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굳이 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지만 자라는 과정이 고통스러워 빼달라고 우겼다. 마취를 하고 왼쪽 위와 아래를 발치했다. 안쪽에 물고 있는 솜을 뺄 수 없어 말을 꺼내는 것이 힘겨웠다. 자신의 반 투정으로 치과까지 함께 온 아오네가 눈빛으로 괜찮냐 물어도 후타쿠치는 음음, 목울음 이상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반쯤은 다행이었다.
아직 마취는 풀리지 않았지만 입 안쪽이 허하고 얼얼한 감각은 생생했다. 지금은 이런데 마취가 풀리면 어떻게 될까, 약을 처방받으면서도 어쩐지 두려웠다. 약사는 덩치가 곰만한 사내 둘이 들어와 아무 말도 없이 처방전만 내미는 모양을 두려워했다. 저희 눈치만 힐끔 살피는 것이 느껴졌지만 후타쿠치는 대답을 할 처지가 아니고, 아오네는 원체 말이 없는데다가 애초에 직원의 눈빛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내 둘과 약국 직원 하나, 약사 한 명 총 넷 사이의 어색한 침묵만을 두고 겨우 약을 받아 밖으로 나선다.
햇빛이 따사로워 치과에서 찜질을 하라며 주었던 얼음팩을 조용히 왼쪽 뺨에 가져다 댄다. 지나치게 차가웠다. 아오네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에 그저 손을 내저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 아오네는 미심쩍은 낯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제 손짓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후타쿠치는 인상을 찡그리고는 손을 뻗어 제 친구의 뺨을 잡아 앞을 보게 했다. 이정도면 알아듣겠지.
얼음팩을 줄곧 붙이고 있으니 팩이 제 맨살에 달라붙은 듯하여 다시 뗐다. 길거리에서는 어떻게 팩을 붙이고 있어도 전철 안에서까지 가져다 대고 있는 것은 조금 쪽팔렸다. 냉기 남은 뺨을 손바닥으로 슬쩍 가져다대니, 감각 없는 볼이 벌써 퉁퉁 부어올랐다. 혀조차 따끔하게 느껴졌다. 괜히 마음까지 서러워진다. 선배들이 그토록 아프다며 겁을 주더니, 정말 아프잖아. 제대로 된 고통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도 고통스러웠다. 엄살이 심한 편은 아닌데.
좌석에 앉아, 괜히 부어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가만히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할 때까지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핸드폰이라도 만지겠지만, 그럴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불편하기도 했고. 온 신경이 이미 빠져나간 사랑니에 머무르듯 했다. 의사는 뿌리까지 잘 뽑혔다고 말했는데.
역이 멈추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까만 가쿠란을 입은 학생무리였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하필 오늘같은 날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선한 인상의 남자까지 발현한 후타쿠치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필사적으로 제 얼굴 가리고 부푼 볼까지 숨긴다. 오초. 전철 문이 닫히고, 까만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자신의 반대쪽 좌석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다리와 운동화가 보였다. “저기 다테공 아냐?” “오! 가서 말 걸어볼까?” “뭐라고?” “물론 다음 번에도 쳐부숴주겠다고!” “그건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시비를 거는 거지. 유우,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유난히 짧은 다리가 시선 끝에서 달랑달랑 거린다. 평소라면 빈정거릴 법도 한데, 말을 할 수가 없어 후타쿠치는 차라리 시간이 지나기를 기원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강렬한 시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소리는 없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이제는 저 다리 짧은 소년을 말린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소년이 자신에게 말을 걸 이유도 없다.
후타쿠치는 침묵했다. 벌써 마취가 풀리는지 입 안 어딘가가 아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해서야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다. 왼쪽 뺨을 붙잡은 채. 아팠다. 몹시도, 누군가 제 입 안을 주먹으로 내리꽂듯 했다. 몸 전체를 손으로 쥐어 잡고 흔들 듯 했다. 사랑니가 나기 시작할 적보다 더 아팠다. 그는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얼음팩을 뺨에 붙였다. 그새 약간 녹아 축축하다.
함께 내린 아오네가 다시 저를 응시했다. 입을 열지 않아도 의미는 안다. 후타쿠치는 아까 전 그랬듯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마. 아오네는 이번만은 제 의미를 알아듣고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후타쿠치는 나란히 걷는다.
남자인 친구와 영화를 보는 약속을 잡는 것은 특이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라이벌 학교의 에이스와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다.
쿠니미는 귀찮은 기색 잔뜩 내보이면서도 옷장 문을 열었다.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의 주전 선수인 제가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의 에이스와 만난다는 것을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득달같이 이것저것 캐물으려 달려들 것이 분명해, 오늘의 만남은 당사자들을 제하곤 아무도 몰랐다. 작년 겨울 있었던 미야기현 1학년들의 단체 합숙을 말해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합숙에 참여했던 킨다이치마저 부럽다던가, 왜 저는 빼놓고 만났냐고 토라진다면 제 추측은 더욱 자명하다.
데이트도 아니고, 얼굴 아는 남자와 영화를 볼 뿐인데 딱히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두툼한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었다. 꽃봉오리 삼킨 삼월의 끝은 아직 겨울 냄새를 품고 있다. 자고로 옷은 따뜻한 게 제일인 법이다. 소년은 옷을 입고, 가방조차 없이 양쪽 주머니에 각각 지갑과 핸드폰을 넣고 집을 나섰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도 왜 고시키 츠토무가 다른 동급생이나 배구부 동료들을 두고 하필 제게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건지 알지 못한다. 광견이라 불리는 제 부활동 선배처럼 모난 성격도 아니고, 최소한 친한 사람들에게는 썩 살가워 보였는데. 심지어 그조차 대회나 연습시합을 제외한, 즉 사석으로 상대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 메일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되질 못했다. 혼자서 영화 보는 것이 그리도 민망한가. 어차피 저도 보고 싶었던 액션 영화였기에 순순히 응해줬지만….
영화관 앞 동상 근처에 도착하자 약속 시간 5분 전이다. 쿠니미는 약속을 잘 안 잡는 만큼 대개의 경우에서 그럭저럭 약속을 준수하는 편이었다. 홀로 고개를 주억이며 주위를 돌아보던 그는 낯익은 얼굴에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먼저 나와 있었다. 그것도 저런 몰골로.
저런 몰골이라 함은, 아, 쿠니미는 차마 가까이 하기 민망하여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모른 척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잠깐 머릿속으로 갈등했다, 도저히 사내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갈 때 할 차림새가 아니라는 의미다.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지는 않았다. 형광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 썩 준수했다. 그래, 문제는 그 점에 있다.
고시키의 옷차림이 남자 둘이서 영화를 보러간다 하기에는 지나치게 준수했다.
빳빳하게 다린 흰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재킷까지. 누가 보면 소개팅이라도 하러 가는 줄 착각할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바지는 검정색 데님이라는 것 정도. 신발도 운동화다. 정말 다행이군. 쿠니미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앞머리를 필사적으로 다듬는 고시키를 상당히 먼발치에서 응시했다. 손이 시려 후드 주머니에 꽂은 찰나였다. 고시키의 고개가 휘더니 제 코앞에서 멈췄다.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년이 저를 발견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도망도 못 가겠네. 아니, 백 번 생각해도 저기 내가 아니라 예쁘게 입은 여자 아이가 가야할 것 같은데. 영화관이 아니라 조금 비싼 파스타라도 먹으러 가야할 것 같다고. 쿠니미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쿠니미! 고시키가 평온하게 빠른 걸음으로 제게 다가왔다.
“왔어?”
“응.”
“옷 후드티 입었네?”
“그냥 영화 보러 나올 뿐인데 뭘.”
굳이 신경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제 말에 고시키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아…. 그래? 조금 서운한 것도 같지만 도저히 이해 불가의 영역이다. 옷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쿠니미 역시 예의상 한 마디 해주기로 했다.
“오늘 차려입었네. 오후에 데이트라도 있어?”
“뭐?”
“? 데이트 있냐고.”
헌데 반응이 이상하다. 기껏 차려입었다고 말도 해줬더니 도리어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미간을 좁힌다. 넥타이까지 매고 올 정도면 아무리 생각해도 데이트 아니겠냐고. 혹은 가족행사 정도? 이런저런 짐작은 그의 외침으로 인해 끝이 났다.
“나 여자 친구 없어!!”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주위를 지나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쿠니미는 급작스레 민망해졌다. 여자 친구 없는 게 자랑이냐고. 자존심 상했나, 왜 그렇게 소리 지르는 건지.
“그럼 말고.”
쿠니미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영화관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솔직히 좀 쪽팔렸다. 고시키가 그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며 재차 강조했다. 나 정말 여자 친구 없거든? 인기는 많지만! 그래도 관심 있는 여자도 없어! 그 재잘거림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얌전히 무시하려던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하고 알았다. 어차피 그가 누구와 사귀는지 제가 알 바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이래서 피곤한 타입은 질색이다. 영화는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치는 듯했다.
