸는데,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이 이와이즈미 밖에 없었다. 태초부터 그에게 있을 거라 확신한 것들이 배구와 이와이즈미 둘 뿐이었던 것이다. 헌데 왜 하나를 상실한 지금은 남은 하나마저 보이질 않는지.


 오이카와는 일본 국가번호 두 자리만을 누른 채 멈췄다. 혹시 전화를 걸었는데, 낯선 사람이 누구세요,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와이즈미가 너무너무 화가 나서 날 보려 조차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왕왕거렸다. 결국 지금까지도 오이카와는 그에게 차마 연락 걸지 못했다. 오이카와 씬 정말 이와쨩에게 미움 받기 싫단 말이야.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로.


 ‘그쪽 이름이 오이카와 토오루, 맞죠? 얼마 전 뮤직비디오로 한참 화제 된 배우신거죠?’

 ‘선수.’

 ‘네?’

 ‘…진짜 되고 싶었는데.’


 쿵. 그리고 암전. 깨어났을 때 오이카와는 집이었다. 사흘 후 소속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저에게 이번 드라마의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고. 감독이 오이카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으니 꼭 부탁드린다고. 알고 보니 그 파티에서 만난 여자가 이번 드라마의 메인 작가였다고 한다. 우스운 인연이다. 시놉시스를 읽은 오이카와는 제 처지를 연상시키는 남자를 보고는 수락했다.


 “벌써부터 오이카와 씨 연기가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던 걸요?”

 “와, 누가 퍼트렸대요? 방영 시작하면 난 이제 큰일 났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 얼굴이 피로했다. 오이카와는 남몰래 눈을 진하게 깜박였다. 드라마 방영이 다가오면서 촬영은 더욱 촉박해지고 그 탓에 최근에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촬영장에 있어야만 했다. 벤에서 쪽잠을 자는 하루의 연속이라 몸도 뻐근하다. 하지만 연예인은 그런 걸 내색해선 안 되는 직업이라던가. 옛날부터 웃는 모양에는 도가 터서 다행이었다. 그는 입매를 조금 더 휘었다.


 “데뷔 때부터 연기력으로 화제를 모았으니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아닐까요?”


 은근히 저를 띄어주는 리포터에게 이 말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 겸양을 떨곤, 다시 인터뷰를 진행한다. 주로 드라마의 줄거리나 이노우에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노우에는 원래 음악을 정말 하고 싶었지만, 회사를 이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쳐 어쩔 수 없이 음악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재벌 2세였다. 초등학교 동창인 소꿉친구 여주인공을 어릴 적부터 짝사랑하고 있어 묵묵히 그녀의 옆을 지키는 순정적인 남자기도 했다.


 “사실은 이노우에에게 정이 많이 가요. 조금 저랑 닮았거든요.”


 오이카와는 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 떠올랐다. 사랑인지 의존인지 강박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자 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강제로 배구를 그만두게 되고 사계절을 헛돌았다. 대학은 자퇴했다. 체육특기자로 추천 입학한 것이기 때문에 배구를 못하게 된 지금은 돌아갈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지?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악쓴 재활치료 덕분에 선수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취미로 공을 조금 만질 수 있게 될 즈음, 불현듯 과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있잖아. 만약 오이카와 씨가 배구 말고 다른 것을 한다면, 뭐가 좋을 것 같아?’

 ‘왜,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연예인이라던가, 아이돌이라던가. 지금 얼굴 보는 것도 징글징글한데, 정말 텔레비전에서까지 네 놈 얼굴 보게 된다면 답이 없겠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나가던 농담이었다. 그 때의 상황도, 당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하나도 기억에 없지만 그의 대답만은, 호흡의 간격마저 똑똑히 기억났다. 응, 그럼 연예인이 되자. 오이카와는 단순히 그 한 문장을 상기하곤 결론지었다. 단지 이와이즈미가 ‘그럴 것 같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당위는 충분했다.


 대중매체는 훌륭한 연락책이다. 비록 그에게 이와쨩, 나 이제 더 이상 배구 못한대. 라며 울 수는 없겠지만 오이카와 씨는 그럭저럭 잘 먹고 살고 있다고 웃는 얼굴을 보여줄 정도는 되었다. 네가 남아있어 생을 버텼다는 고백은 죽을 때까지 못하겠지만 어느 먼 미래에 지금은 연락이 끊긴 소꿉친구가 있었다, 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기어코 너를 끊어낼 수가 없어 나오는 이기. 나를 보고 들으며 절대 네가 날 잊지 않길 바라는 비겁. 오이카와는 카메라를 보며 웃는다. 다행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을 이와이즈미에게 건넬 수 있다. 의지에 관계없이 그는 전부 받을 것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정물이 되리다.


 우리의 이별은 아직 먼 일이다. 비록 일방향일지라도 오이카와는 그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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