아주 약간 다행스럽게도 고시키가 미리 표를 예매해 둔 덕에 팝콘과 콜라만 사서 들어가면 되었다. 영화 도중에 무언가를 많이 먹는 성격은 아니라, 팝콘도 콜라도 중간 사이즈로 하나만 샀다. 고시키도 제 말에 많이 먹지는 않는다고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입장해 적당히 가운데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 부활동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조명이 어두워지고 광고가 나올 즈음에는 입을 다물고 팝콘을 조금씩 집어 먹었다. 어차피 광고를 볼 때 아니면 뭘 더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팝콘을 집으려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듯이 부딪치고 난 후로 고시키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팝콘에 손을 뻗지 않았다.
“더 안 먹어?”
“아, 어. 난 괜찮아.”
황급히 손사래 치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여 다시 팝콘을 몇 개 집어먹는다. 어차피 팝콘도 제가 들고 있는데, 영화 도중에 어련히 알아서 먹겠지. 애도 아니고. 달달한 캐러멜 맛 팝콘을 다시 한 움큼 쥐려는데 티셔츠의 소매가 흘러내려와 손등을 반쯤 덮는다. 쿠니미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그냥 팝콘을 쥔 채로 빼냈다. 음식을 입 안에 털어 넣은 후 소매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부스러기가 묻지는 않았다. 소매를 살짝 걷고 다시 팝콘을 집는데, 줄곧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고시키가 말을 던졌다.
“쿠니미, 너 그 옷 잘 어울린다.”
“그래?”
가끔 집 근처에 나갈 때 편하게 입던 옷이다. 자주 빨아서 후드 티가 늘어졌을 정도라,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 게 조금 이상했다. 조금 미심쩍게 대답하자 고시키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첨언한다.
“진짜 귀여워 보여.”
그러니까, 뭐가? 쿠니미가 고개를 슬 기울였다. 설마 제가 귀엽다는 뜻은 아니겠지? 다 늘어진 옷이 귀엽다는 것도 상당히 이상한데, 제가 귀엽다는 말은 그보다 열 배는 더 이상했다. 부모님이나 선배도 아닌 저와 동갑인 사내 아이가 말했다는 것도 그 이상함에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러나 “뭐가?” 라고 물으려던 쿠니미의 말은 묻히고 말았다. 조명이 다시 한 번 어두워지며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영화 배급사 광고가 스크린에 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찝찝함을 가득 안고 제 앞으로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놈을 좋아할 리가 없다. 쿠니미는 열여섯 번째 되새긴다. 딱 제 나이 숫자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선, 고시키 츠토무라는 마찬가지로 열여섯 먹은 사내아이는 딱 제 나이 횟수만큼 나잇값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아키라! 빨리 와서 이거 써보라니까?”
“내가 이름 부르지 말랬지.”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만 부르지 말랬잖아. 지금은 우리 둘 뿐이라고.”
공부는 쥐뿔도 못하고 배구 특기생으로 시라토리자와에 입학한 주제에 왜 그럭저럭 머리가 돌아가는 거지? 그는 도저히 제 연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정말 인정하기 힘들지만 진실은 진실이다. 쿠니미 아키라와 고시키 츠토무는 사귀고 있다. 세상에, 쿠니미는 머릿속으로 한 문장을 정리하다가 저 스스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 역시. 이것 봐, 예쁘다.”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 실례라고 말했잖아.”
예쁘고 귀여워. 예쁘다고 하지 말라니까. 내가 이런 애랑 사귀고 있다니…. 그는 한탄했다. 제게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띠를 씌어주고 해맑게 웃는 꼴이 정말로 유치하고 어울려주기 힘들다. 쿠니미는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띠를 벗으려 했지만, 고시키가 완강하게 붙잡아 실패하고 말았다. 쿠니미는 표정만으로 그를 향해 무언의 불만을 표출했다. 고시키가 웃는다.
“잘 어울리니까 그냥 하고 있어.”
이윽고는 저 역시 강아지 귀가 달린 머리띠를 고르고는 값을 치러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건 싫은데. 제 낯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시키가 쿠니미의 손목을 잡아끌며 또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미안. 나무늘보 머리띠는 없어서….”
진지하게 놀이공원에 데이트하러 와서 싸우자는 걸까?
정말이지, 이벤트에 본인 포함 동반 1인 무료입장권을 얻게 되었다고 제게 넌지시 말했을 때 열 번 거절했어야 했다. 멀고 귀찮고 시간이 안 난다며 아홉 번을 거절했는데, 차마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더는 외면하지 못한 게 탈이다. 놀이공원에 못 간지 6년이 넘었다던가, 사귀는 사람과 놀이공원 데이트를 가는 게 꿈이었다던가 하는 말들도 딱히 감흥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여기선 손을 잡고 다녀도 남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말 때문이었나? 그 말에도 그냥 콧방귀만 뀌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자이로드롭을 타러 가자며, 고시키가 꺄악,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저를 이끌었다. 평소에는 손끝만 잠깐 스쳐도 쑥스러워 하면서 지금은 놈이 제 손목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은 알까. 쿠니미는 물끄러미 온기가 마주한 곳을 응시했다. 스파이커인 만큼 손이 큰 것은 납득하지만, 제 손목을 완전히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이상했다. 간지럽지는 않지만 말랑말랑한 느낌. 여전히 적응되지 않은 감각에 인상을 찡그렸으나, 일단은 순순히 고시키를 따라갔다. 천천히 가. 그래도 발은 맞춰줄 생각이 없어 한 마디 뱉는다.
진심으로 질색하는 말투에 고시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들뜸에 무작정 앞서나가던 직전과 달리 지금은 걸음이 나란하다. 쿠니미는 힐끔 제 옆을 곁눈질한다. 저와 한 쌍의 동물 머리띠를 쓴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고시키가 있다. 정말이지, 애도 아니고. 일단은 제가 한 말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녀 주기는 하지만….
“너 진짜 귀찮아.”
“응? 나 선배들에게 그런 말 많이 들었어.”
도대체 얜 선배들에게 무슨 취급을 당하고 사는 거지. 줄곧 뚱해 있던 낯이 꿈틀거린다. 평소라면 저 말에도 상처라며 투덜거릴 텐데도 오늘은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가 보다. 고시키는 별 말 없이 웃으며 “이쪽이야.” 아까 전 제일 먼저 탔던 후룸라이드를 지나 왼쪽으로 꺾는다.
“하지만 아키라는 그런 귀찮음도 감수하고 나랑 사귀는 거잖아. 그만큼 내가 좋은 거지?”
“…….”
쿠니미는 순간 말을 잃고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시선이 마주치면 반짝거리는 눈이 어긋남 없이 직선이다. 그런 점도 좋아해. 상대는 제게 거한 폭탄을 던져놓고서도 뭐가 신나는지 키득거리며 웃는다. 저 근거 없는 자신감에 먹칠을 해주어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날이 더운 것 같은 착각까지 인다. 고시키 주제에…. 보란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쿠니미 아키라. 첫인상은 남자치고 꽤 예쁘장한 애. 서늘한 인상. 여름의 인터하이 지역예선에서 부딪친 적 있었다. 시합에서의 감상은, 역시 내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 특별히 눈에 띈 점은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초입에 다시 마주친 사내애는 무려 선택된 1학년들만 모이는 강화합숙에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낯이었다. 그 때 코트 위에서 본 것처럼.
언제나 에이스에 대한 의지로 충만한 고시키 츠토무는, 어째서 그가 이런 곳에 왔는지 다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키가 압도적인 편도 아니었다. 실제 이번 합숙의 참가자 중에는 2m에 달하는 거구도 있다. 파워로 말할 것 같으면, 백 번 생각해도 저가 더 강하지 않나? 머리는 꽤 좋은 것 같았다. 포즈도 깔끔하고, 굳이 스파이크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꽤 하는 것 같고. 하지만 그게 전부. 같은 포지션인 저가 단언컨대 어딜 봐도 제가 더 우수했다. 배구를 하고자하는 열정마저도.
“킨다이치! 쿠니미 어디 갔는지 알아?”
“윽. 모르겠는데요.”
“도대체 이 자식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일정대로라면 워밍업이었을 테니까…. 잠시 쉬러 간 게 아닐까요.”
코가네가와와 함께 합을 이루고 있던 킨다이치가 찔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점심시간 직후, 원래 예정대로라면 워밍업 겸 자율 연습 시간이었을 지금은 코치의 급작스런 소집으로 인해 무용이 되고 말았다. 다른 체육관에서 연습 중인 시라토리자와 2학년 선배들과의 연습 시합이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워밍업 시간에 워밍업을 해야지, 자리를 내빼는 게 말이 돼?! 코치의 우렁찬 외침에 1학년들 몇몇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코치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체육관 구석에 앉아서 쉬고 있던 츠키시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고시키! 가서 쿠니미 좀 찾아와라.”
“네?! 왜 제가 가요?!”
“네가 우리 학원 내부를 잘 알고 있잖냐.”
하지만 그런 거라면 다른 애들도 있는데! 황급히 시선을 돌려 볼보이나 다른 멤버들을 찾아보면, 녀석들은 어느새 코트 정리를 하는데 분주하다. 분하다!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거지! 찾으러 가지 싫은 거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필사적으로 거부감을 표출하던 고시키는, 쿠니미가 없으면 연습 시합을 진행하지 않을 거란 코치의 으름장에 어쩔 수 없이 체육관을 나서야만 했다.
내부에서 벗어나자마자 금세 냉랭한 바람이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춥다. 고시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스스로 팔짱을 꼈다. 으, 다른 놈들이 나가기 싫다며 뻗댈 만도 하다. 그 녀석은 이런 날씨에 어디에 있는 거람. 카라스노의 꼬맹이는 합숙에 참가하고 싶어도 참가하지를 못해서 볼보이를 자처하는데, 누구는 영광스럽게 강화 합숙에 참가하고서도 짧은 틈은 못 이기고 농땡이라니. 같은 학교의 킨다이치라는 녀석은 자율 연습에도 곧장 열심히 하던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그는 속으로 한껏 투덜거리며 쿠니미가 있을 법한 장소를 추려내 보았다. 애초에 학원이 낯선 소년이 갈 법한 장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행동반경을 감안하면 고작해야 식당이나 기숙사. 개중에서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좋아하는 녀석이라면 다소 거리가 있는 기숙사 보다는 식당 건물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선택지가 좁아 고시키조차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소년은 식당 건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발가락이 곱아든다. 이 추운 날 사람을 고생시키다니. 이래서 의지가 없는 놈들 안 된다. 소년은 그를 만나면 어떤 식으로 화를 내고, 잘난 척을 할지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그려보았다. 특별히 ‘열심히 한다’는 말을 질색하는 것 같으니 일부러 그 단어만 사용해 골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고시키는 호쾌한 에이스를 표방했지만 뒤끝이 길었다. 최소한 한 시간 유지될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저를 고생시킨 장본인은 심술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찾아간 식당 내부는 사람이 텅 비고 없다. 잘못 짚은 걸까. 다른 출구인 개수대로 나가도 마찬가지로 인적은 드물다. 애초에 교사(僑舍)는 문이 잠겨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기숙사인가? 고시키는 인상을 찡그리며 같은 건물의 연결된 화장실로 향했다. 텅 비어 물소리 없다. 아, 정말. 합숙이 싫어서 도망이라도 갔냐고….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틀려는 찰나였다. 고시키는 불현 듯 건너편 계단에서 회색 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늬를 발견했다. 창고와 주방으로 이어지는, 학생들은 내려갈 일도 없는 곳이었다.
“설마.”
말하면서도 고시키는 건너편 계단으로 향했다. 큰 보폭씩 가까워질수록 하늘색 천이 눈에 띈다. 또한 그 위에 둥글게 얹어진 머리통도. 아, 그 녀석이다. 고시키는 직감했다. 입매가 삐뚜름하게 갈라졌다. 보아하니 계단에 쭈그려 앉아 벽에 기대고 있는 것 같은데 게임이라도 하는 건가? 그는 들으라는 듯이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
“야.”
그의 앞에 제 얼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놀란 기색은 보이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색하게도 쿠니미는 손끝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
쌕쌕거리는 숨이 소년이 바로 입술에서 번졌다. 감은 눈. 여태껏 보아온 어떤 것보다 평화로운 낯이 깃들고 있었다, 그에게. 고시키는 삼 초 있다가 돌연 몸을 뒤로 뺐다. 자세가 엉켜 넘어질 뻔 한 것을 벽을 붙잡아 가까스로 면한다. 허억, 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기도 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미동 없다.
아니, 잠시만. 방금 내가 왜 그랬던 거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제 행동이 수상쩍어 양 뺨을 톡톡 두드린다. 도대체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라, 고시키 츠토무. 너는 시라토리자와의 에이스가 될 남자잖아! 괜히 심호흡도 하고. 급작스레 술렁거렸던 마음도 다잡는다. 혹시 또 넘어질 뻔 할까, 제대로 계단에 내려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쿠니미보다 낮은 자리에 서자 비로소 소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무릎을 모아 앉은 채 벽에 기댄 얼굴이 얌전하다. 함께 연습 하자느니, 스파이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말을 할 때 늘 보이던 표정과 전혀 상반된다. 까만 머리카락에 흰 얼굴은 꼭 흑백 영화 같았다. 일정한 박자로 옅게 움직이는 어깨. 호흡하는 소리. 소년은 저도 모르게 그 고요한 박자에 말려들었다. 덩달아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나처럼 잘생겨야지. 얇게 생겨봤자…. 속으로 투덜거려도 시선은 떼지 못했다.
아무리 실내라도 바람만 차단되었을 뿐, 낮은 온도는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쿠니미는 잘도 잤다. 기울어진 머리 탓에 단정하게 반으로 나뉜 앞머리마저 흘러내린다. 고시키는 썩 고아한 움직임으로 소년의 속눈썹에 걸쳐진 앞머리를 바라보았다. 감은 눈이 설핏 찡그려지는 것도 같다. 역시 간지러운 걸까. 깨워야 하는데. 분명 돌아오면 코치가 한 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이 녀석 때문에 내가 추위까지 무릅쓰고 찾아왔는데.
고시키는 최대한 제 손길 신경 쓰이지 않게끔 속눈썹에 걸린 앞머리를 잡아 조심스레 넘겨주고 말았다. 손끝이 실수로 이마를 건들이고, 아, 얌전히 소년의 귀 너머로 넘겨준다. 고시키의 손끝이 머리칼을 타고 내려가, 둥근 귓바퀴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
주름진 눈이 다시 온화해지는가 싶더니, 기어코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열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고시키는 그를 깨울 목적으로 온 주제에 열리는 눈에 몸이 굳고 말았다. 자세는 여전히 그의 머리칼을 넘겨주려던 찰나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여직 몽롱한 눈빛은 흑색이다. 힐끔 올려다본 눈초리가 낯설다. 비슷한 신장, 정확하게는 쿠니미 쪽이 저보다 큰 편이라 (아주 조금이다!) 이런 위치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인 것이다. 고시키는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이대로 깨우려고 했던 것처럼 귀를 잡아당겨버릴까? 하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온 몸이 빳빳해지고, 그가 내뱉는 날숨의 모양을 따라 저도 모르게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어버려서.
“…뭐야?”
아직 잠에 취해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도, 고시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 자리가 몹시 더웠다. 가까워진 겨울에, 보이지 않는 태양이 드러내지 않은 부분을 내리쬔다.
우습게도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단순하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코치님이, 얼른 소, 소집하라고!”
“? 그런데 말을 더듬어.”
“더, 더워서 그런다! 왜!”
“추운 게 아니라?”
입이 말썽이네! 하하하! 춥다고, 그래! 고시키가 급하게 손을 떼 물러서며 어설프게 웃었다. 미쳤다. 미쳤냐, 고시키 츠토무! 이 녀석은 나보다 배구도 못하고, 시종일관 재미없는 얼굴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남자인데! 정신 차리라고!
에이스가 될 남자가 마음속으로 어떤 고뇌를 하던 쿠니미는 몇 번 더 눈을 깜박여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벌건 얼굴을 한 채 멍청한 행동을 하는 고시키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 후 먼저 자리에서 벗어났다. 고시키는 그가 자리를 뜰 때까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제 속을 부정했다.
나는 놀랐을 뿐이다! 그냥 갑자기 잠이 깬 얼굴에 놀란 것 뿐이다! 절대 반한 게 아니다!
쿠로오 테츠로의 친가는 미야기 현 센다이 시 외각의 한적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는데, 번화가로부터는 버스로 사십분 걸리는 곳이었고 바로 뒤에는 산이 깊어 센다이라 해도 도리어 시골에 가까웠다. 그는 매번 여름 방학을 그곳에서 났다. 홀로 사는 할머니가 꽤 편찮았기 때문에, 짧은 여름만이라도 짬을 내어 돌보러 가는 것이다.
소학교 5학년부터 그는 세 번의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쿠로오는 늘 장마의 중간에 미야기에 도착했다. 비구름이 먼 여행을 떠날 때면 할머니의 집 뒤쪽에는 해바라기 밭이 만발했다. 그 집에는 담이 없어 소년은 마루에 앉으면 곧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이를 발견하곤 했다. 가끔은 챙 넓은 모자를 썼고, 반바지 아래로 드러나는 흰 다리에 풀잎들이 쓸려 생채기를 만들었다. 아이는 뛰는 일이 잘 없었고, 걷다가도 종종 걸음을 멈췄다. 드물게는 그의 뒤에는 가쿠란을 입은 다른 사내가 있었다. 쿠로오보다 커 보이는 남자는 아이와 친인척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해바라기 밭 사이에 숨을 때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주위를 살피며 능청스레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케이가 어디 있을까? 주변이 온통 노란색이라 잘 안 보이네.’
그랬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부서지는 금싸라기였고, 쉬이 샛노란 해바라기 사이에 묻혔다. 썩 밝은 성정의 아이는 그럴 때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 숨죽이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쿠로오의 시야에서는 케이의 표정도, 그의 뒤에 선 소년의 표정도 전부 볼 수 있었다.
케이.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온전히 아이의 입을 소개 들은 것은 팔월의 중앙이었다. 그 날 아이는 혼자였고 품에는 배구공을 안고 있었다. 쿠로오 역시 배구를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던 차였다. 지난 한 달, 홀로 훔쳐보던 소년이 저와 같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마루 위에 엎어져 있던 이를 일으키게 하기 충분했다.
“너도 배구 해?”
“누구세요?”
“나, 저기 파란 지붕에서 사는데.”
“저기엔 할머니 한 분 밖에 안 계시는 걸로 아는데요.”
“그러니까, 그 할머니 손자야.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케이는 어린 아이 주제에 흐음, 비음을 뱉으며 쿠로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녀석, 제 형제에게는 썩 밝아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전부 착각이었나. 나이 치고 썩 당돌한 낯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무감각하고 퉁명스러운 소꿉친구를 가지고 있는 쿠로오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도리어 씩, 웃음 지으며,
“사실 나도 배구해. 아, 난 테츠라고 불러.”
선언한 것이다. 아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삼초 후에야 겨우 내밀어지는 손을 붙잡았더란다.
케이의 정확한 이름은 츠키시마 케이였다. 달과 반딧불. 반딧불의 蛍를 쓰고 케이라고 읽었는데, 쿠로오는 그것이 썩 아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금발은 환한 낯이면 유독 반짝거려서, 그는 종종 어째서 해바라기가 소년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통성명 이후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렸다. 배구라는 공통점 덕분이다. 아이는 늘 배구교실이 끝나면 이 길로 왔다. 둘은 해바라기 밭의 한 중앙에서 만나 파란 지붕까지 느리게 걸었다. 나직하게 트인 뒤뜰에서 두 사람은 공을 올리며 놀았다. 케이. 그 아이는 처음에는 경계도 하고, 낯도 가렸으나 어느 정도 소년에게 익숙해지자 곧잘 이런저런 말들을 토로하곤 했다. 형은 중학교 배구부에서 제일가는 에이스라는 자랑이나, 그런 형을 따라 배구를 시작했으나 쉽게 형을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불평들. 이제 갓 배구를 시작한 아이라서, 쿠로오는 미숙하게나마 자세들을 봐주고 아이를 향해 올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빛 쨍한 여름의 끝, 두 사람은 다음 해 여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뭐야. 내가 테츠 씨를 기다릴 것 같아요?”
어쩌면 기약이란 쿠로오에게만 통용한 된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가을에 스무네 번, 겨울에 열두 번, 봄에는 가물가물해졌다가, 여름방학식에 돌연 아이를 떠올렸다. 냉정한 계절 두 번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미야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자동차의 와이퍼가 매초마다 움직였다. 천둥까지 치던 때에 쿠로오는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케이는 할머니 댁에 도착한 후 나흘이 지나 모습을 보였다. 여전히 장마철이었다. 아직 다 못 핀 해바라기들 사이로 노오란 우비가 유독 이질적이었다. 성큼성큼 딛는 걸음은 지난해보다 조금 더 넓다. 쿠로오는 아이의 종아리까지 올라온 샛노란 장화를 보았다. 반은 진흙이었다.
“케이.”
나직한 부름은 빗소리에 묻혔다. 저까지 닿을 리가 없었다. 결국 쿠로오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장화를 신고, 아버지가 곧잘 쓰는 커다란 검정 장우산까지 펼쳤다. 집의 둘레를 따라 피어난 낮은 패랭이꽃들을 훌쩍 넘으면 그는 해바라기밭에 도착했다. 비가 얼마나 강한지, 케이는 우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의 안면은 온통 축축했다. 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라리 우산을 들고 오지 그랬어.”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위로 아이 세 명으로도 충분할 우산을 씌어주었다. 케이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았다. 불퉁해 보이기 십상이었으나 뜻밖에도 반가움을 띄고 있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저 시선을 몹시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예언자도 아닌데, 이렇게나 비가 올 줄 알았나요.”
아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와 나란히 섰다.
그는 파란 지붕 아래에서 잠시간 비를 피했다. 우비를 벗고, 그 안까지 스며든 빗물을 탈탈 벗어내고 쿠로오와 함께 마루 위에 누워서 장마 소리를 조용히 감상했다. 일 년 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 이요. 주로 아이는 대답했다. 내 생각은 얼마나 했어? 대체로 안 했어요. 진짜 너무하네! 딱히 테츠 씨도 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쿠로오는 두 개의 계절을 떠올렸다. 변명할 것이 없어 침묵만 흘렀다. 한참 후에야 아이는 다시 말했다.
“…나중에 블로킹 관련으로 물어볼 게 있는데, 가르쳐줘요.”
쿠로오는 냉큼 알았노라 덧붙였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비가 그쳤고, 아직 축축한 마당에서 두 아이는 공을 들었다. 케이는 최근에야 제대로 된 블로킹을 배웠는데, 쉬이 뚫려버려 불만이라 대답했다. 박는다는 건 단순히 손을 올린다는 것만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니까. 쿠로오는 그렇게 설명하며 몇 번 시범을 보여주었다. 팔에 힘이 없으면 공에 맞아도 블로킹보다 리바운딩 되기 쉬워. 배구에 리바운드가 어디 있어요? 고등학교의 실력 있는 학교들만 해도 자주 리바운드를 시도한다던데. 공이 지면에 박히기 보다는 그저 ‘튕긴다’는 것에 가깝다는 거지.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를 몇 번 따라했다. 팔은 위로 뻗지만 말고, 조금은 아래로 내리고. 소년은 그의 자세를 교정해준다는 핑계로 손끝을 잡아 내려주었다. 케이의 손가락은 보드라웠고 따뜻했다. 아이의 피부는 도쿄에 산다는 쿠로오보다 더 희었다.
“…테츠 씨. 언제까지 손잡고 있을 거예요?”
“케이. 너 손 정말 애기 같다.”
“난 이제 3학년이거든요?”
“아, 아직 아기네.”
케이는 불만어린 표정으로 그를 빤 바라보다가, 손을 뿌리치며 됐다고 말하고선 문을 빠져나갔다. 어, 케이, 삐졌어? 급하게 뒤따라갔지만 아이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케이의 머리 위로 해바라기 수십 송이가 해님마냥 떴다. 그 나이면 아직 아기 맞으면서. 쿠로오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에 여전히 그 연약한 꽃잎이 문신처럼 남았다.
화를 풀어주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으나, 이후로는 다시 옛날처럼 지냈다. 배구공을 올려주고, 지친 날이면 마루에 나란히 앉아 부모님이 잘라준 수박을 먹었다. 그 날 이후로 쿠로오는 종종 홀로 손바닥을 만져보곤 했으나 그 때와 같은 느낌은 결코 나지 않았다. 케이는 어떻게 배구를 하는데도 그렇게 손이 보드라울 수 있을까. 대신 마주 앉아 그의 손을 곁눈질 하는 날이 늘었다. 뭐야, 뭐 묻었어요? 남의 시선에 기민한 아이는 금세 그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쿠로오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온기에 이어 소꿉친구와 다소 흡사한 퉁명스러운 말투가, 눈동자가 소년의 마음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 내일 도쿄에 돌아가.”
“그래요? 잘 됐네요.”
“안 아쉬워?”
그러다가,
“내년에 또 올 거 아녜요?”
“맞는데….”
“그럼 됐죠, 뭘.”
“케이는 오늘도 매정하네.”
도쿄로 돌아온 어느 날, 쿠로오는 자신의 방 창문을 투과해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무심코 제 미야기의 해바라기 밭과, 가운데를 가로지르던 어린 아이를 떠올리고 말았다. 셋 모두 따뜻한 색이었다. 아침 8시 6분에는 햇빛이 침대 근처까지 뻗어와 소년의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는 매일 아침 8시 6분 마다 소년을 떠올리게 되었다.
조금 더 지나서는 햇빛을 따라 등교하는 아침 8시 42분에도, 그리고 태양 아래서 뛰노는 매주 화요일 2교시에도 아이를 떠올렸다. 배구 실력은 얼마나 늘었을까? 꽃이 전부 진 뒤의 해바라기밭은 어떤 풍경일까. 미야기에는 컴퓨터도 또래 친구도 없어 쉽게 심심해졌지만, 케이는 그의 지루함을 곧잘 달래주던 유일한 아이였다. 이번 일 년 동안에는 또 얼마나 키가 자랄까? 블로킹은 많이 발전 했을까. 가능하다면 같은 팀이 되어 배구도 해보고 싶었다. 이번 가을에는 그는 매일 아침 소년을 생각했고, 겨울에는 약간의 훈풍만 돌아도 돌연 미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할머니의 마루. 손끝. 쿠로오는 손바닥 안을 문지르는 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 있었다. 소년을 만진 자리를 고스란히 더듬으며 감각을 회고했다.
그리하여 또 여름이 왔다.
케이는 보이지 않았다.
쿠로오는 비오는 날부터 시작해 줄곧 마루 위에 앉아 해바라기 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보름이 지나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해바라기 밭은 배구 교실이 끝난 케이가 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는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쿠로오는 멀거니 눈만 깜박였다. 저 모르는 사이 아이의 키가 반쪽이 되어 노오란 파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다만 그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향일화들이 일제히 서쪽을 바라보는 날만 몇 번이 흘렀다. 그는 미야기 이토록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케이가 없으니 쿠로오는 놀랍게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선생님이 내어준 방학숙제만 한참을 질질 끌다가 낮잠에 빠져들기만 열댓 번을 넘겼다. 찌를 듯한 더위에 가만히 있어도 전신이 축축해지길 한 달.
그 날은 빗줄기가 길었다. 도쿄로 돌아가기 이틀 전이었다. 짐을 다시 싸는 것조차 아쉬워 한참을 밍기적거리다가, 도망치듯 마루로 나왔다. 실들이 직선으로 뚝 뚝. 내리꽂듯 했다. 마루의 가장자리에는 웅덩이가 고였다. 태양이 없어 해바라기가 묵념했고 드물게 걸어놓은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비와 섞여 뎅그랑 울렸다. 파란 우산이 해바라기의 모가지를 찌르며 제게로 다가왔다. 쿠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혹시나 싶어 물안개에 희미한 인영을 바라보았는데, 우산 안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쿠로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섬광처럼 깨달았다. 키가 조금 더 자랐구나. 혹시라도 달아나버릴까, 그는 우산조차 쓰지 않고 슬리퍼를 찰박거리며 밭으로 뛰어들었다.
“케이!”
어둑한 낮에도 아이에게서는 햇볕 마른 냄새가 났다. 우산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일 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의 키는 3cm는 족히 자랐으나 그 낯은 민둥했다.
“왜 여태까지 안 왔어? 무슨 일 있었어?”
“배구를….”
“난 이사라도 간 줄 알았잖아.”
“그만둘까, 생각했어요.”
뭐? 쿠로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케이의 입술은 파랬다. 그는 아이의 곱슬머리 끝을 매만져 보았다. 눅눅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인상을 살풋 찡그렸으나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다는 소꿉친구를 억지로 끌고 밖에 나가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사연이 뚝뚝 떨어지는 낯으로 말하는 아이에게는 무력했다.
“배구를 그만둬도 일상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진학을 고려하면 나은 선택이고.”
“그럴 수도 있지.”
쿠로오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렇게만 말했다. 아이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제가 말을 꺼내니까.
“형아가, 미안하다고 말하더라고요.”
내가 하기 싫어졌을 뿐인데, 형아가 나한테 사과를 해서…. 도통 이해 외의 발언이었다. 케이가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꽤 조리 있게 말 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정신도 없거나, 혹은 정리할 생각이 없던 탓일 테다. 쿠로오는 가만히 아이의 눈동자를 보다가 되물었다.
“그래서 다시 할 거야?”
“뭘요?”
“배구.”
“…….”
후두둑 파란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머리만 겨우 케이의 우산 안에 집어넣고 있던 터라, 몸은 이미 젖어 으슬으슬하게 떨리던 차였다.
“네.”
아이는 몇 번의 달싹임 끝에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는… 형아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게 싫어요.”
“잘됐네. 나는 네가 계속 배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작은 머리가 요리조리 굴러갔다. 왜요? 중학생으로 보일만한 신장임에도 쿠로오에게는 아쉽게 못 미친다. 빼꼼 올려다보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 그는 씨익 웃었다.
“굳이 여름이 아니더라도, 계속 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칠 수 있잖아.”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는 과장스럽게 표정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우와, 섭섭한데. 이제 가랑비만도 못한 수준이 되어 촉촉하게 하늘에서 물기가 떨어진다. 쿠로오는 축 가라앉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나는 꽤 좋다고 생각하니까.”
“뭐가요?”
“네가.”
그는 돌연 내뱉고는 반 박자 뒤에 덧붙였다.
“해바라기 사이로 걸어오는 거.”
“…별게 다.”
“그러니까 내년 여름에는 올 거지?”
“벌써 내년, 인가요.”
“우리 귀엽지 못한 케이가 한 달 넘게 홀라당 배구교실을 빠져서 벌써 여름방학이 지나버렸거든.”
“그건 테츠 씨가 집 안에서 빈둥거리기만 해서 시간이 지나버린 거죠.”
“진짜 너무하네.”
투덜거리며 쿠로오는 그제사 우산에서 머리를 뺐다. 회색 구름 사이로 햇빛이 슬쩍 모습을 모였다 다시 숨길 반복했다. 해바라기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의 움직임을 가만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그럼 내년에 봐요.”
“그래.”
소년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손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우산을 꼭 쥐던 아이의 손을 덮고.
“내년에 보자.”
대답했다.
그런 여름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고하자면, 약속이 무색하게 저는 더 이상 미야기로 올라가지 못했다. 늦가을에 할머니가 세상을 뜬 탓이다. 먼 지방까지 올라갈 이유를 잃었으니 의미가 없음도 자명하다. 심지어 늙은 노인 홀로 지키던 집까지 처분한 이상에야, 마땅하다. 그는 일 년 정도 매일 8시 6분에서 아이를 떠올리다가, 미야기 없는 여름 이후로는 비오는 날에도 약속을 떠올렸다가, 삼 년이 지날 무렵 아이를 잊었다. 줄곧 품기엔 어린 이야기였고, 미야기와 도쿄에 거주하는, 연락처조차 모르고 두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아이 둘이 다시 만날 확률은 객관적으로 희박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몹시 놀랍게도, 5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 쿠로오 테츠로는 급작스레 그것을 떠올렸다. 익숙지 못한 우연이었다. 심지어 그 아이는 일전 봄에 연습 시합을 이유로 만난 적이 있었다. 헌데 왜 지금에서야 세 번의 여름이 기억났냐 물으면, 글쎄. 기실 그조차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땀이 비처럼 쏟아질 만큼 더워서? 혹은 저희 학교, 네코마가 합숙에 새로 초대했던 미야기 소재의 카라스노의 주전 중에 그 아이와 엇비슷한 노란 빛이 그곳에 있어서? 하필이면, 우연인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의 이름마저 케이이기 때문에?
“쿠로오 씨, 뭘 봅니까.”
“그러니까, 츳키.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 있던가?”
“하?”
뭐야, 쿠로오. 너 지금 카라스노의 1학년에게 작업이라도 거는 거야? 보쿠토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제 어깨에 턱하니 팔을 걸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심지어 츳키 표정 좀 봐. 네가 얼마나 가찮으면…. 가찮다니! 야, 츳키! 날 그렇게 생각했어?! 아뇨. 그것보다 딱 1.5배 정도 심하게 생각했죠. 헉, 돌직구….
그는 상처받은 양 상체를 굽으며 제 가슴을 붙잡았다. 옆에서 보쿠토는 엉뚱한 후배에게 80년대 아저씨처럼 들이대더니 꼴좋다며 낄낄 웃었다. 저희의 장난을 한심하게 응시하다가 이내 아이가, 아니, 츠키시마가, 아니, 케이가 뒤돌아섰다. 쿠로오는 느리게 몸을 다시 곧게 펴며 그가 볼카트를 향해 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멍멍한 얼굴로 소속사 창고 안을 바라보았다. 보통은 청소 용구나 보관해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어, 그 역시 처음 문 열어보는 칸이었다. 낡은 백열전구가 깜빡깜빡 거리며 마치 사이키마냥 빛을 내리면 그 아래로 마치 산 마냥 선물들이 쌓여있다. 단언컨대 한창 교내에서 인기를 누렸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저런 양은 받지 못했다. 양 팔은커녕 밴 트렁크와 뒷좌석에 꾹꾹 눌러 담아도 2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할 정도다. 그는 새삼스럽게 제 팔뚝을 문질렀다. 분명 작년에도 팬들로부터 선물을 받긴 했지만, 저 정도는 결코 아니었는데…. 인기가 생겼다는 것이 몹시 기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하긴, 이제는 맨 얼굴로 밖을 돌아다니기도 힘들 지경이긴 하지.
“네 팬카페나 팬사이트가 워낙 여기저기 있으니까, 각 팬사이트마다 다 돈 모아서 너한테 보내준 거야. 당연히 개인이 보내 준 선물들도 있고.”
“진짜 고마운데, 음.”
오이카와가 창고의 중심부에 자리한, 그 포장된 크기나 모양을 모아 가전제품이 틀림없을 가장 커다란 박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건 너무 비싸지 않아요? 호의를 받는 행위에는 무척 익숙한 저라도 교복을 입은 아이가 저가 마련하기엔 썩 비싼 선물을 건네던가, 지나치게 값이 나가는 선물을 줄 때에는 미약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곤 했다. 매니저가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받은 건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개인이 보내는 선물이 아니라, 여러 팬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서 준 선물이니까. 그 말에는 또 나름대로 수긍이 가는 것이다. 오이카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전부 받을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물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저것들을 전부 제 집으로 옮기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 그는 먼저 음식을 비롯해 부피가 작아 보이는 종류의 선물부터 옮기기로 했다. 매니저와 지난달에 새로 들어온 코디가 많이 도와주었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도 눈에 띄는 명품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가방 몇 개와 와인 냉장고를 제외하고는 전부 옮길 수 있었다.
“저 냉장고는?”
“일단 저걸 둘 자리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차라리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건 어때?”
“아직 계약도 안 끝났거든요.”
꽉 채운 트렁크 문을 닫으며 오이카와가 샐쭉 웃었다. 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매니저가 운전해준 차를 타고, 또 그의 도움을 받아 짐을 다 옮기고 나서야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아, 그래. 오이카와. 네? 이거. 비로소 가벼워진 손에 숨을 돌리려던 것도 잠시, 그는 저가 좋아하는 베이커리의 봉투를 또 받아야만 했다. 사내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뭐에요? 아잇치 형 주제에 선물?!”
“죽는다.”
주먹을 치켜 올리며 위협하는 모양이 썩 익숙하다. 오이카와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하다. 어쩐지 이 안에 든 것이 우유빵 같다. 팬이 준 선물도 반갑고 기쁘지만, 아무래도 익숙한 사람이 주는 선물이 더 생생하게 감동적이긴 했다.
“그래도 생일 어제였으니까, 줄지는 몰랐죠. 오이카와 씨 완전 감동!”
“감동 같은 소리 하네. 그러니까 오늘은 허튼 짓 말고 올라가서 쉬어. 내일 2시에 데리러 온다.”
오이카와가 오케이 사인을 그렸다. 그는 매니저가 떠나는 모양을 보고서야 맨션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슬쩍 열어본 봉투는 역시 우유빵이다. 이제 열도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는 빙긋 웃었다.
올 생일은 조촐하게 보냈다. 기실 밤늦도록 촬영이 이어졌던 터라, 생일이라는 사실에 계속 신경 쓸 틈도 없었다. 간간히 도착하는 생일 축하 메시지라던가, 단독 씬의 촬영 도중 깜짝 등장한 케이크가 아니었더라면 완전히 잊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독일로 떠난 그 해부터 제 생일을 크게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특별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특별해지지 못했으니까. 자신을 누구보다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단 한 명이 없기 때문에. 올해도 이와이즈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른쪽에 심장이 없어 외로운 날이었다.
대충 샤워를 마친 후 매니저인 쿠도 아이치가 준 우유빵을 입에 문 채 포장지 까기에 돌입했다. 피로가 쌓였지만 할 수 있는 한 포장을 끄르고 잘 예정이었다. 선물들도 참 여러 종류였는데, 다들 배송 기간 따위를 고려해 일부러 케이크 보다는 쿠키 따위의 제과를 보내주었다. 우유빵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한 달 내내 먹을 수 있겠다. 그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들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이어 책부터, 티셔츠, 신발, 악세사리나 사소한 장식품, 제 얼굴을 그린 액자 따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꼭 집 안에 걸어두어야지, 다짐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도 있었고 장난스러운 장난감이나 무늬가 그려져 있어 폭소가 터진 것도 있었다. 조금 값비싼 물품이 보일 때면 기쁘면서도 염려스럽기도 했다. 잘 쓸 것 같지는 않은데, 버릴 순 없으니 다시 곱게 상자에 넣어 구석에 밀어두었다.
대본을 볼 때 사용하라는 듯 선물해준 안경은 굉장히 제 취향이었다. 한 번 써봤는데, 약하게 들어간 도수가 딱 제게 적절했다. 내가 도수를 알린 적이 있던가? 무언가 조금 찝찝하기도 했지만, 극성팬들이라면 제가 종종 들르는 안경점을 알 수도 있었다. 그는 흔쾌히 선물을 받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선물을 준 팬사이트, 제 팬사이트 중 가장 큰 곳으로 알고 있다. 종종 주는 선물이나 간식들도 놀라울 정도로 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 선물 역시 내심 기대하며 그는 같은 디자인으로 포장된 상자 하나를 풀었다. 제 손바닥보다 조금 더 길쭉한 크기였다. 무게를 감안하면, 악세사리 쯤 되려나? 반지는 영 익숙해지질 않아 별로인데. 이제는 맹랑한 생각까지 하며 검은색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내용물은 그의 예상대로 악세사리였다. 정확하게는 목걸이다. 그것도 몹시 단조로운 디자인이었는데, 가느다란 목걸이 줄에 직선 무늬가 하나 죽 그어진 것이 전부였다. 심심하다 보아도 무방했다. 음. 오이카와는 목걸이를 들어 제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불빛에 반사되어 직선의 가장자리가 반짝반짝 거린다. 지나치게 단조로운 가로줄이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제 취향도 아니고, 딱히 저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디자인도 아닌데 마음이 술렁거렸다. 가로줄. 그 한 획의 선(一)이 문제였다.
“아, 정말.”
겨우 생일도 지났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 떠올리게 하기는. 그는 불투명한 누군가를 향해 투덜거렸다. 얼굴 한 번, 연락 한 번 없는 주제에 어떻게 매일 제 의식에서 숨 쉴 수 있냐고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오이카와는 머뭇거리다가 목걸이를 착용해보았다. 줄 길이가 딱 적당했다.
나쁘진 않네. 거울을 보여 요리조리 재어보았다. 그때마다 금색의 선이 입체적으로 제 윤곽을 드러냈다. 애초에 무난한 디자인이기도 하고, 제 얼굴이 받쳐주니 잘 어울렸다. 아, 그래. 찍어서 인스타그램에나 올릴까. 그는 선물 받은 셔츠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걸친 뒤 ‘미남’이라는 단어가 정직하게 새겨진 모자를 쓰고, 아까 전 안경마저 착용한 후 핸드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개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 보았다. 음, 전부 다 잘난 얼굴이라 고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사진)
모두들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오이카와씨 완전 감동했어~
#너희들이최고야 #완전센스쟁이들♥ #어제까지촬영해서피곤해흑흑
#하지만다크서클이있어도멋쟁이오이카와씨다! #오이카와씨인스타
글을 올리자, 놀랄 정도로 피로가 몰려들어왔다. 아무래도 남은 선물은 내일 풀어보아야겠다. 그는 모자와 안경을 벗은 뒤 셔츠까지 벗어 다시 곱게 갰다. 목걸이도 벗어야 할 텐데. 그는 가운데의 짧은 한 줄을 조심스럽게 매만진다. 어쩐지 벗고 싶지 않았다. 고작해야 팬이 선물한 목걸이인데.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쨩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들고 다닌다면 조금은 그가 제 가까이에 있다고 위로할 수 있을 테니까….
오이카와는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뉘였다. 느리게 눈을 내리감는다. 결국 목걸이는 빼지 않은 채였다.
퀴디치 경기장으로 향하는 호그와트 성의 북쪽 문에는 마법으로 인해 밤낮 관계없이 따뜻한 기온을 이루는 온실이 이어진다. 기숙사 불문 한 학년의 학생들이 전부 들어가고도 넉넉할 법한 크기의 온실이 정확하게 열 개. 온실 사이의 틈새에서는 근본 없는 녹색 잔디 빼곡하게 방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약초학 교수인 포모나 스프라우트의 관할이지만, 기실 그 크기가 워낙 방대한지라 그녀가 직접 전부 돌보는 것은 아니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각 학년의 온실 일곱 개는 교수가 늘 관리하지만 그 외의 세 온실은 그녀의 총애를 받는 소수의 아이들, 이를 테면 약초학 성적이 늘 O(특출함)를 차지하는 고학년 혹은 후플푸프 학생들이 추가점수를 대가로 돌보곤 했다.
개 중 모든 온실 중 가장 깜깜하고 삭은 온도를 자랑하는 9번 온실은 약초학 성적이 학년 내에서 제일 우수한 후플푸프의 반장이 관리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실제로 학생들이 섣불리 접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식물들이 대다수라는 교수의 판단 하에 온실의 한쪽에서 은밀히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사내가 불리기에 미숙한 소년은 크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자국 하나마다 짤랑거리는 금속의 마찰음이 망토 주머니에서 달랑거렸다.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나붓하게 흐트러진다. 호그와트 성에 설치된 거대한 시계탑이 댕댕 소리를 냈다. 4시를 가리키는 소리였다. 오후 수업이 30분 남았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치카라!”
회랑을 지나자 뻥 뚫린 아치 무늬 칸칸이 망토의 끝자락이 박혔다. 예민하게 노란 안감을 포착한 소년이 쩌렁쩌렁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엔노시타 치카라는 걸음을 다소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 햇발 짠하게 내리쬐는 분수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소년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의 색은 명백하게 붉다.
“유우.”
엔노시타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 변신술 수업 듣는 거 아니었어?! 니시노야의 물음이 한산한 회랑 사이 정원을 온통 적셨다. 그만한 울림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그런l데 왜 벌써 나와? 엔노시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같음 호선임에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과제 제출일인데 내지도 않고 수업을 땡땡이 친 놈이 있어서.”
맥고나걸 교수님의 특명이야. 잡아서 교무실로 대령하라셔. 니시노야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제 바로 위나 아래 학년과 달리 유난히 저희 동기들이 조용하다는 평을 듣곤 하지만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언제나 그리핀도르는 ‘고요’라는 단어의 예외로 적용이 되며, 저 말은 엄연히 비교급이다.) 그렇다고 사고치는 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능히 주인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대신 나 어둠의 마법 방어술 리포트 작성하는 거 조금만 도와,”
“됐어.”
그는 무심하게 잘랐다. 어디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유우. 너도 이제 6학년이잖아. 숙제는 스스로 해야지. 니시노야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네 걸 보고 베끼자는 게 절대 아니라…. 엔노시타는 제 친구를 향해 잔소리를 하는 대신 빙긋 웃는다. 소년의 입이 꾹 다물렸다. 명백한 패배였다. 승자는 저녁에 연회장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회장을 건너 익숙한 문으로 나오면 후덥지근한 온도와 함께 온실들이 있는 마당이 펼쳐졌다. 성 가장 가까이에 있는 2번 온실에서는 교수가 3학년 학생들과 함께 수업 중인지 말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이곳이 온실이 아니었다면 초상화나 유령들의 대화로 착각할 성 싶었다. 반투명한 흰색 유리 너머로 머리 낮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는 전부를 가로질러 9번 온실로 향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하자면, 엔노시타 치카라는 그 온실의 열쇠를 가진 유일한 학생이다. 문장에는 맹점이 있다. 말인즉슨, 9번 온실은 그 위험도와는 달리 굉장히 고전적인 출입문을 지니고 있으며 마법을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온실을 출입할 수 있었다. 증거로 막 당도한 온실의 문은 살짝 열려있다. 알로호모라는 1학년도 쓸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물론 올해 교수가 엄하게 출입을 제한한 장소에 함부로 발 딛을 1학년은 없지만. 이로써 예상은 확신으로 진화한다. 그는 한숨과 함께 완전히 문을 열었다. 지상에 있는 온실보다는 마치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나 더욱 어울릴 법한 환경이다. 빛 한 점 없는 온실의 양쪽으로 송곳니 제라늄들이 있었고 안쪽은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흑색이다. 아니, 검어야만 했는데.
그러나 줄기가 얽히고 틈을 메워 넝쿨을 이루는 거대한 온실의 끄트머리에서는 흐릿한 눈부심이 보였다. 마치 머글 역사의 첫 문장 같았다. : 태초에 빛이 있었다. 칠 년 전 읽었고 일 년 전 목도한 것이다. 엔노시타는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검은 넝쿨들이 파동을 따르듯 꿀렁인다. 막대 끝에서 구석진 것과 전혀 다른 빛이 타올랐다.
비로소 그는 제 기숙사 방만치나 익숙한 온실의 내부를 정확하게 보았다. 밝은 빛에 거대한 줄기들이 급하게 꾸물거리며 그의 주위를 피한다. 식물들이 움직이는 마찰음에 제라늄들이 입을 움직였고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따닥따닥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썩 위협적이었다. 지팡이로 바닥을 가리키자 악마의 덫들이 느릿하게 길을 만들어주었다. 자정의 금지된 숲을 고스란히 축소해 옮겨놓은 듯하다. 엔노시타는 익숙하게 그들이 도피하여 자아낸 길을 따라 걸었다. 팔뚝보다도 두꺼운 줄기들이 제 옆을 아슬하게 스친다.
이윽고 그는 태초에 도착했다. 빛과 함께 소년이 있었다. 분명 필치가 순찰 중에나 사용하던, 비마법사식 전등을 제 위에 건 채 누워 있는. 삐딱하게 꼰 다리를 덮은 망토의 색은 기실 저보다 더욱 이 음습한 9번 온실에 어울렸다. 늪 마냥 늘어진 음울한 초록. 엔노시타는 소년이 눈을 뜨도록 종용했다.
“후타쿠치.”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놀이 하지 마. 안 자는 거 알고 있어.”
한 마디 덧붙여서야 소년이 눈을 떴다. 누런 전등 아래 갈색 눈동자가 주홍을 머금었다. 살풋 찡그린 얼굴마저 객관적으로 수려한 얼굴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그게 뭐야.”
“머글 동화가 있어. 저주에 걸려 공주님이 영원히 잠에 들게 되는데, 왕자님의 키스로 깨어나지.”
“그거 사랑고백으로 들어도 되는 부분?”
“아니. 아직은.”
그 단조로움이 애매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어 그는 얼굴을 구겼다. 후플푸프 주제에. 읊조리자 선한 눈매가 저를 쫓아왔다.
아무리 동기이고, 일부 수업은 함께 듣는다 하더라도 두 사람에게서 접점이 생기기는 쉽지 않다. 순혈과 혼혈. 슬리데린과 후플푸프. 슬리데린은 그리핀도르와 대척점이지만 그렇다고 타 기숙사와 관계가 원만한 것도 아니었고, 특히 오소리들은 모조리 얼간이 취급하며 무시하곤 했다. 후타쿠치의 일탈이 완전히 엔노시타의 장소가 아니었더라면 이렇듯 편하게 말 섞을 일은 칠년 내내 없었을 것이다.
“맥고나걸 교수님이 화가 나셨어. 슬리데린 10점 감점에 당장 널 교무실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시던데. 정확하게는 ‘오늘까지 마감이었던 리포트를 들고 온 후타쿠치 켄지’를 교무실에 두라고 하셨지만.”
“제길.”
들켰나. 소년이 낮게 욕설을 지껄였다. 애초에 6학년 이후로는 O.W.L.s에서 E(우수함) 이상을 받은 학생들만 수업에 참가할 권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과목당 수강생이 한 학년의 학생들을 죄 끌어 모아도 스무 명이 넘지 못했다.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쪽이 멍청이지.
“그러게 땡땡이도 봐가면서 치지 그랬어?”
“후플푸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놀라운데.”
“성실은 후플푸프의 특성이지만, 후플푸프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지. 그것이 설사 같은 후플푸프라 해도 말이야.”
엔노시타가 녹스, 말을 입 안으로 웅얼거리며 빛이 꺼진 지팡이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빛이 개체가 줄어들자 두 사람의 주변을 에우던 벽이 움직이지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머글식 전등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고, 이것이 있는 이상 악마의 덫은 두 사람 사이를 침범할 수 없다. 빈손을 앞으로 내민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성실은 강요하지 않는다며?”
후타쿠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가장 눈에 띄는 세 개의 손금을 응시했다. 아직은 깨끗했다.
“지금은 내가 받은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 거고.”
그래서 그는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키는 대신 제 위의 랜턴을 내려 녹이 슨 손잡이를 쥐어주었다. 작은 심술이다. 흔들리는 빛을 피해 멀찍이 물러나 있던 마법 식물이 다시 천장을 장악해온다. 명암이 기이하게 뒤섞여 줄기의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을 강조했다. 엔노시타는 묵묵하게 손전등을 든 채 동기를 내려다본다. 이제 눈동자로도 모자라 온 얼굴이 금싸라기 뒤덮은 몰골이다. 여전히 빛이었다.
“정말 귀찮게 하네.”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그리고 시라부도 꽤 화가 난 모양이던데. 슬리데린의 반장을 들먹이자 후타쿠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금세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망토를 두 번 털고 두른다. 넥타이도 셔츠도 꼴이 엉망이었지만, 엔노시타는 손을 뻗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다듬기에 한손이 모자랐다. 대신 그는 등을 돌렸다. 숲의 길잡이, 어떤 사냥터지기처럼. 소년이 만든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등불이 깜박일 때면 식물들이 가까이 다가갔다 물러나길 반복했다.
악마의 덫이 만들어낸 동굴 아래로 발소리만 타박타박 울렸다. 엔노시타는 불청객을 먼저 내보낸 후에야 전등의 불을 껐다. 유리벽과 바닥을 재차 기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마냥 스산했다. 그는 전등을 온실 안쪽의 문에 걸어 놓은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누차 말하지만, 여기는 허가 받은 학생 외에는 출입금지 구역이야.”
“스프라우트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한 번 더 들어오면 이번에는 내가 감점 시킬 테니까.”
아하, 이런 게 직권 남용이라는 거지? 후타쿠치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며 엔노시타의 망토에 붙어진 반장 배지를 응시했다. 소년은 어깨만 단번 으쓱이고는 온실 문을 열쇠로 잠갔다. 쇠 부딪치며 내부의 잠금쇠 걸리는 소리가 귓속을 후볐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멍청하기는.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제 속마음을 내뱉지 않았다.
세계가 한낮이라 그림자가 가장 길었다. 그늘의 첫점에는 여느 때보다 화려하게 증축하고 쌓아올린 에도가 있었고 끄트머리에는 붉은 등과 화려한 화장으로 속내 죄 가린 일본 최대의 홍등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요시와라라 불렀다. 해와 달이 바뀐 곳을 들어서면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오롯이 저가 가진 재산만으로도 여자를 품고 하루를 호사할 수 있는 곳. 가난한 시정잡배는 뒷골목에서 선 채로 급하게 싸구려 창녀를 안았고 부유한 자는 금칠 된 방 안에서 우수한 게이샤들의 기예를 즐기며 술잔을 기울였다.
요시와라에서는 유녀들 역시 능력과 나이, 외모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어졌는데, 오이카와 토오루라 함은 중간, 혹은 그 조금 위였다. 손님을 받기 위한 용도의 개인 응접실과 저가 머무는 개인침실이 따로 나뉜 정도. 어미 역시 기녀였으나 출중한 외모로 인해 어릴 적부터 유녀로 교육받고 남창이 되었다. 춤, 노래, 화술, 밤기술 무엇 할 것 없이 괜찮으나 남창이라는 사실만으로 요시와라에서는 다소 천대받은 축이었다. 한때 막부의 높은 개들이 제 가신이나 견습 무사를 코쇼(小性)로 삼아 비역질을 했다곤 했지만 오래 전 전국 시대의 일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들도 가슴 몽글하고 부드러운 여성을 선호했고, 물론 여전히 동성을 끌어안는 자도 있지만 사회적인 시선 탓에 함부로 성향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여 그는 당연히 28살이 되어서도 평생 요시와라에 남아 있겠거니, 생각했다.
헌데 그 어마어마한 낙적료를 지불하고 저를 요시와라에서 빼내겠다, 라?
아침이 되었고 이제야 잘 시간이 되었지만 오이카와는 좀처럼 잠이 들 수 없었다. 얼룩덜룩한 몸을 씻고 유카타를 걸쳤다. 남성용임에도 불구하고 천 자체는 유녀들과 다름없이 천박하고 화려했다. 가게 앞을 지키던 시중 하나가 안자냐고 질문하기에 가볍게 산책만 하고 들어겠노라 답하고 나왔다. 자신의 가게는 매출의 반까지는 아니지만 반의 반 정도는 차지하는 좋은 상품에게 꽤 너그러웠다.
매일 축제와 행사가 열리던 큰길은 손님이 전부 빠져나가고 쓰레기로 황량하다. 까마득하게 높은 가게들이 나무문 닫은 채 암전해 있다. 걸음마다 다리 근처에 수놓아진 붉은 매화가 살랑거렸다. 햇살이 오이카와가 선 길을 짠하게 비춘다. 편편한 흙길이 유리밭처럼 반짝였다. 지금은 싸늘한 이 도로도 봄이 오면 벛꽃놀이로 만연할 것이다. 본디 나카노쵸의 벚꽃놀이는 유명했다. 봄에만 옮겨와 심었다가 꽃이 지기 시작하면 나무 째로 뿌리 뽑아 버린다는 점이 흠이지만.
요시와라의 가장 큰 길을 주욱 거슬러 올라가면, 까마득하게 요시와라의 유일한 입출구가 보였다. 감히 보면서도 넘지 못하는 대문. 오이카와는 어귀에 선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2층짜리 단촐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그 앞에 선 한 사내가 오이카와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차림새는 화려한데 이제 막 태양이 핀 아침에 요시와라를 나가려는 간 큰 유녀는 누구도 없었다. 그렇다고 뒤늦게 나가는 손님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내는 쉬이 눈앞에 선 자의 정체를 추측해냈다.
“오이카와.”
퉁명스럽게 이름을 불러보자, 오이카와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이와쨩. 애초에 외출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소매가 덜렁거렸다.
“문 앞에 번 안 서고 있어도 돼?”
“유곽도 아니고, 여기에서 집회소 앞에서 왜 번을 서냐.”
“흐흥. 그럼 계속 오이카와 씰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가? 설마. 이와이즈미는 마땅히 코웃음 쳤다. 기실 의도야 빤히 보이지만,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만 말았다. 만약에 여기서 확답을 바라고 캐묻는다면 도리어 왜 자야할 시간에 제 나와 있냐고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뭉툭한 신발에 쓰레기가 걸려 밀어낸다.
“오늘은 왜 또 안자고 나왔냐.”
“음, 새벽에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뭔데.”
“요즘 자주 오던 손님 있지? 자기 집안이 쿄랑 무역을 한다고 자랑을 하던 새파란 애송이.”
“그래.”
“걔가, 저가 낙적료를 지불할 테니 함께 요시와라를 나가지 않겠냐고 하는 거야.”
“…….”
“나한테 단단히 빠진 것 같지?”
여상히 웃었다. 햇빛이 오이카와의 얼굴에도 내렸다. 한잠 자지 못해 퀭해야 마땅할 텐데도 반짝인다. 이와이즈미는 잠시 침묵했다. 오이카와의 손을 잡아줄 수는 없었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제 왼팔이 비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잘됐네.”
너, 요시와라 밖을 궁금해 했잖아. 그래서 돌아온 후로 계속 나한테 이야기 해달라 찾아왔던 게 아니었어? 오이카와는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와이즈미는 갓난아이 적 요시와라 외곽의 논에 버려진 것을 요시와라의 자경단인 시로베에 중 하나가 주워 이곳에 입성하게 되었다. 오이카와와 마찬가지로 붉은 홍등가가 고향이 되었으나 귀속된 처지는 아니었다. 그는 원한다면 충분히 자유롭게 요시와라를 빠져나갈 수 있었고, 실제로도 오년 전 검 하나 달랑 들고 빠져나갔었다. 당시 견습 유녀였던 오이카와는 가지 말아달라고 그의 옷깃을 붙잡고 울었더란다.
“그건 핑계였고. 난 그냥 이와쨩이 보고 싶어서 찾아갔을 뿐이야.”
그러나 결국 이와이즈미는 빠져나갔고, 이년 후 텅 빈 팔 한 짝과 함께 다시 요시와라로 돌아왔다. 왜 그가 돌아왔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시로베에가 되어 오른손에 창을 들고 순찰을 돌지만, 아직도 오이카와의 옷장 안에는 제 손과 함께 잘린 건조한 천자락이 남아 있다.
“네가 없는 곳이면 요시와라 안이든 밖이든 하등 차이 없어. 어차피 섹스 없이 돈을 벌 방법도 잘 모르고.”
오이카와는 말했다. 고백인 것조차 인식 못하고 깜박 넘어갈 정도로 무던한 투였다.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찡그렸으나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싸구려 검은 무명과 윤기가 흐르는 매화가 종종 부딪쳤다 떨어진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거절하든 말든 돈을 주고 날 빼낼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를 테면 원래는 평범한 남창이었다가 이제는 전용 남창이 되는 거지. 꽃잎은 없다.
“사실 어차피 박히는 거, 한명에게 박히든 여럿에게 박히든 상관은 없는데 나가면 다시는 이와쨩을 못 보잖아.”
“…….”
“그건 싫어.”
“…….”
“그래서 그런데, 이와쨩. 이와쨩은 요시와라 밖을 이미 알잖아. 어쩌면 내가 몸 팔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지도 모르고.”
남자는 고운 눈으로 조심스레 오랜 소꿉친구이자 짝사랑을 흘겨보았다. 단단한 표정. 괜히 침을 꼴깍 삼키고, 아무렇지 않게.
“우리 같이 나갈까?”
제안했다. 이 말을 듣는 당사자가 자경단의 일원이라는 것도, 그리고 자경단의 가장 큰 임무가 바로 요시와라에서 도망치려는 기녀를 처리하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 오이카와로서도 이 말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흘 내로 온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일 밤이야. 오오히케(大引け)[각주:1]가 부딪칠 때. 나도 남자니까, 평범한 옷을 입으면 조금 반(番) 같아 보일 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오년 전,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때. 이와이즈미는 오 분 동안 침묵했으니까. 그리고 이년을 돌아, 제게 요시와라 밖이 그리도 활기차고 좋더라 투박하게 설명해주면서도 너는 다시 내가 있는 거리로 돌아와 주었으니까. 그는 5분의 침묵을 믿었다.
“뭐, 같이 안 가주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도망이 들키면 죽어야 하니까, 이왕이면 네가 날 죽여주었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네게 죽든, 너와 도망을 가든 오이카와 씨에게는 전부 썩 괜찮은 최후일 테니까. 오이카와는 빙긋 웃으며 가볍게 발을 디뎠다. 부러 그늘을 피해 땅따먹기 하듯 폴짝폴짝 뛴다. 그렇게 성큼 이와이즈미를 앞서가, 다시 돌아온 자신의 가게 앞에서 몸을 틀었다. 여기까지 다시 5분.
“기다릴게.”
낮이 가까워지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오이카와의 머리칼이 이와이즈미의 발등을 덮는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침묵했다.
나무토막. 부딪쳐서 울리는 소리로 요시와라 하루의 끝을 전한다. 새벽 2시에 울린다. [본문으로]